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오요안나 MBC 보도국 기상캐스터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된 15일 저녁, 서울 상암동 MBC 사옥 앞에서 진행된 추모문화제에선 탄식이 터져 나왔다. MBC가 추모제 시작 직전 프리랜서 기상캐스터 제도를 폐지하고 정규직으로 ‘기후기상 전문가’를 채용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유족은 현 기상캐스터들의 정규직화를 요구해왔지만 MBC는 올해 12월 기상캐스터들의 계약이 만료된 후 공개채용을 통해 기후기상 전문가를 채용하겠다며 기존 프리랜서 기상캐스터들도 지원할 수 있다고 밝혔다.
추모제 도중 발언에 나선 김유경 노무법인 돌꽃 대표노무사는 “유족의 요구를 깡그리 무시하고 수용한 것인냥 호도하고, MBC는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하기 위한 면피성 꼼수에 다름 아닌 자료”라며 “분노할 수밖에 없다”고 규탄했다. 그는 “지금 일하고 있는 기상캐스터들의 정규직화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얘기다. 이들이 지원했다고 뽑아주겠나”라며 “MBC는 과거 근로감독 결과 수많은 방송작가들의 노동자성이 인정되니 그들을 하나둘씩 다 잘라냈다. 지금은 대놓고 그런 일을 또다시 하겠다고 선언했다”고 비판했다.
김 노무사는 “피 끓는 심정으로 어머니가 단식하고 많은 사람들이 연대하는 이 자리, 이 시각에 보도자료를 냈다는 건 철저히 계획된 것이고 유족을 기만하는 행위”라며 “이 싸움을 끝까지 이어가라고 MBC가 기름을 붓고 있다. 오늘 이 분노를 끝까지 기억하겠다”고 했다.

MBC의 사과와 재발방지책을 요구하며 8일째 단식 농성 중인 고인의 어머니 장연미씨는 “MBC 임직원들, 사장단은 꼭 들어라. 여기서 내 목숨을 끊는 한이 있어도 절대, 당신들이 먼저 와서 이야기하기 전까지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며 “요안나 때문에 살았고 요안나 때문에 죽고 싶은 사람이기 때문에 인생 목표가 이미 없어졌지만, 살아남아 요안나처럼 비정규직으로 가슴 앓이하는 친구들을 도와줄 것”이라고 말했다.
추모제를 찾은 정치인들도 MBC를 규탄했다. 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기상캐스터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을 요구했더니 기상캐스터 일자리를 없애겠다고 발표한 것”이라며 “유족과 진정성 있는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대외적으로만 보여주기식 면피로 일관하는 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창민 사회민주당 대표 역시 “공영언론이 ‘우리 사회가 비정규직으로 넘쳐난다’는 비판 기사를 내면서 정작 본인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면피용으로 포장하는 이중성이야 말로 걷어내야 한다”고 외쳤다.

직장갑질119, 엔딩크레딧 등 유족과 연대하는 단체들도 추모문화제가 진행되던 중 입장문을 내고 MBC를 향해 “고 오요안나를 두 번 죽이는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어머니가 제2의 오요안나를 막기 위해, 기상캐스터 정규직화를 위해 단식했는데 단식의 결과가 오요안나의 동료들을 MBC에서 잘리게 하는 것”이라며 “MBC는 기상캐스터 정규직화를 비롯한 유족의 요구를 즉각 수용하라”고 촉구했다.
MBC 사옥 행진하며 “MBC는 기상캐스터 정규직 전환하라” 외친 시민들
추모문화제에는 200여 명의 시민들이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모였다. 고인의 친구이자 MBC 방송작가로 일했던 김성헌씨도 무대에 올랐다. 김씨는 “늘 밝고 남을 먼저 생각하던 그녀의 비보를 접했을 때 몸 속에서 썰물이 빠져나가는 듯 상실감이 덮쳤다”며 “사인을 알게 됐을 땐 그 무게가 결코 남일같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씨는 고인의 근로자성을 인정하지 않은 고용노동부의 특별근로감독 결과를 두고 “약 3년4개월의 시간 동안 요안나는 대체 어느 소속으로 시청자들에게 날씨를 전했다는 건가. 요안나는 MBC의 기상캐스터로서 살았고 그렇게 생을 마감한 것”이라며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보호받지 못하고 차별받는 시대는 끝내야 한다. 부디 퇴사라는 도피조차 선택하지 못할 정도로 본인의 일을 사랑했던 그녀의 명예를 회복해달라”고 말했다.

