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무정리 둘째 날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을 처음으로 다녀왔다며 봄꽃망울이 막 터지려는 나무들을 봤단다.

그 좋은 집 뒷동산을 놔두고 1년 넘도록 한번 다녀오지 못 하셨어요? 5년만 대통령님의 집이긴 하지만 광화문에서 올려다보는 청와대가 얼마나 부러웠는데요. 봄이 되면 아마 벚꽃으로 가득 차 정치를 그만 둘 생각까지 들게 할 걸요? 참. 작년 봄엔 보셨겠다.

=보기만 했을 뿐 즐길 수는 없었단다. 해결해야 할 나라 일이 워낙 많아서 좋은 걸 곁에 두고도 즐기지는 못했단다.

대통령께서 하신 말씀이 진심이군요? 대통령하기 힘들다던. 그 말 듣고 거의 백수인 내가 '나랑 바꿀라요?' 했었는데.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런 말 듣는 국민들 별로 안 좋아해요. 초등학생인 내 아들도 이래요. 대통령의 말이 좀 그렇다구요. 처음 들을 땐 솔직해서 좋았지만 자주 들으니까 나도 좀 그렇더라구요.

   
▲ 꽃망울을 피우려던 산수유는 꽃샘 추위에 갇혀 봄을 늦추고 있다. 우리에게 진정한 봄은 언제나 오려는가? ⓒ 오동명
그런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 외에 헌법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나도 대통령의 이런 말이 탄핵 사유는 절대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곤 있지만....

=물입니까 얼음입니까 하고 대통령이 사진을 보고 묻는다.

고드름이예요. 세상 꼴이 하도 시끄러워서인지 봄이 와야 할 3월에 영하의 추위를 하늘이 선물했잖아요. 우리 집 마당엔 산수유가 가장 빨리 봄을 알려오는데, 이번에도 노랗게 피어나려 할 즈음 탄핵반대니 찬성이니 하며 떠들썩했잖아요. 영하로 날씨마저 매서워졌고. 하루라도 더 빨리 꽃을 보려는 욕심으로 전날 줬던 물이 얼고 말았어요. 물이 얼어 고드름까지 달리더라구요. 이런 사진을 자연사진이라고 하면 맞을까요?

=꽃을 찍었으니 그렇겠다고 대답한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던가요? 이 시를 순수시로 보기도 하고 참여시라고 보는 이도 있죠? 님을 그저 사랑하는 연인쯤으로 볼 수 있지만, 그 님을 나라나 민족으로 읽을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예요. 만물이 소생하고 활개를 쳐야 할 봄이 꽁꽁 얼어붙었어요.

봄은 새 출발이자 희망이기도 한데 이것을 추위가 묶어놨으니 어떻겠어요. 출발은 무겁고 희망은 절망이 됩니다. 이런 의미를 내포해 찍었다면 이 사진은 꽃을 찍었다해서 자연사진으로만 취급할 수는 없겠지요. 감정이입, 찍는 이의 심상을 넣어 사진에 더 흥미를 가져보세요.

앞서 설명한 눈물처럼 얼음도 투명한 물체라 역광을 이용하면 좋습니다. 그리고 뒤 배경을 어둡게 해 주면 고드름이 더 잘 보이겠지요?

=사진은 지금의 내 심정이라며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 우리 국민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싶었는데 반대 세력이 이 희망을 에워싸며 사진의 얼음처럼 자기의지를 가두었단다.

어디 대통령뿐이겠어요. 이번 탄핵 소추를 의결한 국회의원들도 구국을 외치며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하던데요, 뭘. 탄핵 무효를 주장하며 광화문에 나온 시민들도 민주수호를 외치고 있구요. 대한민국 만세는 양측 어디에서고 들을 수 있답니다. 이걸 좌·우라 하며 이념의 차이라고 하나요?

극한대립상황이라고 언론에서 호들갑떨며 우려하지만, 건전한 사회는 이런 대립과 갈등 속에서 존재해야 한다고 봐요. 상대로부터의 비판을 일방적 쏠림의 견제로 보는 게 건강할 겁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우려되는 건 서로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겁니다.

이러한 인정은 무분별한 수긍이 아니고 더더욱 무조건의 긍정도 아니잖아요? 다행히 과반수를 늘 넘어왔던 수구 기득권을 지지하는 수나 비율이 줄어들고 있어 우리 사회의 미래는 밝아 보입니다. 하지만, 대통령께서도 너무 욕심 내 싹쓸일랑 하려 하지 마세요. 절대 그럴 마음 없으시다는 거 알지만.

한나라당이 저럴 수 있는 건 바로 그 숫자입니다. 의원수 다수를 믿고 이번 큰일을 벌인 거지요. 민주당, 역시 그 숫자놀이에 빠졌던거구요. 잘 아시겠지만 모자라니 끌어들여야 했거든요. 작은 수로는 안되니 이념과 태생이 전혀 다른 더 많은 수의 한나라당을 끌어들인 겁니다. 대통령께서도 잘 아시죠? 여기에 함정이 있었던 거지요.

풍족하다고 해서 언제나 좋을 수만은 없어요. 구속이 될 수도 있거든요. 이 점에서 열린우리당도 비슷하다고 봐요. 부족한 숫자를 여기저기서 채우려다가 민주당과 마찰을 빚어낸 점도 있다고 보는데요. 안 그런가요?

대통령께서도 이번 일을 국민의 수, 지지비율의 수에 의존한 나머지 사과불가로 일관한 건 아닌지요. 여론조사, 분명 중시해야하지만 참고만 해야합니다.

=다시 대통령에 복직이 된다면 얼음에 갇혀 노랑 꽃망울을 틔우지 못하고 있는 산수유사진을 대통령집무실에 걸어두고 두고두고 곱씹으며 봐야겠단다. 결코 오만하지 않겠다며.

꽃과 얼음에서도 배울 게 있죠?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에서 봄은 날씨처럼 소망스럽진 않았어요. 오히려 우울했지요. 3.1운동 때가 그랬고 4·19 이후도 그랬고 5·16 그 뒤가 그랬고 5·18 민주항쟁 뒤 또한 그랬지요. 국민의 희생이 너무 많은 봄을 우린 갖고 있어요. 한편 국민이 희망을 놓지 않고 살아왔다는 역사적 증거가 되기도 하지만요.

   
오동명 작가는 1957년 생으로 경제학을 전공했고 중앙일보 사진기자를 지냈다. 직업인이 아닌 직장인으로서 신문사에 근무할 때 3년에 한 권 꼴로 책을 내겠다는 계획을 직장을 그만 두고 변경했다. 1년에 한 권은 꼭 내겠다고. 별 다른 재주가 없어서이기도 하다. 그 약속을 아직까지는 지키고 있다.

2000년엔 <당신기자 맞아> 증보판을, 2001년엔 <신문소 습격사건>을 냈고, 2002년엔 소설<바늘구멍사진기>, 2003년엔 사진취미 책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가 시중에 나와 있다. 2004년 봄엔 여행책 <금요일인데 어디 안 가?(가제)>를 펴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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