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드림’의 아이콘인 그가 이번에는 박근혜 정부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미래창조과학부를 맡게 된 것” (조선일보 2월18일자 1면)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17일 발표한 새 정부 장관 후보자들 중 단연 눈에 띄는 건 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다. 미래창조과학부가 박 당선인의 공약과 구상을 결집할 ‘핵심 부처’라는 점과, 이를 담당할 장관으로 재미동포 1.5세대가 ‘파격 발탁’됐다는 점 때문이다.
‘벤처 성공신화’ 띄우는 언론들
언론들은 먼저 김 후보자의 ‘벤처 신화’에 주목했다.
조선일보는 2면에서 <재산 7800억원 살아있는 벤처신화, 朴정부 ‘파워 장관’에>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드라마 같은 김종훈 후보자의 삶’을 비중 있게 소개했다. 대다수 신문들도 김 후보자의 ‘성공신화’에 적지 않은 지면을 할애했다.
이에 따르면, 서울에서 태어난 김 후보자는 중2때인 1975년,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메릴랜드주 흑인 빈민촌에서 자랐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편의점 심야 아르바이트 등을 하면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한 그는 ‘명문’으로 꼽히는 존스홉킨스대학교 전자공학·컴퓨터과학과에 입학했고, 메릴랜드대학교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3년 만에 따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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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민일보 2월18일자 3면 | ||
1992년에는 ‘단돈 40달러’로 벤처회사 ‘유리시스템즈’를 설립해 비동기식 전송 모드(ATM) 통신장비를 개발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를 계기로 그의 회사는 96년 경제잡지 <비즈니스위크>가 선정한 ‘올해의 최고 유망 기업’에 선정되는 등 성장 가도를 달리게 된다. 이어 김 후보자는 1998년에 회사를 세계적 통신장비 업체인 루슨트테크놀로지에 매각했다. 매각대금은 10억달러에 달했고, 당시 38세이던 그는 포브스가 선정한 ‘미국의 400대 부호’ 반열에 올랐다.
김 후보자는 2001년, 모교인 메릴랜드대 교수로 자리를 옮겼고, 2005년에는 벨연구소의 최연소 사장을 맡았다. 한 차례 사장직을 고사한 후의 일이다. 벨연구소는 1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소다.
이처럼 언론 보도를 종합할 때, 김 후보자가 ‘맨손’으로 미국에 건너가 ‘성공신화’를 써내려간 인물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오늘 인선의 핵심은 김종훈”(동아일보 1면)이라는 당선인 측 관계자의 말에도 불구하고, 김 후보자가 미래창조과학부를 이끌 ‘적임자’인지에 대한 설명은 여전히 물음표로 남는다.
‘성공신화’ 썼으니 장관도 잘할 것?…검증은 어디 갔나
동아일보는 1면에서 미래창조과학부에 대해 “과학 및 정보통신기술(ICT)과 산업의 통섭을 통해 창조경제를 만들어 ‘제2 한강의 기적’을 만들겠다는 박 당선인의 강한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고 전한 뒤, “박 당선인은 김종훈 후보자가 기초과학과 ICT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성공한 벤처 창업자이며 알카텔루슨트 벨연구소 사장을 지낸 풍부한 현장경험도 높이 산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조선일보는 2면에서 “김 후보자는 새 통신기술을 개발해 직접 창업을 했으며, 세계적인 기업연구소인 벨연구소에서 기초연구에서 실용화까지 이끌어온 경험을 갖고 있다”며 “기초연구에서 기술창업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담당하는 미래부 장관 후보로는 최적이라고 생각한다”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교육·과학분과 장순흥 위원의 설명을 전할 뿐이었다.
중앙일보도 ‘인수위 관계자’를 인용해 “미래부 장관은 기초기술 개발에서 상용화까지 두루 능통해야 하고, 정보통신 분야에 밝아야 하며 일자리 창출을 잘해야 하는데 김 후보자는 이런 조건에 딱 부합하는 인사”라고 소개했다. 모두 인수위가 강조한 ‘인선 배경’을 소개하는 데 그쳤을 뿐, 김 후보자의 직무 능력에 대한 언론의 검증은 찾기 어려운 대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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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일보 2월18일자 2면 | ||
김 후보자는 40여년 동안 한국을 떠나 있었던 인물이다. ‘공룡부처’ 미래창조과학부는 각 부처와 서로 다른 관련 업계, 학계 등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하는 막중한 과제를 안고 있다. 오랜 미국 생활로 한국의 정치 및 기업 문화 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김 후보자가 이 같은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을지 우려가 나오는 게 사실이다.
김 후보자가 ‘성공신화’를 써내려갔던 무대와 환경, 그가 이끌던 조직의 성격은 미래창조과학부의 그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 ‘아메리칸 드림’의 성공모델이 미래창조과학부 수장으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담보하는 게 아닌데도, 언론들은 막연히 김 후보자의 ‘성공 신화’를 강조하며 치켜 올리기에 바빴다. 이는 방송도 마찬가지였다.
MBC는 17일 <뉴스데스크>에서 “김종훈 알카텔루슨트 벨연구소 사장은 미국에서 벤처 성공 신화를 이룬 재미교포로 새 정부 핵심부처로 떠오른 미래창조과학부를 맡아 박근혜 당선인의 과학기술 육성의지를 실현할 전망”이라고 ‘장밋빛’ 해석을 내놨다.
