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기자냐?’
언론계 전반이 불신과 조롱의 대상이 된 요즘, 드물지 않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이 말은 이런 얘기를 후배들에게 가장 많이 한 것으로 알려진 원로언론인의 ‘기자 회고록’ 제목이기도 하다. 26년간 기자생활을 한 뒤 언론계를 떠났다가 지난해 뉴스1 편집위원으로 재입사한 정재용 전 한국일보 기자가 최근 <니가 기자냐>라는 책을 냈다.
그는 이 책에서 사회부 기자, 시경‘캡’(서울경찰청 출입기자), 사회부장, 부국장에 이르는 경험과 후일담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기자생활을 회고했다. 정 위원이 재직할 때만 해도 한국일보는 사건기사하면 떠올리는 대표적 매체였다. 기자사관학교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다. 정 위원은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며 기자로서 새겨야할 덕목과 갖춰야할 자세에 대해 기술했다.
<니가 기자냐>라는 제목처럼 정 위원은 책 곳곳에 한국 언론의 부끄러운 치부를 고백하고 있다 . 대표적인 게 언론인 최대의 스캔들로 남아있는 1991년 보사부(보건사회부, 현 보건복지부) 촌지사건에 대한 고백이다. 당시 많은 보사부 기자들이 사건에 연루됐지만 24년여가 지난 시점에 직접 자신이 고백한 것은 이례적이다.
그는 1991년 11월 1일자 한겨레 사회면 머리기사 <보사부 기자단 거액 촌지> 사회면 톱기사를 보고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업계에 요청 8850만원, 추석 떡값·해외여행 명목’이라는 부제까지 읽고는 “패닉상태가 됐다”고 정 위원은 썼다. 당시 기사내용은 ‘기자단이 추석을 전후해 대우재단과 아산재단 두 곳에 직접 요청해 받은 1500만 원씩 3000만 원과 보사부 위생국장과 약정국장에게 협조를 요청해 제약 제과 화장품업계와 약사회 등으로 받은 5850만 원 등 모두 8850만 원을 모았다’는 것이다. 물가인상 등을 감안하면 지금 따져봐도 엄청난 거액이다. 이 사건으로 당시 2명의 기자가 파면(해임)됐으며, 언론사마다 사과와 반성의 사고(社告)를 1면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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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1991년 11월 1일자 사회면 | ||
정 위원은 “후배기자에 전화를 걸어 경위를 먼저 알아봤더니 보사부 출입 후배기자들이 간사에게 촌지문제를 따졌고, 간사가 이를 해명하기 위해 기자실 총회를 열어 설명을 했는데 이를 들은 한겨레 기자가 듣고 보도하게 됐다는 것”이라며 “필자도 공범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후배기자들에게 누누이 강조한 것이 기자가 돈을 알면 기자로서 자격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교육을 시켰던 시경캡으로서 얼굴을 들 수 없었다”며 “부산에서 상경해 사회부장에게 자초지종을 보고하고 신문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한 뒤 출근을 하지 않았다”고 썼다.
자신도 공범이었기 때문이다. 정 기자는 기자단 간사가 틈틈이 얼마씩 주는 촌지 덕분에 후배들 술도 사주고 밥도 사줄 수 있었으며, 부산 출장을 오가는 입장에서 더 유용하게 썼다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촌지장부에 내가 얼마나 받은 것으로 돼 있는지 모른다”며 “알고 싶지도 알려 하지도 않았다. 쥐구멍을 찾아 들어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고 했다.
정 기자는 1980년 한국일보에 입사해 11년 간 기자생활을 하면서 이 때를 최대 위기라고 느꼈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을 붙잡은 것은 후배기자들이었다.
“사흘째 출근을 하지 않자 시경캡으로 있을 때 사건기자를 했던 10여 명이 집으로 찾아왔다. 신문사 입사후 가장 큰 위기상황에 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둔다는 말을 한 상태이기 때문에 후배기자들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정말 신문사를 떠났을 가능성이 컸다. 성격상 그만둔다고 했는데 슬그머니 신문사로 나가는 것은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후배들이 온 날 밤 모두 대취해 좁은 집에서 포개지다시피해 함께 잤다. 이날 밤 후배기자들은 ‘캡이 신문사를 그만두면 우리도 모두 그만두겠다. 대신 우리를 모두 책임져라’고 ‘협박’을 했다. 이들은 이날 신문사에 ‘정캡(나)을 정상참작해야 한다’는 입장을 전하고 집으로 왔다. 그런 후배들 덕에 필자는 기자를 더할 수 있었다.”
정 기자는 “촌지관행이 없어지면 정론보도가 많아진다”며 “취재원이 촌지나 향응을 제공하는 이유는 뻔하다. 비정상적인 것을 눈감아 주는 등의 대가를 바란다. 부정부패나 고발기사가 적어지거나 물타기가 될 수밖에 없다”고 썼다.
