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랫동안 김훈 작가를 흠모해 왔다. 국문학을 전공한 나는 ‘언론은 풍문과 싸워야 하고, 비화 없는 세상을 위하여 싸워야 한다’라는 그의 문장에 매료됐다. 그 말에 이끌려 신문 기자가 되었고, 세상에 나의 필력을 떨치겠다는 다짐으로 가슴이 벅찼다.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그런 내게 신문사는 ‘뉴미디어부’로 가거라 명했다. 글재간은 고이 접어두었다. 팔자에도 없던 유튜브 영상 만들기에 뛰어들었다. 시간을 갈아 넣으며 예술혼을 불태웠다. 멋들어지게 성공 신화를 쓰고 싶었지만 헛꿈이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랬던가. 그 ‘어머니’는 내게 속삭였다. “유튜브는 예술판이 아니란다.”
유튜브는 대중매체다. 팔릴 만한 물건이 팔린다. 이 단순한 명제를 받아들이는 데 몇 년이 걸렸다. 뉴미디어 담당 기자로서 진짜 비극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저널리즘만을 추구해서는 성과를 내기 어렵다. 여기서 말하는 성과란 곧 ‘조회수’다. 조회수가 바닥을 쳐도 묵묵히 기다려주는 신문사는 거의 없다. 콘텐츠를 만드는 당사자 역시 지쳐 나가떨어지기 쉽다. 안 팔리는 콘텐츠를 팔려면 엄청난 공력이 필요하지만, 그럴 만한 여유가 없다. 신문사에서 취재보도는 텍스트 중심으로 이뤄지고, 그 사이클이 굳어져 있다. 유튜브는 디지털팀의 고유 업무로 여겨진다. 디지털팀에는 취재기자가 별로 없다.
하지만, 세상은 빠르게 변해간다. 유튜브를 통한 뉴스 이용률은 50%에 이른다. 유튜브 뉴스 이용률을 연령대별로 보면 50대가 61%로 가장 높고 60대 이상(53%), 40대(48%), 20대(44%), 30대(32%) 순이다. 중장년층 이용률이 두드러진다.
서울에서는 신문사의 정치비평 방송이 성행한다. 신문사 채널 너도나도 매일매일 정치판을 해설한다. 유튜브로 뉴스를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중장년층을 타깃으로 하는 듯하다. 조회수와 구독자를 모을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임은 틀림없다.
정치비평도 저널리즘의 한 갈래다. 하지만 그것만 있을 때, 저널리즘의 기반이 흔들린다. 정치비평 방송이 총체적으로 너무 많다. 신문사 채널마다 엇비슷한 정쟁 해설을 반복한다. 끊임없이 판세를 해석하고 그 안에서 서사를 만들어 낸다. 그럴수록 판세를 해석하는 것인지 판세를 만들어가는 것인지 모호해진다. 언론은 풍문과 싸워야 한다는데, 유튜브에서는 그러한 저널리즘의 규칙들이 흐물흐물해진다. 신문에서는 엄격하게 데스킹되는 지점들이 유튜브에서는 으레 허용되는 분위기다. 신문의 저널리즘과 유튜브의 저널리즘은 서로 다른 것일까.
서울 정치판 중심으로 돌아가는 신문사 유튜브 방송의 경향성에서 다양한 의제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를테면 복지, 노동, 환경 문제는 유튜브 채널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물론 지역 의제는 발 디딜 곳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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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현상은 본질적으로 신문사 유튜브 채널이 취재보도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유튜브에는 기자가 없고 취재가 없고 보도가 없다. 대체로 그렇다는 얘기다. 신문사에서는 디지털 부서에 취재기자를 충분히 배치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기자들 사이에서는 디지털 부서로 발령이 나면 유배 간다는 정서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상 그동안 해오던 취재보도 행위를 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출입처, 기자단 바깥에 있는 한직처럼 여겨진다. 취재보도 부서가 주류집단으로 있고 디지털부서라는 외곽조직이 있는 모양새랄까. 비교적 소수 인원이 콘텐츠를 도맡아서 만드는 형편이다.
하지만 나는 대중이 유튜브로 뉴스를 소비하는 만큼 신문사도 유튜브를 취재보도 ‘매체’로서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물론 유튜브의 제1명제는 팔릴 만한 물건이 팔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문사로서 꼭 팔아야 하는 물건이 있다면, 그것을 팔릴만 하게 잘 만들 필요도 있다. 그러려면 충분한 투자와 인내가 필요하다. 편집국 차원에서 취재보도 기능의 일부분을 유튜브로 이양하는 실험적인 시도가 필요하다. 신문사들이 유튜브 오리지널 보도를 끊임없이 시도하다 보면 그중에서 판도를 바꾸는 성공 사례가 나타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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