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조사는 과학일까. 일반인에 생소한 오차범위와 표본오차에 소수점 첫째 자리까지 발표되는 여론조사는 과학을 넘어 ‘민심의 현주소’로 인식될 수도 있다. 정치권이 여론조사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여론조사는 과신하고 이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줄 때도 있다. 2010 지방선거가 그런 경우이다. 유권자가 ‘여론조사의 덫’에 빠지지 않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편집자
▷숨은표 본질은 언론자유 위축= 6·2지방선거는 여론조사를 보기 좋게 비켜갔다. 비판의 화살은 언론사와 여론조사 기관으로 되돌아 왔다. ‘숨은 민심’ 논란이 제기되면서 ‘못 믿을 여론조사’, ‘여론조사 무용론’이 제기됐다. 언론이 정작 바닥 민심을 몰랐을까.
선거 여론조사와 관련한 논란은 꾸준히 제기돼 왔지만, 이번처럼 뜨거웠던 적은 없었다. 여론조사 전문가들 입에서조차 “예상하지 못했다”는 고백이 나왔을 정도다. 유권자의 숨은 민심이 여론조사로 드러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표현의 자유가 제약된 현 언론 상황을 문제로 지적하는 목소리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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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2일 민주당 지지자들 천여 명은 초저녁부터 서울광장에 모여 개표상황을 지켜보며 선거결과를 즐겼다. 개표 초반에는 한명숙 후보의 승리를 예측했지만 3일 새벽 0.6%차이로 오세훈 후보가 당선됐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 ||
▷여론조사 오류인가, 막판 표심 변화인가=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정치적 의사표현 때문에 연예인 등이 불이익을 받는 사례가 생겨났다. 이 때문에 야당을 지지하는 유권자가 자신의 의사를 밝히지 않는 경향이 생기면서 야당 지지율이 실제보다 적게 나타난다는 설명이다. 자신의 의사와 달리 여당 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히는 경우도 있다. ‘여당 지지율 거품론’은 이 때문에 나왔다. 침묵을 강요하는 사회가 여론조사 결과를 왜곡하고 있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여론조사가 실제 민심을 반영하지 못한 것과 관련해 여론조사기관은 선거전 일주일 동안 급변한 여론을 탓했다. 이철희 부소장은 “이번 선거처럼 여론조사 결과 공표 금지기간에 엄청난 일들이 계속 쏟아질 경우 조사 결과가 맞지 않을 수 있다”며 “민심을 억누르던 천안함 사건이 경제 충격으로 이어지고 주가에도 영향을 주면서 이것이 표로 표출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선거를 앞두고 정부·여당이 ‘북풍’ 장사를 했다는 지적은 피할 수 없지만 선거를 앞둔 일주일 동안 ‘한나라당’ 지지자가 ‘민주당’ 지지자로 바뀐 경우가 얼마나 될까.
▷한국 여론조사 구조적 모순=한국 여론조사와 여론조사 보도에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한국 선거여론조사는 나이, 성별, 지역을 기준으로 표본을 나누는 ‘할당표집’ 방법을 주로 이용한다.
이 방법은 인구 구성비로 대상을 강제 할당해 조사를 실시한다. 하지만 이 경우 집에 있는 사람 중 응답자가 결정되기 때문에 편향이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평일 낮에 직장인이 집에서 전화를 받을 확률은 상당히 낮다. 세대와 나이, 직업이 고르게 반영되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다. 반대로 얘기하면 평일 낮에 집에 있을 가능성이 높은 특정집단(주부, 무직자, 노인)이 과다 표집 될 개연성이 높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시간대를 고려하거나 재접촉을 시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 여론조사는 조사 하루나 이틀 정도에 끝나는 경우가 많다.
▷저렴한 여론조사, 질적 기대는 무리=한국에서 여론조사가 이렇게 ‘번갯불 콩 구워 먹듯’ 이뤄지는 이유는 금액과 시간이다. 언론은 발빠른 여론조사 결과를 희망하지만, 짧은 조사기간에 충실한 결과를 얻기는 쉽지 않다. 또 깊이 있는 여론조사를 진행하기 위한 최소한의 비용도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검증 안 된 여론조사가 ‘과학’으로 포장된 채 언론에 보도될 가능성이 크다.
전화 여론조사는 한국통신과 하나로통신 인명 전화번호부를 표집 틀로 삼는데, 전화번호부 등재율이 60%이하(2007년 기준 57.2%)라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근래에는 집 전화를 아예 사용하지 않거나 인터넷 전화를 쓰는 가구도 많다.
집 전화가 없는 20대 가구나 맞벌이 가구는 조사 대상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될 가능성이 있다. 한 여론조사 관계자는 “하루만에 조사해야 하는 경우 20대 여성 등의 특정집단은 표본을 채우기도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문제는 집 전화 비율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여론조사 기관이 집 전화 기준의 조사방법을 유지할 경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많은 유권자는 선거 여론조사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될 가능성이 있다.
▷여론조사 무응답률의 비밀= 무응답률도 편향 논란을 부르는 중요 변수이다. 일반적으로 선거 전 전화 여론조사의 응답률은 15% 내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응답률을 무시하려면 응답자 지지도 분포가 무응답자의 것과 같다는 가정이 전제돼야 한다. 하지만 한국 정치의 특수한 현실을 고려할 때 무응답층 중에서는 정치적 이유로(의사표현에 따른 불이익 우려) 응답을 숨기는 이들이 포함돼 있을 가능성이 크다.
무응답률은 여론조사 신뢰도를 가르는 중요 변수이지만, 언론들은 응답률 공표에 적극적이지 않은 게 현실이다. ARS 여론조사를 빙자한 선거운동인 이른바 ‘푸시폴(Push Poll)’의 난립으로 여론조사 피로감이 높아진 점도 응답률 저하에 기여했다는 지적도 있다.
여기에 여론조사로는 잡아낼 수 없는 ‘숨은 표’가 더해진다. 학계에서는 침묵의 나선이론(주류의 의견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지고 있을 경우 소수 사람이 침묵하려는 경향-무응답으로 이어짐)에 주목한다. 투표는 하지 않으면서 여론조사에는 응답하는 경우도 있다.
▷언론, 여론조사 개선책 고민해야= 이번 지방선거는 선거 여론조사 보도에 대한 근본적인 개선이 필요하다는 공통의 과제를 남겼다. 언론사와 여론조사 기관이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논의할 때 공론의 장도 만들어진다. 외국의 사례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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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조사는 한국 정치만의 고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의 여론조사협의회는 여론조사를 보도할 때 기자의 입장에서 점검해야 할 체크리스트로 20가지를 제공하고 있다. 누가 조사비용을 지불했으며 조사 목적은 무엇인지는 의문의 기본이다. 응답률은 충분히 높은지, 모집단 대표성은 믿을만한 것인지, 조사결과를 왜곡시키는 다른 요인은 없는지 등의 의문을 거친 뒤 보도할만한 가치가 있는지 판단해야 한다는 조언이 담겼다.
정치평론가 고성국 박사는 “현재의 여론조사 방식은 민심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할 뿐더러, 그렇게 부정확하게 나온 결과는 여론을 왜곡하는 데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전문조사기관도 여론조사 방식의 한계가 명백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서 공론화를 통한 개선책 마련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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