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덕근 영사 피살사건에 관한 보도를 보면서 드는 갖가지 의문들. 그 가운데 맨 앞자리에 놓이는 의문은 이런 것이다. 왜 언론은 무리한 예단 보도를 감행하는가. 북한의 보복 살인으로 단정할만한 물증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몰아가는 저의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다.
어떤 이는 뿌리깊은 반북 이데올로기의 발로라 얘기한다. 무장간첩이 출현하고 ‘천배 만배 보복’을 운위하는 북한의 위협까지 덧붙여졌으니 반북 이데올로기의 무한대 확장이 가능하지 않느냐는 지적이다. 또 어떤이는 편집증적 증상이라고 말한다. ‘광란상태의 테러집단’에 대한 피해의식이 가상을 실상으로 둔갑시키고 있다는 지적이다.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지적이지만 뭔가 허전하다. 언론의 이성 능력(아니 현실감각이라고 하는 게 더 옳을 것이다)에 대한 폄하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는 분석이란 점이 전폭적 동의를 망설이게 한다. 그래서 한 가지 덧붙여야겠다. 의도적인 계산이 깔린 예단 보도라는 점이 그것이다. 세계적인 오보의 가능성을 저당 잡히면서까지 넘겨짚기 보도를 감행하는 데는 남다른 셈법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종의 노예가 돼 버린 한국 언론, 그 변하지 않을 듯한 속성에 다양성으로 집약되는 매체환경의 변화가 첨가되면서 언론은 ‘야한’ 기사 찾기에 혈안이 돼 있었고, 그때마다 중국과 러시아로 기자들을 특파, 북한 실상 캐기에 주력해왔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그 셈법이 무엇인지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정황증거는 충분하다. 북한의 천배 만배 보복 위협이 있었고, 피살현장인 블라디보스토크는 북한인의 접근이 가장 용이한 곳이며, 최영사는 대북 정보 수집을 해온 사람이라는 점 등등. 소재는 넘쳐 흐르니 추리소설 뺨치게 써내기만 하면 되는 것. 독자들의 시선을 언론쪽으로 끌어당기기에 이처럼 좋은 호재가 어디 있겠는가.
이런 셈법이기에 튀면 튈수록, 야하면 야할수록 좋은 것 아닌가. 야한 보도를 하기 위해서는 발가벗고 덤벼들어야 하는 법. 시사만화도 예외는 아니다. 3일자 세계만평은 ‘무법자’로, 같은 날짜의 ‘왈순아지매’(중앙)는 되먹지 못한 ‘놈들’로 북한을 묘사했다. 당연한 수순. 관련 보도에서 정황증거는 충분히 제시했으니 이제 수위를 규탄으로 끌어올려야 하니까. 그런 점에서 3일자 경향만평은 오히려 미적지근할 정도이다.
민족의 비극마저 상품으로 활용하는 언론의 현란한 상술. 자본엔 국경도, 국적도 없다는 경제학의 기초이론이 새삼스레 떠오르는 대목이지만, 3인칭 관찰자의 시선으로 조소만 내보일 수 없는 것은 그 장사치들의 폭리와 폐악이 바로 나 자신의 부담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김종배/전 기자협회보 기자의 기사 잘 읽으셨나요?
후원은 더 좋은 기사에 도움이 됩니다
후원은 더 좋은 기사에 도움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