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국민은 2010년이면 시청료 2500원만 내면 언제든 무료로 볼 수 있는 현재의 TV수상기로는 텔레비전을 볼 수 없다. 지상파 방송의 아날로그 송출이 중단되고 디지털로 전면 전환되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의 TV시청 패턴을 가히 혁명적으로 바꿀 것이다.

이처럼 시청자들의 이해가 직결된 디지털TV 전송방식에 대한 기술표준을 놓고 미국식이냐 유럽식이냐에 대해 정부와 방송사, 시청자단체간 논쟁이 뜨겁다. 정통부는 “전송방식 변경에 대한 논란은 더 이상 불필요하다”며 미국식을 고수하고 있다. 방송사와 시청자단체들은 “미국식은 수신율이 떨어지고 이동수신이 불가능한데다 국민 부담도 많아 지금이라도 정통부가 재고해야 한다”며 방식 변경을 주장하고 있다.

언론노조는 지난 3월 열흘간 독일 프랑스 영국을 방문, 유럽의 지상파TV 디지털화 추진현황을 조사했다. 유럽 3국의 지상파 디지털화는 조금씩 다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셋톱박스 저소득층 무료 제공

독일은 지상파가 국민의 기본권으로 보고 케이블과 위성의 난립에서 국민의 시청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디지털화를 추진하고 있었다. 이동수신은 현재의 기술로도 충분했다. 프랑스는 자국의 높은 아날로그 지상파TV 시청자를 보호하기 위해 더 점진적으로 디지털화를 추진해왔고 가장 먼저 디지털화 도입에 따른 홍역을 치른 영국도 착실하게 디지털화를 추진 중이었다.

이들 세 나라 정책결정자들은 지상파TV를 보는 시각에서 우리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유럽에서 지상파TV는 일부 돈 많은 부유층을 위한 방송이 아니라 최소한의 부담으로 국민에게 나은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시청자의 기본권’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따라서 DTV 전송방식을 둘러싼 우리의 논쟁은 기술자들이 주고받는 기술적·산업적 논쟁이 아니라 소비자와 국민을 중심에 둔 전파의 공공성 논쟁으로 그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조급한 디지털TV 추진 일정도 재고해야 한다. 유럽 각 국의 정책결정자들은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디지털방송 수출시장 승자는 대만이 될 것이고, 이동수신 등 각종 신규서비스가 가장 먼저 활성화 될 곳도 대만이다. 대만의 선택은 탁월했다.” 대만은 지난 98년 미국식 전송방식을 택했다가 오류를 인정하고 2001년에 유럽식으로 바꿨다. 정부가 미국방식의 문제점을 제기해온 지상파 방송사의 요구를 수용했기에 가능했다.

독일의 지상파TV 디지털화는 케이블과 위성TV의 범람으로부터 시청자를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현재 독일의 지상파 점유율은 8%로 케이블의 55%나 위성의 36%에 비해 턱없이 저조하다(표 참조).

지상파 DTV 장점은 “이동수신”

독일 베를린지역은 지난 2월 28일 소출력 공영방송 4개 외 모든 아날로그TV 방송을 중단했고 오는 8월이면 전체 아날로그TV 방송을 중단할 계획이다. 현재 디지털 셋톱박스는 케이블TV의 1년 시청료인 200유로 안팎(25만원 정도)이고 가격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베를린 방송위원회(MABB)의 한스 박사는 “케이블과 위성방송의 난립에 따른 프로그램의 질적 저하를 막고 공익성 높은 무료 지상파 디지털TV 수신 가구를 늘리려 한다”고 말했다.

MABB는 저소득층의 셋톱박스 구입부담을 줄이기 위해 월 8유로 정도(2만원 정도)의 할부제와 함께 극빈층에는 무상제공하고 있다. 지상파TV는 전기나 수도와 같이 사회간접자본이며, 개인의 경제력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취지다. 이런 노력 때문에 베를린의 디지털 셋톱박스 보급률은 지난달에 이미 베를린 전체 지상파 시청가구의 67%에 달하는 10만대가 보급됐다.

