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BC가 고 오요안나 기상캐스터 1주기 추모제 직전, 프리랜서 기상캐스터를 폐지하고 정규직 기후전문가를 채용하겠다고 밝혔다. 현직 기상캐스터들 노동자성을 인정하고 정규직화하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가운데, MBC가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MBC는 지난 15일 저녁 보도자료를 통해 “MBC는 프리랜서 기상캐스터 제도를 폐지하고 기상기후 전문가 제도를 도입해 정규직으로 채용하기로 했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신설 기상기후 전문가는 기존 기상캐스터 역할은 물론 취재, 출연, 콘텐츠 제작을 담당해 전문 기상·기후 정보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고 했다.
‘사내 비정규직 고용구조 개선’을 요구하며 서울 상암동 MBC 사옥 앞에서 단식 농성 중인 고인의 어머니 장연미씨는, MBC가 한마디 협의도 없이 일방적인 발표를 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이날 점심시간 무렵 농성장을 찾은 안형준 MBC 사장은 장씨와의 대화에서 관련 방침을 언급하지 않았다. 취재를 종합하면 ‘폐지’ 당사자인 MBC 기상캐스터들에 대한 사전 설명이나 협의 과정이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오 캐스터 어머니 장씨는 MBC에 “오요안나를 배제하고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MBC는 정규직 채용 시 기상·기후·환경 전공자나 자격증 소지자 또는 관련 업계 5년 이상 경력자를 대상으로 하며 기존 캐스터들도 지원할 수 있다고 했다. 2021년 5월 입사했던 오 캐스터는 문예창작과 전공이며, MBC에서 3년3개월가량 일하다 세상을 떠났다. 오씨와 비슷한 시기 입사했을 경우 채용 시점에 따라 경력 요건을 채울 수 없을 거란 우려도 일각에서 나온다.
장씨는 “요안나의 근로자성을 인정해달라고 단식에 나섰는데, MBC가 요안나 동료 캐스터들까지 다 나가라고 할 줄은 몰랐다”며 “캐스터들이 잘리고 나서 ‘기후 전문가’로 채용된다는 보장이 어딨나”라고 물었다. 유족과 연대 단체인 엔딩크레딧, 직장갑질119 등도 “MBC 발표는 고 오요안나 캐스터의 노동자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라며 “오요안나를 두 번 죽이는 행위를 중단하라”고 밝힌 바 있다.
오 캐스터 사건은 방송사들이 기상예보 직무에 대한 시각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을 재차 부르기도 했다. 실제 2019년 KBS 비정규직 연구 용역 보고서에서 기상캐스터 직무를 법적 노동자성 판단 기준인 상시성, 지속성, 종속성이 강하다고 판단하며 그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동시에 노동계에선 방송사가 기존 캐스터를 손 쉽게 자르는 식으로 대응해선 안 된다는 우려도 있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도 오 캐스터는 MBC 지휘 감독에 철저히 종속된 근로자라 강조한 바 있다. 이런 가운데 MBC가 기존 프리랜서 기상캐스터와 계약을 종료하고 기상기후 전문직을 정규직으로 채용한다고 처음 밝힌 것이다.
아나운서, 기상캐스터 등으로 일해온 여성 방송인들은 MBC 방침이 불안정한 고용 속에서 경쟁을 강요하는 고질적 문제를 심화시킬 거라 우려했다. 프리랜서로 일해 온 지상파 방송사의 A 아나운서는 “을과 을의 싸움을 부추기는 것 같다. 기존 캐스터들이 연말 계약종료를 앞두고 있는 점을 보고 한 번 더 놀랐다”며 “MBC가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든 피해자든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선을 긋겠다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다.
또다른 아나운서 B씨는 “고용책임을 지라는 요구에 ‘너희는 우리와 뽑힌 방식이 다르다’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하겠다’는 듯한 대응이 반복돼 안타깝다”며 “MBC가 대승적으로 인정할 것을 인정하면 더 많은 국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을 텐데, 프리랜서들에게 ‘우리와 너희는 다르다’고 말하는 태도가 가장 힘들다”고 했다.
여성·노동단체에서도 같은 취지의 지적이 나온다. 한국여성민우회는 “MBC는 기존에도 방송작가나 아나운서, 기상캐스터를 프리랜서로 사용하며 고용 책임을 회피했다. 이들이 ‘우리도 노동자’라 말할 때마다 자르고 신규채용으로 공정성을 확보하겠다고 말하는 건 잘못된 방식”이라고 했다.

직장갑질119 윤지영 대표(변호사)는 “MBC는 정규직을 특별한 자격과 심사를 거쳐야만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노동법은 회사에 종속돼 일한 사람에게 책임을 지라고 밝히고, 확립된 판례 기준에 따르면 오요안나 등 기상캐스터도 노동자”라고 했다.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는 “기상기후 업무를 더 전문화하려 했다면 기존 인력을 신뢰하고 교육과 훈련 기회를 제공해야 했다. 지금의 대응은 노동자를 소모품처럼 취급하며 내치고, 개인에게 ‘능력을 갖추라’는 부담을 전가하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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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에서도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15일 “MBC가 기상캐스터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을 요구했더니 기상캐스터 일자리를 없애겠다고 발표했다. 과연 이 문제의 본질을 인식하고 해결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며 “추석 이후 열리는 국정감사에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겠다”고 예고했다. 한창민 사회민주당 대표는 “MBC 경영진은 유족에게 기상전문직 채용 계획을 설명하고 현재 일하고 있는 기상캐스터들의 고용전환에 대해 논의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면피용 정규직 채용으로 문제와 해법을 왜곡하는 언론플레이를 자행했다”고 했다.
MBC 측은 채용 방침은 MBC 권한이라는 입장이다. MBC 관계자는 16일 “기상기후 전문가 제도를 도입한 취지가 기상캐스터를 없애기 위함은 아니다. 전문성을 살리는 제도를 만들겠다는 것”이라며 “현직 캐스터만 일괄 정규직화하라는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 MBC는 공채 개념이 계속 유지됐고, 취업을 준비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공정한 기회를 줘야 한다”고 했다. 유족과 협의를 하지 않은 이유로는 “MBC 경영방침으로 (유족과) 논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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