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1백년 가까운 과거의 일이다. 주시경(周時經)은 말했다. “남의 나라를 뺏고자하는 자는 먼저 그 나라의 글과 말을 없앤 뒤 제 나라의 글·말을 퍼뜨리고, 제 나라를 흥성(興盛)·보전코자하는 자는 먼저 제 나라 글·말을 닦아 백성의 지혜를 발달케 하고 단합을 굳게 할지니….”
같은 뜻이지만 11년전 프랑스대통령 미테랑이 했던 말은 현대의 우리 귀에 좀 더 쉽게 접근한다. “이 세상에 자기네 언어를 잃어버린 민족에게 귀를 기울일 사람은 없다.” 프랑스의 언어학자 끌로드 아제취의 말도 같은 뜻이다. “외래어의 침입을 막는 것은 문화적 종속으로부터 주체성을 지키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한국은 중대한 위기앞에 서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게 된다.
중앙 종합 일간지들은 그야말로 영어의 식민지가 돼가는듯한 위기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지난 1월 하반기 보름동안을 훑어 본 결과는 이렇다.
중앙일보는 딴 신문들처럼 각 면의 맨 위에 한글과 영문(英文) 표시를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외신면엔 ‘월드 뉴스’, 경제면엔 ‘비즈니스’라는 식이다. 거의 전부라고 할만큼 영문표시가 많다. 게다가 각 면의 고정기획란에 많은 영문 ‘컷’이 쓰여있다.
이들을 합쳐 보름동안 중앙일보에는 모두 47건의 영문이 등장했다. 여러면에 걸쳐있는 월드 뉴스나 스포츠, 비즈니스같은 지면표시들은 각각 1건으로 계산해서 그렇다.
한글로만 표기한 영어컷도 2개가 있고 ‘월 스트리트 저널’ 한국판의 영문간판은 위압적이라고 할만큼 크다. 기사(記事)형식의 전면광고에도 ‘스폰서드 섹션’이라는 영문표시가 돼있다.
이런 것들을 전부 계산하면 보름동안 중앙일보에는 모두 51건의 영어·영문 지면표시나 컷이 포진했다.
조선일보에는 우선 25건의 영문표시나 컷이 눈에 띄었다. 이중에서 ‘수도권’면은 그야말로 가관이다. 대문짝만한 영문으로 ‘메트로 라이프’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데다 오른쪽 머리에는 길게 기둥을 세우고 ‘메트로 라이프’라는 영문을 작은 글씨로 7개나 새겨놨다. 게다가 좌·우 양면에 영문컷으로 된 기획란이 보름동안에 11개나 등장했다.
이밖에 한글로 표기된 영어가 13개, 영문과 한글이 짝지워진 컷도 5개였다. 그래서 모두 43건의 영어·영문표시나 컷이 포진하고 있다. 앞서 지적한 7개의 ‘메트로 라이프’는 계산에 넣지않고도 그렇다. 게다가 창간기념 특집호에는 세계 4대 도시의 이름이 주먹만한 영문으로 표시돼 있었다. 이것은 기사의 제목이지만, 만약 이것도 계산한다면 47건이 될 것이다. 그러나 2월들어 ‘수도권’면의 영문컷이 눈에 띄게 수그러들고 있다.
중앙·조선에 댄다면 나머지 신문들은 영어·영문이 뚝 떨어진다.
동아일보는 17건이 눈에 띄었다. 그중에는 ‘뉴&뉴’ 같은 묘한 이름도 있다.
한국일보는 한글로 표기된 영어 8개를 포함해서 영어·영문으로 된 컷종류 등 14건이 눈에 띄었다. 한국일보에서는 남산만한 영문으로 된 ‘네오 Neo’시리즈가 사뭇 강압적이다. ‘네오 클래식’ ‘네오 포커스’ ‘네오 라이프’라는 영문 컷은 글짜가 압도적으로 크고, 그 어감이 다른 신문의 예보다 훨씬 수입 대중문화의 냄새가 강하다.
경향신문은 영문컷이나 표시가 11건이었다. 한글로 표기된 영어컷이 12개, 한글과 영문이 짝지워진 ‘매거진 X’‘부동산 Guide’의 두개까지 합치면 모두 25건이다.
지난 1월 하반기라는 제한된 기간의 예이고, 계산법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신문에 나타난 영어·영문홍수의 대체적인 윤곽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외국인에게 신문을 팔자는 뜻이 아닌 이상, 천박스럽고 몰지각한 상업주의의 산물이요, 용서받지 못할 국어파괴다.
원래 신문의 영어홍수는 김영삼대통령이 ‘국제화-경쟁력-세계화’라는 구호를 내놓은 95년이 그 1차 파동기였다. 신문들은 ‘세계화 즉 영어화’라는 국어파괴 합창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이 지난해 하반기부터 수그러드는 듯하더니 다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한 걸음 나아가 이제는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는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국내경쟁에서 낙오된 10대들이 떼지어 미국으로 ‘유람 유학’길을 떠나는 판으로 발전하고 있다.
국어파괴는 또한 세계화의 구호밑에서 나타난 파국적인 적자경제를 구조화할 것이다. 신문들은 ‘문화적 종속’의 위기앞에서 천박한 상업주의를 뉘우치고 부끄러워해야 한다.
정경희/언론인의 기사 잘 읽으셨나요?
후원은 더 좋은 기사에 도움이 됩니다
후원은 더 좋은 기사에 도움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