독일 디지털방송망을 운영하는 도이치텔레콤 산하 T-system에서 디지털 TV정책을 연구중인 만프레드 퀸 박사는 “지상파의 장점은 HDTV가 아니라 이동수신”이라고 단언했다. 이동수신은 케이블과 위성TV는 불가능한 지상파만의 장점이란 뜻이다. 언론노조는 지난달 베를린 현지에서 두 차례 이동수신 현장실험에 참가했다(사진). 도이치텔레콤의 자회사인 T-system과 프랑스 Dibicom사가 실시한 차량 이동수신 실험이었다. 차량 장착용 안테나는 손바닥만한 크기로 설치가 간편했다.

Dibicom사의 차량으로 독일 아우토반을 시속 145km로 달렸지만 눈으로는 화질의 손상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결국 “유럽방식은 HDTV가 안된다”던 정보통신부의 주장은 거짓이었다. 고정수신은 물론 이동중 HD수신이 가능했으며 오히려 미국식보다 우수했다.

독일 정부가 정책적으로 지상파의 디지털화를 지원하는 이유는 많은 시청자가 위성이나 케이블을 돈주고 시청하지만 시청자의 기본권인 전파수신권을 보장하기 위한 무료 지상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는 전파와 방송을 우리처럼 단순히 산업적 논리로만 해석하지 않고 사회적 공공재로써 인정하려는 정책적 철학에서 비롯됐다.

무리한 유료화 실패 딛고 약진

영국은 지난 99년 세계에서 최초로 디지털 방송을 실시했지만 3년만에 실패했다. 무리한 유료화 정책 때문이었다. 이를 교훈삼아 영국은 지난해 10월부터 ‘디지털을 모든 사람에게’라는 슬로건 하에 무료채널인 freeview를 디지털로 송출하고 있다.

영국의 지상파 디지털화는 DTG(Digital TV Group)라는 매우 독특한 조직에서 담당하고 있다. 이 그룹은 97년 BBC 주도로 방송사, 가전업계, 연구소, 정부 등 디지털 방송 관련단체가 모두 참가해 만들어져 디지털 방송의 기술표준과 정책, 기술개발 및 실험조사 등 거의 모든 부문을 담당하고 있다. 영국은 이 그룹을 통해 우리나라처럼 기술 표준화를 둘러싼 불필요한 갈등이나 투자의 중복과 낭비를 없앴다. 우리나라의 디지털TV 전송방식 결정에도 참고할 만하다.

점진적 추진…시청자 불편 최소화

프랑스는 독일과 달리 지상파TV 시청자가 65%에 달한다. 따라서 독일처럼 급격한 디지털 도입에 따른 국민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점진적 디지털화 정책을 추진중이다. 디지털 수상기가 여전히 고가인 상태에서 무리하게 디지털TV 도입에 따른 국민부담을 고려하고 있다.

프랑스는 우선 지난 2000년 8월부터 방송법 제도 정비에 들어갔다. 프랑스는 오는 2004년 하반기에 전체 인구의 50% 가량을 대상으로 15개의 무료 채널과 15∼17개의 유료 채널로 나눠 지상파TV의 디지털화로 도입할 예정이다. 무료 채널을 살리기 위한 프랑스의 노력은 실로 눈물겹다. 그동안 법으로 방송광고를 금지해왔던 특정상품 광고도 무료로 방송되는 지상파 디지털TV 중 지역방송에만 제한적으로 허용하려는 법개정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중이다.

또 디지털 전환에 따른 시청자의 불편을 없애기 위해 디지털 수신기를 가전사의 수상기 안에 의무 장착하도록 하는 방안도 고려중이다. 프랑스 국영텔레비전 피에르 콘스탄쪼(Pierre Costanzo) 기술국장은 “새 수상기가 연중 350만대씩 팔리기 때문에 디지털용 셋톱박스를 수상기에 의무 장착하도록 하면 2500만 프랑스 전 가구가 디지털로 교체하는데 7년이면 가능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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