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일 오후 밀양 영남루 맞은편 둔치 공원에서 밀양 송전탑 행정 대집행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전국 18개 도시의 시민들이 희망버스를 타고 밀양으로 왔다. 무대 위 발언이 이어지는 내내 비가 쏟아졌다. 막바지에 밴드가 연주를 시작하자 연대자들은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무대 앞으로 모여들었다. 비와 바람, 음악에 몸을 맡기며 자유롭게 춤을 췄다. 발구름에 잔디밭은 진흙탕이 됐지만, 사람들은 몸짓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 함께 살아요”라는 가사에 몇몇 사람들은 고개를 하늘로 들며 눈을 감고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았다. 이내 어깨동무하며 강강술래를 했다. 젖은 땅에서는 ‘척척’ 소리가 났다. 흙내음이 물씬 올라왔다. 비에 홀딱 젖은 내 몸에도 그 냄새가 스몄다.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빗속의 그 풍경이 맴돌았다. 자연을 온몸으로 느끼고 서로의 살갗을 맞대며 생명성을 확인하는 몸짓 아니었을까…. 한동안 차창에 기대 그 순간을 반추했다.
같은 날 아침이었다. 밀양 단장면 산골 숙소에서 아침을 맞았다. 창문을 열고 풍경을 바라보니, 푸른 강변을 따라 집이 오밀조밀 모여있었다. 그 너머로 송전탑은 평지와 산허리를 넘나들며 솟아 있었다. 회색 먹구름이 내려앉은 산등성이를 보며 오래전 송전탑이 세워지기 전 마을의 풍경과 그곳의 사람들을 상상했다.

최근 ‘송배전망발 전력 대란’이 올 가능성이 커졌다는 기사를 읽었다. 데이터센터 건설, 반도체 단지 조성, 전기차 보급 등의 영향으로 전력 수요가 폭발하는데, 지역 주민들의 민원으로 송전망 건설이 지연되고 있다는 내용이다. 기사에서 제시하는 다양한 데이터와 (전공을 밝히지 않은) 대학 교수진의 말을 빌려 쌓은 논리는 타당해 보였다. 수도권에서 지방의 전력을 충분히 빨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과 이에 따라서 대한민국이 미래 먹거리 산업을 선점할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는 전망에서는 절실함도 느껴졌다.
하지만 지역을 대하는 사고방식에는 동의할 수 없다. 지역은 국가 발전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서울처럼 사람이 사는 곳이다. 지역에도 사람이 살고, 사람이 사는 곳에는 공동체가 생긴다. 공동체에는 오랜 세월 켜켜이 쌓인 이야기가 있다. 이런 곳에 서울로 전기를 보내기 위한 거대 설비가 들어선다는데, 기꺼이 용인하는 것이 도리라고 보는 시각이 나는 되레 어색하게 느껴진다. 지역 주민들은 국가의 미래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순박한 존재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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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기자로서 발전 설비 반대 집회 현장을 종종 접한다. 집회 참석자들은 “서울에 원전을 짓고, 화력발전소를 짓고, 송전탑을 짓는다고 생각해 보라”는 식의 말을 하곤 한다. 하지만 서울 사람들은 알고 있다. 절대 그럴 일은 없으리라는 것을. 이 같은 인식때문인지 서울 보수·경제지에서는 국가 발전 등의 대의를 명분으로 ‘서울에서는 피해당할 일 없는 것’에 대해서 너무 쉽게 얘기하는 것 아닌가 싶다. 은연중에 지역을 서울의 식민지처럼 타자화하고 지역민을 생명성이 없는 존재로 추상화하는 인식이 깔린 보도를 접하면 한숨이 나온다. 지역을 타자화한다는 것은 서울과 지방을 구분 짓고 지방은 서울을 위해 언제든지 희생할 수 있는 곳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또 지역민을 추상화한다는 것은 그들이 살아숨쉬는 생물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역에도 울고 웃고 화내고 떠들고 눈물도 흘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를 망각하고 마치 사람을 수단이나 통계 지표상 숫자 정도로 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6월11일은 밀양 765㎸ 송전탑 건설 반대 농성장을 행정대집행한지 10년이 되는 날이다. 밀양 주민들의 투쟁은 인간다운 삶을 지키기 위한 호소이자 ‘지역에도, 농촌에도 사람이 산다’는 외침이었다. 밀양 송전탑이 남긴 교훈은 지역민들이 국가 발전과 세계 경쟁력 확보와 미래 먹거리 선점을 위해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희생하라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당위성을 무기 삼아 정책을 밀어붙이지 말라는 것이다. 갈등을 섬세하게 조정하는 것은 원래 어려운 일이다. 그 지난한 문제를 섬세하게 풀어가는 게 정부의 역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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