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년 5월18일 KBS에서 방영된 5·18 41주기 특집다큐 ‘나는 계엄군이었다’ 유튜브 갈무리. 사진=유튜브 ‘KBS다큐’ 채널
▲ 2021년 5월18일 KBS에서 방영된 5·18 41주기 특집다큐 ‘나는 계엄군이었다’ 유튜브 갈무리. 사진=유튜브 ‘KBS다큐’ 채널

“나는 계엄군이었다.” 2021년 광주 KBS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나는 계엄군이었다’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광주에 파견된 최병문 씨의 실화가 담겨 세상의 이목을 끌었다. 그간 누구도 자신이 그 시절 계엄군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던 만큼 이례적이고 의미 있는 심층 인터뷰였다. 최 씨는 이 출연으로 무려 41년간 지킨 침묵을 깼다.

그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화순 방향으로 향하던 버스를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한 제11공수특전여단에 소속돼 있었다. 죄 없는 시민 십수 명이 영문도 모른 채 군인의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이른바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이다. 논산 훈련소에 입소해 계엄군으로 차출된 일병이었던 최 씨는 자신이 어디로 이송되는지, 어떤 임무를 맡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현장에 끌려가 참상에 발을 들이게 됐다고 돌이켰다. 그날 차마 죽일 수 없었던 한 명의 고등학생을 살려서 돌려보냈다는 비밀스러운 사실도 뒤늦게 고백한다.

오래도록 다물고 있던 입을 연 이유라면 “이 기회가 아니면 평생 말 못 하고 죽을 수도 있겠다”는 지독히도 무거운 죄책감 때문일 것이다. 무던히 일상생활을 해 나가는 것 같던 그가 미얀마 민주화운동을 실탄과 중화기로 진압하는 현지 군인의 뉴스에 크게 멈칫할 때, 보는 이는 그를 짓눌러온 어마어마한 감정의 무게를 가늠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시민에게 총칼과 군홧발을 들이댄 부대에 소속된 계엄군이었다는 건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손쉬운 합리화로는 물리칠 수 없는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영상은 어떤 방식으로든 비극적인 시대의 순간을 기록하고야 만다는 집요한 속성을 지녔다. 다큐멘터리 ‘나는 계엄군이었다’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부터 41년이라는 긴 흐른 시간이 흐른 뒤에도 기어코 최 씨라는 실제 계엄군을 화면 앞으로 데려오는데 성공했다면, 그에 앞서서도 당시를 기억하려던 이들의 분투는 여럿 있었다. 실존 인물을 등장시킬 수 없던 시대적 여건에서도 성실한 취재와 진실한 공감으로 당시를 재구성한 작품들이며, 대표적인 작업물 중 하나가 한국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1999)일 것이다.

▲ 영화 ‘박하사탕’ 스틸컷
▲ 영화 ‘박하사탕’ 스틸컷
▲ 영화 ‘박하사탕’ 스틸컷
▲ 영화 ‘박하사탕’ 스틸컷

기차가 역행하는 만큼 주인공의 시간의 기억도 뒤로 돌아간다는 판타지적 구성을 취하는 ‘박하사탕’은 결말부에 들어 1980년 5월이라는 종착역에 다다른다. 마흔 살 영호(설경구)는 대체 왜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인 인간이 되었는가. 그 시작점에는 계엄군으로 차출돼 광주로 끌려간 젊은 시절의 영호가 있었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고 아름다운 꽃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릴 줄 알던 시적인 감각의 그는 한 고등학생을 총으로 쏴 죽게 만드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게 되고, 청년이었던 그의 삶은 중년에 다다르는 과정 끝에 차츰 망가져간다.

두 작품을 모두 관람한 독자일지라도, 이제는 다큐멘터리나 극영화로만 접할 수 있는 과거의 사건인 줄로만 알았던 ‘계엄’의 존재를 2024년 대한민국에서 다시 경험할 거란 생각은 감히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12월3일의 불법적인 계엄이 안긴 충격은 그만큼 컸다. 뒤늦게 당시 차출된 계엄군 사이에서 “어디로 가는 줄 몰랐다”는 증언이 터져 나왔는데, 이건 ‘나는 계엄군이었다’가 기록하고 ‘박하사탕’이 재구성했던 오래된 과거가 현재로 고스란히 이식된 듯한 기이한 경험이다. 1980년으로부터 44년이 지나 비교적 완전한 민주화를 이뤘다고 평가받는 사회에서도, 판단력 잃은 지도자의 오판이 끔찍한 과거를 얼마든지 반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증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상황을 목격한 누군가는 훗날 잊지 않고 12·3 사태를 엄중히 기록하게 될 것이다. 1980년의 참상이 시대를 휩쓸고 지나간 한참 뒤에도 영화 ‘택시운전사’(2017)나 다큐멘터리 ‘김군’(2018)과 같은 유의미한 작품이 끊임없이 등장해 온 이치와 다르지 않다. 영상이 어떤  방식으로든 비극적인 시대의 순간을 기록한다는 집요한 속성을 지녔다는 사실은 여전히 변치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목소리 내고 행동하는 이들 모두의 가슴에 스며 있는 ‘민주화 사회를 지키려는 작은 의지’가, 그 미래 기록의 밑받침이자 주요한 증거가 될 것임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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