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택배 ‘새벽배송 금지’ 논란은 지난달 28일, 한국경제 <[단독] “쿠팡 새벽배송 없어지면 어쩌나”… 2000만 소비자 볼모 잡혔다> 기사로 시작됐다. 심야 노동자의 과로 문제보다는 ‘노조가 무리한 주장을 한다’는 걸 강조하는 데 새벽배송이 수단으로 쓰였다. 한국경제는 이날 <[단독] “새벽배송 금지하라”…도 넘은 민주노총>, <[단독] 새벽배송 이젠 일상인데…납품 농가 타격, 워킹맘은 ‘발동동’> 등의 기사를 연이어 냈다.
한국경제뿐이 아니다. 매일경제는 지난달 29일 <민주노총 압박에 흔들리는 ‘새벽배송’>, <택배노조의 무리수···“심야배송 중단하라”> 등의 기사를 냈다. 서울경제는 <“2000만명이 쓰는데 어떻게 살라고”…‘새벽배송’ 내년에는 사라진다고?> 기사를 냈다. 중앙일보도 지난 7일 <택배기사·소비자 모두 원하는데…민노총 ‘새벽배송’ 태클> 기사를 지면에 냈다. 지면과 온라인 모두 ‘민노총’이 강조됐다.


지난달 22일 열린 ‘택배 사회적 대화 기구’ 회의에서 민주노총 산하 전국택배노조는 자정부터 오전 5시까지의 초심야시간대 배송을 제한하고 오전 5시에 출근하는 근무조가 새벽배송 물품을 배송하는 안을 제시했다. 건강권 보호를 위해 심야 배송 횟수를 조정하자는 것이 골자였다. 이것이 ‘새벽배송 전면금지’ 주장처럼 보도돼 각종 커뮤니티에서 민주노총에 대한 비판·조롱이 쏟아졌다.
‘사회적 대화 기구’는 주요 택배사와 노조, 당국이 참여하는 대화 기구로 의사결정 기구가 아니다. 여러 의견을 내놓자고 만든 자리인데 당장 새벽배송이 금지되는 것처럼 보도가 나왔다. <“애 어떻게 키우라고”… 민노총 “새벽배송 중단” 제안에 ‘부글부글’>(머니투데이), <새벽배송 금지에 유통망 ‘경고등’… 물류대란 현실로>(이뉴스투데이) 등이다.
민주노총은 “보수언론의 왜곡”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 5일 성명에서 민주노총은 “(노조의 제안은) 시민의 편의를 유지하면서도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자는 합리적 방안이다. 노조가 요구하는 것은 ‘배송 중단’이 아니라, 죽음을 멈추자는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장치”라며 “국제 기준으로도 금지된 ‘연속 고정 야간노동’은 중단돼야 한다. 쿠팡의 새벽배송은 저녁 8시 30분부터 다음 날 오전 7시까지, 주 5~6일 연속 고정야간노동”이라고 했다.
‘소비자 대 노조’로 짜인 프레임 탓에 심야 노동자의 과로 문제는 쟁점에서 밀렸다. 한국경제는 지난달 30일 <택배기사도 소비자도 원치 않는데…새벽 배송 금지하라는 민노총> 사설에서 “야간 근로가 건강권을 침해한다는 이분법도 공감하기 어렵다. 도로가 뚫린 밤에 배달을 끝내면 더 많은 휴식시간 확보로 노동자 건강에 기여하는 측면이 공존한다”고 주장했다. 정작 택배 기사들은 물량에 대한 압박과 마감 시간 때문에 휴식시간을 충분히 활용하기 어렵다고 토로하는데 이러한 현장 상황은 무시됐다.
새벽배송 노동이 건강에 해롭다는 것은 입증된 사실이다. 2012년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는 야간노동을 2급 발알물질로 규정했다. 쿠팡 새벽배송 노동자는 교대 없이 야간노동을 고정적으로 해 국제적으로 봐도 노동 강도가 매우 심한 편에 속한다. 쿠팡이 직접 고용하지 않은 다수의 택배 노동자들은 주 52시간 이상 노동 금지 등 근로기준법 보호 대상에서 벗어나 있다. 자영업자로 분류되는 특수고용직이기 때문이다.
김현주 이대목동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지난 3일 페이스북에 “야간작업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는 ‘교대근무보다 고정 야간이 낫다, 사람은 적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과학적으로 정확하지 않다”며 “한국의 제조업·운수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고정 야간근무자의 심혈관 사망률이 주간 근무자의 약 2배에 이른다는 결과가 보고되었다. 이는 ‘야간노동은 몸이 적응하는 과정’이 아니라, 회복되지 못한 생체리듬의 파괴가 누적되는 과정임을 뜻한다”고 했다.
김 교수는 “야간노동은 단순히 ‘피곤한 시간대에 일한다’는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뇌와 호르몬, 체온과 혈압, 면역 시스템은 낮과 밤을 기준으로 움직이도록 설계되어 있다”며 “그 리듬을 장기간 거스르면, 수면 부족을 넘어 심장질환, 고혈압, 당뇨, 우울증, 심지어 암으로까지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수십 년간의 역학조사에서 확인됐다”고 강조했다.

쿠팡에서 택배 기사가 과로로 사망하는 일은 반복된다. 지난해 5월 쿠팡CLS(쿠팡의 배송 자회사) 직원의 배송 압박에 “개처럼 뛰고 있긴 해요”라고 답한 뒤 사망한 고 정슬기씨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정씨는 밤 8시30분 출근, 다음 날 오전 7시 퇴근의 야간노동을 주 6일 반복했다. 시사IN은 지난 1월, 2020년부터 2023년까지 4년 동안 쿠팡의 한 해 평균 재해율은 6.70%로 전체 모든 직종 평균 재해율의 10.6배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산재를 당한 다수의 쿠팡 노동자들이 산재보험을 신청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쿠팡 노동의 위험 정도는 더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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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이 논란이 노동자의 ‘건강권 보호’를 중심으로 흘러갔다면 어땠을까. 교대근무제 등의 구체적 대안들이 쟁점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이승윤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통화에서 “소비자와 노동자 혹은 노노 갈등 식으로 프레임이 협소하게 짜여진 것이 문제”라며 “소비자의 권리가 노동자의 생명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대원칙은 사회적으로 합의하는 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반복되는 과로사를 막기 위해 ‘새벽배송’이란 주제가 나왔다는 것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택배 사회적 대화 기구’에는 쿠팡도 참여하고 있다. 쿠팡 노동자의 과로 문제 때문에 불거진 논란인데 정작 쿠팡은 책임 있는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이승윤 교수는 “쿠팡이 나서야 할 때다. 언론도 이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며 “이 업종에 이렇게 많은 산재 사고가 일어나고 있다는 건 분명히 잘못된 게 있다는 것이다. 이를 독점적 시장 지배력을 가진 쿠팡이 인지해야 업계의 지속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쿠팡이 적극적으로 과로사 대책 논의에 가담해 ‘게임체인저’ 역할을 해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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