SBS도 17일 <뉴스8>에서 김 후보자의 ‘성공신화’와 ‘깜짝 발탁’을 강조했을 뿐, 그의 자질에 대한 검증은 뒤로 미뤘다. 그나마 KBS가 김 후보자의 이중국적 논란을 문제 삼으며 “김 내정자가 미국 정보통신업계에서 일 해온 만큼, 한국 기업을 이해하고 대변할 수 있겠냐는 지적도 제기됐다”고 언급한 게 전부였다.
‘고국의 부름’ 받았다는 ‘신화’…쏟아지는 우려
미국에서 자수성가한 신화적 인물이 ‘고국의 부름’을 받고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에 내정됐다는 는 식의 보도 역시 언론이 만들어낸 일종의 ‘신화’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정작 당사자는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언급했을 뿐이다.
국민일보는 1면에서 <벤처신화 김종훈, ‘창조경제’ 지휘봉>이라는 제목 어깨에 <15세 美 이민→세계 최고 IT 연구소장…고국의 부름>이라는 제목을 덧붙였고, 동아일보는 1면에서 <美벤처 전설, 조국이 소환하다>라는 제목에 <‘제2의 한강 기적’ 특명 받은 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라는 부제목을 달았다.
동아일보는 또 4면에서 “박 당선인이 애국심과 대한민국의 미래를 얘기하며 설득하자 김 후보자가 어렵사리 승낙했다는 얘기가 나온다”며 “이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AIST·현 한국과학기술연구원)를 설립하면서 미국 독일 등에서 일하던 젊은 과학자들을 불러들인 모습과 오버랩되는 부분”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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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일보 2월18일자 1면 | ||
SBS도 17일 <뉴스8>에서 “고 박정희 대통령이 외국에 나가 있는 한국 과학자들을 불러 모아 과학입국의 기틀을 다진 것처럼 박 당선인은 김 내정자를 발탁해 과학 선진국으로 도약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고 전했다. 김 후보자에 대한 검증 대신 모호한 ‘의지’와 그에 대한 해석을 덧붙인 대목이다.
당장 우려가 만만치 않다. 과학계에선 김 후보자가 ‘장기적 전망’에 기대는 기초과학을 홀대할 것이라고 우려하는 분위기다. 서울신문(3면) 보도에 따르면, 과학계의 한 관계자는 “이익을 중시하고 민간연구소로서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벨연구소나 알카텔루슨트와 달리 미래부는 당장 돈이 되지 않는 과학에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부처”라며 “김 후보자가 얼마나 기초과학에 부처운영 비중을 할애할지는 지켜볼 일”이라고 지적했다.
해외에서의 성공이 국내에서의 성공을 보증하는 것도 아니다. 얼마 전 퇴임한 서남표 전 KAIST 총장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는 20세가 되기 전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서 전 총장은 미국 명문으로 꼽히는 MIT에서 기계공학과 학과장, 석좌교수 등을 역임하고 미국과학재단(NSF)의 공학 담당 부총재 등을 맡았던 ‘성공한 학자’였다. 그가 KAIST에 부임할 때만 해도, 여러 장밋빛 기대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가 ‘KAITS를 한국의 MIT로 만들겠다’며 도입한 개혁 조치들은 그가 총장으로 재직하던 6년 내내 크고 작은 충돌과 갈등을 빚었다. 전면 영어강의 도입, ‘징벌적 등록금제’ 등 일련의 정책들은 역설적으로 교육에 대한 ‘철학의 빈곤’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2011년에는 학생들의 잇따른 자살 사태가 불거지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과학계의 한 국립대 교수는 18일 통화에서 “성장 과정이나 업적, 성공을 이끌었던 경험이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기대한다”면서도 “미국의 제도나 시스템, 문화, 가치관과 우리나라의 차이점에서 오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또 “우리나라 ICT 기술이 세계 최고를 달리고 있는데, 그 부분은 (산업적 차원에서) 보호를 해야 할 측면이 있다”며 ‘이중국적’ 보유자인 김 후보자가 한국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조심스레 우려를 나타냈다. “그런 가능성을 염려하는 건 당연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또한 미래창조과학부가 각종 인·허가권과 법령제정권을 가지고 방송정책 전반을 관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김 후보자가 이와 관련해 어떤 역량을 가지고 있는지도 전혀 검증되지 않았다. 여전히 물음표가 많이 남아 있는 셈이다.
추혜선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처장은 18일 통화에서 “방송과 통신, 과학도 마찬가지로 공공의 영역들이 많이 걸려있다”며 “벤처 신화의 부분들과 행정부처의 수장의 (능력) 부분은 다른 검증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김 후보자가 걸어온 길이나 지향하는 지점을 보면, 방송의 독립성과 시장의 공정성에 부적절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된다”며 이 같이 말했다.
김 후보자의 개인적 역량 및 ‘성공 신화’와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로서의 자질은 별개의 문제다. ‘핵심부처’가 흔들리면, 국정이 표류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종합적 능력이 요구되고, 무거운 책임이 뒤따르는 자리라는 이야기다. 언론의 검증도 그에 맞게 이뤄져야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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