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감이 교차하실 것 같은데요?”, “당연히 만감이 교차합니다. 그래도 세상에 빛을 보니 다행입니다.”

KBS에서 방영될 수 없었던 ‘친일과 훈장’을 뉴스타파가 방영하게 됐다는 사실에 대해 한 KBS 탐사보도팀 기자는 안도감을 내쉬었다. 그가 느꼈을 감정이 비단 안도감뿐일까.

정부를 상대로 3년간 소송 등을 진행해 서훈 기록 72만 건을 입수한 뒤, 방송에 내보내기 위해 KBS 간부들과 벌였던 지난한 싸움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을 테니 말이다. 

취재를 끝냈음에도 보도할 수 없었던 기자로서 느꼈던 상실감, 씁쓸함, 공영방송 구성원으로 의무를 마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만감’이라는 한 단어에 응축된 듯했다.

▲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도 대한민국 국가 서훈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뉴스타파는 그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3개의 훈장을 받는 기록을 최초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사진=뉴스타파)
뉴스타파가 4일 방영한 특별기획 ‘훈장과 권력 2부’는 KBS에서 왜 ‘친일과 훈장’이 방영되지 못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친일 인사에 훈장을 수여한 이승만과 박정희, 두 전직 대통령을 정확히 조준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아버지를 비판한다는 것은, 대통령이 사장을 임명하는 지배구조 하에서, 정권 입맛에 따라 공영방송이 휘둘리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실제로 KBS 탐사보도팀 기자들은 지난해 ‘간첩과 훈장’, ‘친일과 훈장’ 2부작 아이템을 기획하고 그해 6~7월에 방영키로 입을 모았으나 간부들의 방해 공작으로 불방 논란에 휩싸였다.

이후 팀장급 인사에서 ‘훈장’ 아이템 편성을 요구하던 안모 탐사보도팀장이 네트워크부로 인사 조치되는 등 제작진 3명이 자리를 옮기며 KBS 탐사보도팀은 홍역을 치렀다. 

가까스로 지난 2월 KBS ‘시사기획 창’은 ‘훈장’이라는 이름으로 보도했으나 2부에 해당하는 ‘친일과 훈장’은 전파를 탈 수 없었다. 

KBS의 훈장 보도에서 전두환이 집권한 시기는 ‘전두환 정권’이라고 표현하는 대신 박정희가 집권한 시기를 ‘1970년대’라고 표현한 것은 공영방송의 보도 마지노선을 드러내는 단서이기도 했다. ‘전두환은 되고, 박정희‧이승만은 안 된다’는 웃지 못할 가이드라인. 

그러나 KBS 훈장 취재진이었던 뉴스타파 최문호 기자가 ‘퇴사’와 ‘진실’을 맞바꾸면서 훈장 취재는 급물살을 탔고 시청자들은 그 덕분에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됐다.

▲ 지난 2월 KBS에서 뉴스타파로 자리를 옮긴 최문호 탐사보도 전문 기자. (사진=뉴스타파)
최 기자는 뉴스타파가 지난달 25일 공개한 프롤로그에서 “(KBS 간부들의 주장은) ‘박정희와 이승만 이야기는 할 수 없다’는 거다. 프로그램을 하지 말라는 얘기”라며 “몇 개월 동안 그분들과 이야기를 했지만, 역사적인 쟁점에 대한 토론은 단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공영방송 기자들이 일상으로 시달려야 했던 검열과 지침이 실로 그러했다.

뉴스타파에 따르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지난 68년 동안 친일파 222명이 대한민국 훈장 440건을 받았고, 각 정권별 친일파 서훈 건수를 보면 박정희 집권 기간이 206건으로 가장 많았다.

이승만 집권 시기엔 162건, 전두환 28건, 노태우 22건, 김대중 7건, 노무현 정부에서 2건 등이다. 대한민국 정부 전체 친일파 서훈의 84%는 이승만과 박정희, 두 대통령 집권기에 집중된 것이다.

이승만 집권 시기에는 친일파 서훈이 주로 일제 경찰과 군인 출신에 집중됐고 박정희 집권 시기에는 교육, 사법, 경제, 문화 등 전 분야로 확대됐다. 

아울러 친일파들에게 대한민국 훈장을 수여한 시기는 5‧16 쿠데타 직후인 1962년과 1963년에 몰려 있다.

정당성 없는 독재 정권은 친일 인사를 중용하면서 권력의 주구들을 재활용했고, 이들에게 수여된 훈장은 반민족 인사들이 충성의 대가로 부여받은 면죄부나 다름없었다. 

반면, 40여 년 동안 민주화와 노동운동에 헌신했던 전태일 열사 어머니 이소선 열사 등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운 인사들에 대한 훈장 수여는 정부에 의해 거부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포함해 김창룡·김활란·노덕술·박흥식·백선엽 등 친일파들은 훈장을 받았음에도 말이다. 대한민국 역사의 참혹한 비극이다.

▲ 이준식 근현대사기념관장(뉴스타파 인용)은 4일 뉴스타파 방송을 통해 “민족을 팔아먹은 사람들에게 훈장을 주는 사례는 흔하지 않음에도 대한민국은 한두 사람 준 게 아니라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 훈장을 줬다”고 말했다. (사진=뉴스타파)
고로 “민족을 팔아먹은 사람들에게 훈장을 주는 사례는 흔하지 않음에도 대한민국은 한두 사람 준 게 아니라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 훈장을 줬다”는 이준식 근현대사기념관장(뉴스타파 인용)의 말처럼 이번 뉴스타파 보도는 ‘대한민국 역사바로세우기’와 직결된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최승호 뉴스타파 앵커는 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222명의 친일파들이 받은 440건의 훈장들은 곧 친일파들에 의해 난도질 된 우리 모습을 보여준다”며 “정권에 부역하는 KBS의 간부들이 방송을 막을 만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이 기록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로세우는 주춧돌이 될 것”이라고 썼다.

뉴스타파 보도는 계속된다. 뉴스타파는 오는 11일 3부, 18일 마지막 편인 4부 ‘훈장, 정권의 수사학’(가제)을 내보내며 특별기획을 시리즈로 마무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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