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사회주의의 대부 장 조레스(Jean Jaures)가 설립한 일간지 ‘위마니떼(Humanite)’가 지난 18일 100번째 생일을
맞았다.
한 세기 전 창간사를 통해 밝힌 위마니떼의 설립 목적은 제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인간성(휴머니티)의 실현을
위해서’였다. 지금까지 그 목적은 변함 없이 유효하지만,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물질적 토대인 신문의 재정 상태는 매우 안 좋은 편이다.
100주년 생일을 맞는 위마니떼의 표정이 그리 밝지만은 않은 이유이다.
참고로 위마니떼는 카톨릭신문인 ‘라크루와(십자가)’지와
함께, ‘광고수입이 적은 전국일간지’로 분류되어, 지난 95년부터 매년 100만유로(약 14억원) 가량의 국가지원을 받아왔다. 이 조치는 신문의
사상적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다.
휴머니티 실현·사회진보 향한 여정 한세기
1911년, 다양한 분파들을 통합, 단일 사회주의 정당을 탄생시킨 장 조레스에 의해, 프랑스의 모든 사회주의 운동을 대표하는 좌파 신문으로
자리잡은 위마니떼는, 1923년부터는 그 발행주체가 바뀌어 1920년에 생겨난 프랑스공산당(PCF)의 공식 기관지로 자리매김한다. 1994년부터
공식적으로는 프랑스 공산당의 ‘기관지’가 아니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념적 좌표마저 변경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위마니떼는 ‘공산주의
이념을 지지하는 신문’인 것이다.
1937년 34만7천부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며 점차적으로 그 영향력을 넓혀가던 위마니떼는 해방
이후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1946년의 발행부수는 52만9천부, 위마니떼의 영향력이 최고조에 달하던 시기이다.
그러나,
이후 공산당의 인기곡선의 부침과 궤를 같이한 위마니떼의 발행부수는 1950년 20만부, 1985년 10만부, 2000년 5만부로 직하강하더니,
현재는 발행부수 4만7천부에 불과한 소규모 영세 일간지로 전락했다. 판매부수 하락과 맞물려, 1991년에는 300만프랑의 적자를 기록해
경영상태에 적신호가 울렸고, 이후 계속되는 적자에 허덕이게 된다.
누적되는 적자 속에 생사의 갈림길에 있던 위마니떼는 2000년
마침내 특단의 조치들을 단행한다. 무려 80명의 직원을 정리해고하고, 이전의 위마니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대기업의 자본이 아쉐뜨
출판그룹(라갸르데르 그룹)을 통해 유입되기 시작했다.
현재의 지분 구성은 ‘전통적’ 주주인 공산당 당원 40%와 독자그룹 20%,
신문에 우호적인 인사들 10%, 직원 10%, 외부 투자자 20% 등의 분포를 보이고 있다.
드레퓌스 대위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던 설립자 장 조레스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위마니떼지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평화, 그리고 사회진보 등의 가치를 굳게 믿으며, 꾸준히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왔다.
1904년 창간 당시부터 식민지 건설에 대해 단호하게 비판했고, 나찌 점령 치하에서는 독립 저항신문으로서
적극적으로 기능했으며, 제국주의 욕망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펜으로 대항했다. 알제리 독립전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재정난 타개·이념적 탈색 부심
위마니떼지의 이러한 노력에 대해, 넬슨 만델라는 긴 옥살이 후에 위마니떼로 보낸 편지를 통해 “위마니떼는 언제나 우리 시대의 큰 싸움에서
적극적이었다. 위마니떼는 인간성(휴머니티)을 위한 하나의 목소리이다”라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물론 긍정적인 역할만을 담당했던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친스탈린적’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1953년 3월6일 스탈린의 죽음에 대해 ‘전 인민의 애도, 위대한 스탈린’이라는
제목으로 1면 기사를 온통 장식하고, 1954년 창간 50주년 기념행사를 멀리 모스크바까지 가서 치른 것은 그 좋은 예이다.
기존의 이념적 편향이 지나치다는 생각에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경영정상화를 위한 전략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위마니떼의 현 편집국장은
기사 전반에 걸쳐 이념적 색채를 탈색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구 소련이 무기력하게 무너진 이후, 쇠퇴하는 공산당과
위마니떼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 남는지를 주목해 보자.
성욱제/파리2대학 언론연구소 박사과정
후원은 더 좋은 기사에 도움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