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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세계의 주인' 포스터. 

※ 이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을 포함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은 청소년의 성, 친족 성폭력, 피해자다움, 피해자 그룹 내 갈등 등 마냥 편안하게 느껴지지 않는 주제들을 2시간 내내 다룬다. 그 어느 담론 하나 가벼운 것이 없다. 이 글의 첫 문장을 읽고 영화를 보고 싶지 않아진 독자도 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영화는 첫 장면부터 불편함을 끼얹고 곳곳에서 조마조마함과 의문을 남긴다. 가끔 분노도 일고 오열을 터뜨릴 만한 장면도 있다. 그럼에도 영화를 본 후 가장 강하게 남은 감정을 꼽으라면 편안함이다. 무슨 모순일까. 이 불편한 주제들을 모두 건드리면서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니 말이다.

이동진 평론가는 이 영화에 대해 “함부로 명명하거나 헤집는 대신 온전히 맡기고 보듬는 연출의 넓고 깊은 품”이라는 한줄평을 남겼다. 그 말대로 영화는 온갖 불완전한 것들을 껴안는다. 피해자와 피해자성을 명명하지 않고, 피해자 가족이나 피해자들이 모인 커뮤니티의 성격 역시 규정하지 않으며, 문제의 사건을 묘사하지 않는다. 심지어 가해자를 호출할 때도 최소한으로 한다.

사건은 주인공인 ‘주인’(배우 서수빈)의 동급생 수호가 ‘아동 성범죄자 출소 반대 서명운동’을 벌이면서 격화된다. 수호가 쓴 서명 독촉 문구에는 “성폭행은 피해자의 삶을 망가뜨린다”, “성폭력은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준다”는 문장이 있다. 이 문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주인은 전교생 중 유일하게 서명을 거부한다. 수호의 끈질긴 설득 끝에 주인은 “나도 성폭행 피해자”라고 외쳤다가 농담처럼 눙치고 넘어간다. 오히려 이 눙침으로 인해 주인에게 비난 여론이 생겨나는 시발점이 된다. 

▲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갈등은 결국 주인이 수호를 때리는 것으로 폭발한다. 학폭위가 열리는 위기 직전까지 수호는 서명을 요구하며 끈질기게 군다. 주인 역시 끈질기긴 마찬가지다. 결국 주인은 자신의 성폭력 피해가 농담이 아니라고 밝히고 “내 삶은 망가지지 않았으니까, 함부로 말하지 마”라고 말한다. 동시에 수호의 서명 독촉 문서에 자신의 서명을 남긴다. 그렇게 서로 물러났다가 싸웠다가 반복한다. 누군가의 완벽한 승리도, 패배도 아니다. 어쩌면 실제로 그렇게 깨끗하게 승패로 나뉘는 사건은 없다고 말하듯이.

이 사건으로 주인의 이야기가 학교에 알려진다. 주인의 친구들조차 주인에게 왜 트라우마가 없느냐, 오히려 과도한 명랑함이 트라우마의 증거 아니냐며 2차 가해적인 생각을 나누기도 한다. 피해자의 친구라고 해서, 겉으로 피해자와 같은 편으로 보일지라도 100% 피해자의 편에서만 서는 것도 아니다. 속으로는 다른 친구들과 같이 피해자를 의심하기도 하고, 어울리기 싫어하기도 한다. ‘인싸’였던 주인은 ‘은따’처럼 변해가기도 한다.

피해자는 지속적으로 우울한 모습만을 보여야 하는가. 성격과 피해 사실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주인의 엄마(장혜진)는 세차장에서 오열하는 딸과 함께 오열하지 않는다. 담담하게 “한 바퀴 더 돌까” 묻는다. 피해자의 엄마답지 않은 것인가. 친족 성폭력 피해자 자조모임으로 보이는 모임의 미도(배우 고민시)는 법정에서 아버지의 성폭력을 진술한다. 미도는 피해 이후에 아버지에게 용돈을 요구했다는 사실로 추궁당한다. 이것은 피해자가 아님을 확정하는 증거인가. 미도는 남자친구를 데려온 주인에게 모임의 원칙을 어겼다며 과도하게 화를 낸다. 이것은 피해자들끼리의 분열인가. 그들은 갈라졌나. 다시 연대할 수 없나. 영화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이처럼 영화는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비난들, 즉 피해자가 예상과 다르고 완전하지 않다는 이유로 가해지는 비난들을 하나하나 짚어낸다. 남자친구를 자꾸 바꾸고, 키스하기를 좋아하고, ‘난 괜찮아!’를 외치는 그가 피해자일 수 있다. 태권도를 잘해서 메달까지 따고 어디서든 큰소리를 치지만 법정에서는 벌벌 떨고, 자신감 없는 모습을 보이는 미도 역시 마찬가지다. 매일 집에 꽃을 사오지만 꽃이 말라 비틀어질 때까지 돌보지 않는 사람(주인의 엄마) 역시 같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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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가해 상황을 직접 묘사하거나 암시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주인과 갈등 관계에 있는 수호를 그릴 때도 이 태도는 흔들리지 않는다. 고등학생인 수호는 어린 여동생을 돌보는 책임감 있는 인물이다. 여동생 목덜미의 꼬집힘 자국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그에게도 ‘아동 성범죄’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맥락이 있다. 그의 말이 완벽하게 정의롭지 않았고 심지어 당사자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었으나, 완벽하게 틀린 말만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서명 독촉문에는 맞는 말도 있었고 틀린 말도 있었다. 수호의 여동생 사건에서 주인이 일종의 가해자처럼 보이는 장면과, 이후 그 행동의 맥락을 설명하는 CCTV 장면에서는 정체성의 뒤섞임이 점점 심해진다. 

영화는 모든 사람과 상황이 하나의 정체성에 완벽히 들어맞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 무엇도 극단적으로 명명하지 않는 이 세계관 아래에서 유일하게 명백하게 비판받는 것으로 보이는 대상은 무책임한 사람들이다. 주인이 힘들 때 전화해도 받지 않는 아빠. 가족 모두가 힘들어하는데 산 속에서 혼자 사는 아빠. 수호가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전화를 받지 않는 수호의 아빠까지. 이들은 어쩌면 영화에서 가장 비난받는 사람들이다.

주인에게 반복적으로 오는 익명의 쪽지는 극 초반에는 주인을 향한 공격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그 쪽지는 확장된다. 한 줄 한 줄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읽히는 문장들은 사과로 시작한다. 이후 주인을 응원하고, 마침내 자신 역시 피해자라는 고백까지 나아간다. 쪽지의 주인은 교실 속 여러 얼굴들로 퍼져나간다. 결국 영화는 어떤 사건으로 인해 새로운 정체성으로 호명된 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괜찮은 척만 하지 않아도, 불완전해도 괜찮다고 말이다. 씨네21 인터뷰에서 윤가은 감독은 “‘무단횡단을 하면서도 쓰레기를 줍는 게 사람이다’라는 말을 좋아한다”고 전했다. 그 메시지가 바로 불편한 주제들 사이에서 편안함으로 가닿는 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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