KBS전주총국 작가로 일하다 부당해고를 겪은 뒤 현재는 행정지원직으로 수신료 민원 업무를 맡게 된 김지원(가명)씨도 추모제를 찾았다. 7년간 방송작가로 일하다 해고된 김씨는 법적 다툼 끝에 거듭 노동자성 인정과 부당해고 판정을 받았으나, KBS는 그를 방송작가 직무로 복귀시키지 않았다. 김씨는 “오늘 이 자리에 나오면서도 방송국에서의 일과가 생계인지 생존인지 고민해본다”며 “우리는 매번 ‘근로실질을 봐달라, 업무분장표와 임금명세표를 봐달라, 프리랜서라고 하려면 프리랜서답게 근무하게 해달라’고 절절한 마음으로 외쳤다. 제도 차원의 강력한 처벌과 안전 장치가 없다면 그야말로 죽어야 끝나는 싸움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고인을 향해 “우리의 젊은 날이 방송국이라는 꿈의 탑 아래에서 부서져 내렸다. 그래도 나는 살아있다는 이유로 남은 일을 해나가겠다”며 “아직은 발버둥칠 힘이 조금은 남아있다는 이유로 멀리서라도 당신의 뜻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꿈이 좌절되지 않기를 간절하게 기도하겠다”고 전했다.

이호찬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은 “MBC 내부의 구조적 문제점을 살피는 데 힘을 기울이지 못한 점에 대해 MBC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MBC 구성원을 대표했던 사람으로서 유족분들에게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고개 숙였다. 이 위원장은 MBC 경영진을 향해 “유가족의 목소리를 더 경청하고 사안 해결에 진실한 노력을 기울일 것을 촉구한다”며 “딸을 잃은 분노와 슬픔을 이겨내기도 벅찰 유족들이 목숨을 건 농성을 벌이는 안타까운 현실을 바로잡을 책임은 MBC에 있다. 높아진 사회적 신뢰만큼 과연 MBC가 얼마나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진심을 다했는가 돌아보라”고 말했다.
시민사회에서도 추모제를 찾아 연대의 뜻을 전했다. 김수억 비정규직이제그만 공동투쟁 공동소집권자는 “어머니의 단식이 하루라도 빨리 끝날 수 있도록, 모든 유족들이 바랐던 억울한 죽음이 반복되지 않도록, 비정규직 제도를 없앨 수 있도록 함께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선우 스님은 “방송국 내 노동자들에 대한 지독한 차별을 해소하는 게 방송국의 의무이자 도리”라며 “MBC 사장은 진정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MBC가 되기 위한 길은 내부 비정규직 프리랜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임을 명심하라”고 말했다.

이날 추모제에선 정치권이 책임 있는 문제 해결에 나서겠다는 약속도 이뤄졌다. 이용우 민주당 의원은 “추석 이후 국정감사에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겠다. 고용노동부가 신속하게 방송사 비정규직 기획감독 계획을 마련해 추진할 수 있도록 촉구하고 감독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겠다”며 “더이상 고 오요안나 같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문제 해결까지 책임있게 나서겠다”고 했다. 엄정애 정의당 부대표 역시 “오요안나님의 사건은 단지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다. 노동자이지만 노동자의 권리가 배제된 수많은 불안정 노동자들의 현실”이라며 연대의 뜻을 밝혔다.
관련기사

추모제 무대에선 고인을 추모하는 서정숙 무용가(한국민족춤협회 전 이사장)의 추모춤과 ‘꽃다지’의 추모공연도 이어졌다. 추모제 말미에는 ‘누가 오요안나를 죽였나? 죽음 1년, MBC는 뭘 했나?’라고 적힌 현수막을 든 시민들이 약 30분 동안 MBC 사옥을 한 바퀴 행진했다.
추모제를 찾은 이들은 “MBC는 유족에게 공개 사과하라”, “MBC는 기상캐스터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라”, “MBC는 진상조사 결과를 공개하라”고 외치며 MBC 사옥 주변 곳곳에 현수막을 걸었다. 사옥 앞을 지키고 서 있는 MBC 직원들과 경찰들을 향해서도 구호를 외쳤다. 참여자들은 고인에게 헌화하며 2시간30분여 이어진 추모문화제를 마무리했다.


후원은 더 좋은 기사에 도움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