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3학년 2학기’ 스틸컷
▲ 영화 ‘3학년 2학기’ 스틸컷

장례식장 문을 열고 들어섰다. 부의금 봉투가 놓여있는 곳 앞에 서서 지갑 속 곱게 접힌 만 원짜리 몇 장을 꺼내어 넣는다. 그 다음엔 어디엔가 이름을 써야 하는 것 같은데… 책가방을 멘 학생 ‘창우’(유이하)의 어리숙한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맞은편 어른이 돕는 말을 건넨다. “봉투 뒷면 아래에 이름을 쓰면 돼요.” 고등학교 3학년, 너무 이른 나이에 부의 봉투에 제 이름 세 글자를 써넣게 된 주인공 ‘창우’는 그제야 영정사진 앞으로 간다. 그곳엔 특성화고 취업 이후 공장에서 만난 아는 형 얼굴이 있다. 얼마 전 구내식당에서 만난 그는 34개월에 걸친 병역특례 근무 기간을 막 끝마치고 라오스 해외여행을 갈 참이라고 했다.

다음 달 3일 개봉하는 영화 <3학년 2학기>의 주인공 ‘창우’는 인생의 갈림길에 섰다. 특성화고 졸업을 앞둔 3학년 2학기, 지금이라도 인턴 생활을 하지 않으면 졸업 후에는 취직이 더 힘들 거라는 담임 선생님의 걱정 반, 설득 반에 그는 일단 출근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라인더로 철을 갈고 용접으로 접붙이는 적잖이 위험한 업무에 뛰어들어야 하는 제조 중소기업, 급여는 최저임금이고 인턴 기간엔 그마저도 40%만 지급된다지만 ‘안 갈래요’ 소리는 차마 나오지 않는다. 공부 머리나 비상한 재능과는 거리가 있는, 학교를 빼먹지 않고 다닌 성실함 정도가 내어 보일 것의 전부인 ‘창우’는 요즘 ‘뭐 먹고 살거냐’는 질문에 부쩍 머릿속이 복잡하다.

▲ 영화 ‘3학년 2학기’ 포스터
▲ 영화 ‘3학년 2학기’ 포스터

마음에 걸리는 일은 자꾸만 생긴다. 막상 출근한 회사엔 인턴을 위한 최소한의 교육 체계도 없고, 이날 저 날 현장 상황이 닥치는 대로 아무 일을 쥐여준 사수는 매번 핀잔만 들려줄 뿐이다. 전원을 꺼도 곧장 멈추지 않는 그라인더를 안전 장비 없이 사용해야 하고,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추락 방지 장치를 설치하지 않은 2층 높이 하역공간에서 사람 머리 근처로 물건이 떨어지는 일도 본다. 나쁜 점만 있는 회사는 아니라는 걸, 머리론 안다. 정직원이 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공업전문대학에 진학할 수 있을지 모르고, 운이 좋으면 병역특례요원으로 선정돼 군대도 면제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창우’의 마음은 자꾸 흔들린다. 일하다가 생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아는 형의 장례식에 다녀온 이후론 더 그렇다.

<3학년 2학기>는 어느 쪽으로도 쉽게 결정 내리지 못하는 ‘창우’의 고민을 현실적으로 보여주며 차츰 관객의 마음을 설득해 나간다. 성에 차지 않는 일터를 진작에 박차고 나가버린 당돌한 친구 ‘우재’(양지운), 현장의 에이스로 일했지만 뒤늦게 부당한 노동 여건에 분개하며 자리를 떠난 ‘성민’(김성국)과 달리 ‘창우’는 그럴만한 배짱도, 분노도 부족하다. 다만 그런 그의 평범함은 역설적으로 무수한 평범한 관객의 공감을 사는 근간이 된다. 사회에서 제 성질 다 부리고 사람은 늘 소수인 까닭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일터에서 마주하는 약간의 불의에 눈 감고, 다소간의 위험과 타협하며 현실을 지킨다. 자식 셋을 홀로 뒷바라지해 온 엄마가 이사 갈 전셋집 보증금을 마련하느라 애쓰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창우’로서는 더욱 그렇다.

▲ 영화 ‘3학년 2학기’ 스틸컷
▲ 영화 ‘3학년 2학기’ 스틸컷

‘창우’는 결국 그 회사에서 일하게 될까. 혹여라도 위험한 일을 하다 안타까운 사고를 당하지는 않을까. 모든 불운을 피해 회사 추천을 받아 전문대학에 진학하거나, 병역특례요원으로 군대를 면제받는 기회를 거머쥘 수도 있는 걸까. 산업재해로 20대 청년이 사망했다는 뉴스가 지나치게 자주 보도되는 우리 사회에서 ‘창우’의 미래를 손쉽게 낙관할 관객은 많지 않겠지만, 영화를 연출한 이란희 감독은 그런 현실을 떠올릴 때 함께 따라붙는 분노나 착잡함은 끝내 깊이 묻어둔 채 마지막까지 ‘창우’가 택한 일상을 지긋이 보여주는 쪽을 택한다. 그 절제된 입장 덕에 ‘창우’의 삶과 고민, 마지막 선택의 의미까지 보다 담백하게 곱씹을 수 있게 된 관객은 기꺼이 기도하게 된다. 그가 언제까지나 무사히 일할 수 있기를. 그의 삶이 부디 무탈히 지켜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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