▲ 영화 ‘어쩔수가없다’ 스틸컷.
▲ 영화 ‘어쩔수가없다’ 스틸컷.

※ 주의 : 영화 ‘어쩔수가없다’의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해고라니. 25년 다닌 직장에서 잘리다니? 회사를 인수한 외국계 자본이 구조조정을 감행할 거란 건 예상했지만, 그 목록에 자기 이름부터 오를 거란 생각은 해본 적 없다. 용감한 고백으로 흠모하던 여인과 결혼했고, 운 좋게도 그 사이에서 아들과 딸 두 자식을 뒀고, 대출은 조금 꼈지만 꿈에 그리던 집까지 샀는데… “이제 다 이뤘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닥친 이 날벼락, ‘만수’(이병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결심한다. 어쩔 수가 없는 일들을.

24일 개봉하는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 이야기다. ‘올드보이’(2003) 이후 20년 넘게 그의 작품을 두루 관심 있게 지켜본 우리 관객은 아마 그 이름만 들어도 ‘복수’, ‘살인’, ‘블랙코미디’와 같은 키워드를 빠르게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어쩔수가없다’는 좀 다른 데가 있다. 그의 세계에선 잘 관찰되지 않던 ‘전통적 가족’이라는 소재가 힘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만수’가 일자리를 되찾으려는 건 그가 보물처럼 아끼는 제 가족과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다.

진부한 얘기가 된 건 아닌가, 미심쩍게 생각할 관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올드보이’의 충격적인 부녀 관계, ‘스토커’(2013)의 형수-시동생 근친관계, ‘아가씨’(2016)의 억압적인 삼촌-조카 후견 관계를 떠올리면 그의 작품은 대개 전통적인 가족 개념을 완강히 거부하며 터부를 건드려왔기 때문이다. ‘어쩔수가없다’는 지극히 서로를 사랑하는 ‘만수’와 ‘미리’(손예진) 부부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서 지난 접근과는 다른데, 그럼에도 그들 관계의 믿음이 도리어 그 삶을 뒤흔드는 강력한 단초가 된다는 점은 충분히 역설적이며 흥미로운 데가 있다.

▲ 영화 ‘어쩔수가없다’ 스틸컷.
▲ 영화 ‘어쩔수가없다’ 스틸컷.

몇 달째 재취업에 실패한 ‘만수’는 이제 행동하기로 한다. 자신의 일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같은 면접장에 나타날 확률이 가장 높은 경쟁자를 죽여 없애기로 말이다. 물론 순탄할 리는 없다. 가장 먼저 찾아낸 경쟁 후보 ‘범모’(이성민) 곁에는 비범한 풍모의 아내 ‘아라’(염혜란)가 있고, 최종 처리 대상으로 결정한 현직자 ‘선출’(박희순)은 단숨에 제압하기엔 눈치가 좀 빠른 것 같다. 이들을 하나하나 처리해 나가는 ‘만수’의 허술하고도 기괴한 수법은 그 자체로 장르적인 볼거리가 되고, 그 비극적인 과정을 희극적으로 묘사하는 순간 흘러나오는 조용필의 곡 ‘고추잠자리’나 산울림의 곡 ‘그래 걷자’는 관객의 ‘웃픈’ 감각을 한층 강화한다.

작품이 진정으로 비정해지는 대목은 만수가 애를 쓸수록 ‘가족을 온전히 지키겠다’는 목적과는 점차 멀어진다는 순간들일 것이다. 면접을 보러 간다며 자꾸만 수상쩍은 행동을 하는 남편을 유심히 지켜보던 아내, 아빠의 빈 자리를 틈타 예상치 못한 비행에 나섰던 아들은 각자의 시간과 경험 안에서 타락해 버린 ‘만수’를 직감한다. 드러낼 것인가, 침묵할 것인가. 일종의 병증이 전이되듯 ‘만수’의 혼란이 다른 가족 구성원으로 옮겨붙는 동안, 유일하게 그 모든 집착과 번뇌에서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는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가 상징하는 순수가 현실에서 어떻게 정의되는지 깨닫고 나면 이 가족극의 씁쓸함은 배가된다.

▲ 영화 ‘어쩔수가없다’ 스틸컷.
▲ 영화 ‘어쩔수가없다’ 스틸컷.

박찬욱 감독은 지난 17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어쩔수가없다’를 선보인 뒤 “가족들이 ‘만수’가 하는 일을 눈치채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점이 나를 사로잡았다”고 했다. 작품 세계 안에서 그는 비교적 명료한 결론을 맺고 이야기를 끝내는 쪽을 택했는데, 그 마무리를 바라보는 관객에게는 감독의 의중이 그러했듯 명쾌하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잔여물처럼 남을지 모르겠다. 가족을 지켜야 하니까, 자신 역시 그 모든 비정함 앞에서도 ‘어쩔수가없다’고 답할 수 있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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