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트키(cheat key)란 용어가 있다. 원래 비디오 게임에서 나온 말인데 ‘게임이 잘 안 풀릴 때 특정 단어를 입력하거나 조작을 해서, 해당 단계를 클리어하거나 필요한 아이템을 획득하는 속임수 기법’을 뜻한다. 이제는 이 용어가 일상 속에서도 널리 쓰이는데 ‘곤란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묘수와 편법’의 의미로 통용된다. 게임에서 치트키를 쓰면 불리한 상황을 뒤집는 데 도움이 되지만, 남발하면 정상적인 문제해결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최근 인사청문회를 보면 이른바 ‘사회적 합의’를 앞세우는 발언들이,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고 상황을 ‘클리어’하는 치트키처럼 쓰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강선우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의 갑질 의혹과 거짓 해명 등 윤리적 흠결에 대해 비판여론이 높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그의 정책적 신념과 비전이다. 어이없게도 청문회에서는 오랫동안 개혁 의제로 제기되어 온 차별금지법과 비동의강간죄에 대한 질의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에 대한 강 후보자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는 공식자료는 청문회 출석에 앞서 제출한 서면 답변뿐인데, 차별금지법과 비동의강간죄에 대해 “충분한 논의와 국민적 합의가 선행돼야 한다”고 답했다.
김민석 국무총리 역시 지난달 17일 총리 후보 자격으로 외신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차별금지법에 대한 질문을 받고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현재까지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 그리고 저의 공통된 입장’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4월 대선 예비후보 경선과정에서 차별금지법에 대해 “더 많은 대화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발언한 바 있다.
차별금지법에 대한 논의는 역사가 길다. 1997년 김대중,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공약했고 2007년 이후 총 7번의 법안 발의가 있었다. 그사이 국민의식도 전향적으로 변화해서 국가인권위원회의 2022년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3분의 2가 넘는 67%가 차별금지법 제정에 동의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정치권은 사회적 합의 미비를 내세워, 실재했던 무수한 논의를 ‘클리어’하고 원점으로 되돌리려 한다.
정책을 설계하는 데 사회적 합의는 당연히 중요하다. 사회적 합의를 이루려면 첫째 정확한 정보 공유, 둘째 합리적이고 투명한 논의 절차, 셋째 도출된 합의안이 정책에 반영될 것이라는 신뢰가 필요하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동성애로 인류가 멸종할 것’이라든가 ‘동성혼에 반대하는 목사들이 처벌받을 것’이란 식의 허위정보와 공포마케팅을 정부가 방치하고 어정쩡한 회피전략을 취하는 한, 혐오의 평행선은 계속되고 차별과 적대에 기생하는 이권세력만 승자가 된다.

이런 점에서 아일랜드 시민의회는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좋은 사례다. 2011년 민간 주도의 파일럿 프로젝트로 시작된 시민의회는 99명의 시민과 1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된다. 전문가 발표와 시민 토론, 찬반투표를 거쳐 시민의회 권고안이 도출되면, 이 안은 의회를 거쳐 국민투표에 부쳐진다. 2012년 1기부터 2023년 6기까지, 선거제도, 생물다양성 등 장기개혁 이슈는 물론 동성혼, 낙태죄, 마약 등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들까지 국민적 합의안을 마련해 헌법 개정과 제도혁신으로 안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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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이상의 촘촘한 공론화 과정, 자유로운 의견 개진을 보장하는 비공개 소규모 토론, 온라인으로 가감 없이 공개되는 전체 회의, 수만 건에 이르는 시민 의견서와 증언 청취, 국민투표로의 연결 등 치밀한 과정 설계가 성공의 열쇠였다. 동성혼 합법화나 낙태죄 폐지 등, 전통적 가톨릭 국가에서 민감한 이슈를 법제화할 수 있었던 것도, 상반된 의견을 가진 이들이 서로 공감하고 관용할 수 있도록 합리적 토론으로 이끄는 제도적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회적 합의는 단순 다수결을 가려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의견이 달라도 서로 적대하지 않으며 최종결과에 승복하는, 품격있는 민주주의로 이어진다. 그러니,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다고 진정 믿는다면 이재명 정부는 지금부터라도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공론화 방안을 설계해서 내놓아야 한다. 그마저 없다면 ‘사회적 합의’ 담론은 개혁을 회피하는 치트키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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