당시 보사부를 비롯해 수서비리 등 각종 촌지 사건을 취재했던 안종주 새언론포럼 부회장(전 한겨레 기자)은 14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기자가 기레기로 취급받는 요즘 과거 권력과의 관계나 부끄러운 관행에 대한 용기있는 자기고백이 필요한 때”라며 “정 위원은 관행을 따랐을 뿐인데 이제와서라도 부끄러워하면서 고백한 것은 기자로서 양심이 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안 부회장은 “오히려 정말 고백과 반성이 필요한 언론인들이 고백은커녕 공직까지 맡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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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용 전 한국일보 기자(현 뉴스1 편집위원)가 쓴 '니가 기자냐?' | ||
이 책에는 정 위원이 한국일보 시절 ‘까라면 까던’ 선후배 문화, 형사를 사칭해 취재하던 문화, 과음을 생활화했던 문화 등이 소개돼 있다. 이를 두고 정 위원의 후배 기자인 황유석 한국일보 여론독자부장이 책 뒤편에 첨언을 했다. 황 부장은 까라면 까고, 형사를 사칭해 취재한 일화 등에 대해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한창 젊은기자들한테 하면 후진적이고 야만적인 시절에나 있음직한 블랙코미디라 할 것”이라며 “이런 취재 관행은 지금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썼다. 그러면서도 황 부장은 다음과 같이 자문했다.
“하지만 뭔가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자본에 굴복하고, 정권에 무력해지고, 이념을 추종하는 ‘기레기’들이라고 욕을 먹는 요즘에서는. 아마 기자로서의 사명감, 자존심 그런 것일 것이다. 잔머리 굴리지 않고, 책임 미루지 않고, 거만하거나 비굴해지지 않는 것. 비단 기자 뿐이 아니다. 나라 꼴이 정말 우습게 돌아가는 요즘에는 모든 사람이 끊임없이 자문해야 할 질문이다. ‘니가 OO냐?’”
아래는 정재용 편집위원이 밝힌 기자와 데스크의 덕목을 발췌한 것이다.
-기자란
기자는 세상의 일을 모두 알 수 없으니 취재하는 과정에서 배우면서 기사를 쓰게 된다. 취재를 잘한다는 것은 먼저 노력해야 함은 물론 취재원과 인간관계가 좋아야 한다. 버릇없는 기자를 좋아하는 취재원은 어디에도 없다. 보다 정확하게 알려고 노력을 하는 예의바른 기자를 좋아한다.
기자는 나이가 어려도 취재현장에서는 자신이 속한 언론사를 대표한다. 당당해야 한다는 말이다. 언론은 국민의 행복한 삶에 도움이 되도록 노력할 의무가 있다. 부패하거나 인권을 침해하는 권력 등과 대립각을 세우는 것도 궁극적으로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이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부정한 청탁이나 협박에 굴하지 않는 자세는 기자들이 갖춰야 할 덕목이다. 니체는 ‘글이란 피로 쓰는 것’이라고 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굽히지 않고 진실을 써야 한다는 말이다. 때문에 글을 쓰는 기자는 말보다 글이 앞서야 한다.
언론계의 한 선배는 그런 훌륭한 기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자는 거리의 학자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자들에게 발 냄새 나는 기사를 많이 쓰라고 한다. 현장의 생생한 소리가 전해져야 하고, 깊이 있는 전망과 해설이 곁들여지기 위해서는 학자다운 면모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언론은 사실보도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현명하게 판단하도록 해야 한다. 또 다양하게 수집한 여론을 분석하고 해석해 사회가 나아갈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미디어를 메시지라고 말하는 이유다.
요즘 기자들은 어렵게 살려고 하지 않는다. 환경이 못하게 한다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갈수록 악화하는 언론환경으로 기자들의 업무가 과중하다. 하루하루 지면 채우기에도 숨이 찬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어려운 취재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자가 어렵게 산다는 것은 어려운 취재를 하는 것을 말한다. 어렵게 살지 않는 기자의 기사는 연성화한다. 연성화된 기사에는 메시지가 없다.
-데스크란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리더는 자기희생이 있어야 한다. 자기희생이 없는 데스크는 부원들의 마음과 열정을 살 수 없다. 마음을 열지 않는 조직, 열정이 없는 조직은 죽은 조직이다.
기자들이 기사를 제때(마감을 맞춰) 생산하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다. 부원들을 무용지물로 만들지 않기 위해 데스크는 평소 부원들의 동기 부여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데스크가 개인적인 호불호에 따라 기사를 판단하고 취급한다든지, 지위를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거나, 공평무사한 판단력이 결여되면 부원들의 동기 유발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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