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말 온갖 탈법과 금품시비로 얼룩진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에 따라 19년 만에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처분장(방폐장)이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일대에 들어서게 됐으나 주민간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과 경주시가 어려운 결정을 서로 떠넘겼기 때문이다.

전북 부안과 군산, 경북 영덕과 포항, 그리고 경주에 이르기까지 부지 선정 전에는 온갖 선물을 약속하던 중앙정부는 적극적으로 중재하지 않았다. 이웃마을 주민들끼리 반목하는 모습을 전국 입지 후보지 여러 곳에서 관망했던 중앙정부는 경주에서도 팔짱을 끼고 있었던 것이다.

부지선정 끝났다, 약속도 잊는다?

한수원 본사 이전을 놓고 경주 시내-동경주 주민사이 갈등을 가리키는 이른바 '한수원 사태'와 관련해 매일신문의 지적은 주목할 만하다.

   
  ▲ 매일신문 12월27일자 3면.  
 
매일신문은 지난 27일자 기사 <어물쩡한 당국, 조정기회 놓쳤다/시-한수원 '눈치보기' 주민간 갈등 부채질>에서 "한국수력원자력(주) 본사 이전지 선정을 둘러싼 첨예한 대립과 갈등은 우리 사회 갈등조정 기능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며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장(방폐장)이 주민 투표로 경주에 유치됐을 때 국민들은 19년 동안 표류해온 국책사업이 이제 해결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갈등의 시작이었다"고 보도했다.

   
  ▲ 매일신문 12월29일자 3면.  
 
매일신문은 이어 "주민 간 대립과 갈등은 이미 예고됐던 것이다. 하지만 한수원이나 경주시는 물론 경주시의회와 중앙정부도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서로에게 결정권을 미루고 '시간이 가면 어떻게 해결되겠지' 하는 식의 안일한 대처가 결국은 화를 키워 온 셈"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와중에 경주시내 쪽에서는 방폐장 입지 예정지인 동경주 쪽의 낮은 투표율을 문제삼았고, 반면 동경주 주민들은 "한수원 본사 필요 없다. 방폐장도 가져가라"며 하지 않아도 될 싸움에 휘말렸다. 결국 한수원은 29일 그나마 시내에서 가까운 양북면 장항리로 본사이전을 결정했으나, 경주도심위기대책위는 시장과 국회의원 등의 퇴진운동을 펼치겠다고 밝혀 논란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군산·영덕·포항, 그리고 부안은

방폐장 문제는 비단 경주뿐만의 일이 아니다. 매일신문은 29일자 기사 <탈락지역 지원 약속도 지켜라/정부 "유치신청만 해도 혜택" 방폐장 투표 때 약속 '공수표'>에서 "정부가 주민투표 도입 당시 쓸개라도 빼줄 듯 해놓고 막상 사업 지원을 건의하자 딴소리를 하며 모른 척한다. 이는 정부가 주민들을 속인 것"이라는 포항시·영덕군 관계자들의 말을 전했다.

윤점락 영덕군 지역경제과장은 매일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방폐장 유치를 둘러싸고 갈라진 민심의 후유증이 아직도 심각한데 정부는 당초 약속한 최소한의 지원사업도 않고 있다. 영덕은 방폐장으로 얻은 것은 없고 잃은 것 투성이"라고 성토했다. 이런 지적은 이미 3년 전 전북 부안에서 나온 그 것과 똑같다.

매일신문이 "실제로 영덕에서는 아직도 방폐장 후유증으로 찬반 단체가 공방전을 벌이는데다 관련 투서 등으로 경찰의 수사가 계속되고 있는 등 1년 넘게 지역이 갈라져 아픔을 겪고 있다"고 보도했듯, 전북 부안과 군산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노무현 대통령도 지난 2월21일 전북방문에서 '주민들이 싫다고 해서 투표를 통해 방폐장을 유치하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어떻게 배려를 할 수 있느냐'며 방폐장 후속대책에 난색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전북일보 4월13일자 1면 머리기사 <방폐장 후속책 물 건너가나>)

   
  ▲ 전북일보 4월13일자 1면.  
 
2003년 7월 산자부장관이 부안에 찾아와 현금지원 등 간에 쓸개까지 빼줄 것처럼 하다가 경주로 결정되니, 이제는 모른 체 한다는 것이다. 지난 2003∼2005년 전북 부안과 군산은 방폐장 유치시도에 따른 찬-반 논란으로 극심한 주민갈등을 빚어왔지만 그 후속대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면서도 방폐장 입지 선정 논공행상은 중앙정부 인사들에만 치우쳤다.

그러나 지난해 11월2일 방폐장 주민투표 결과 경북 경주시가 후보지로 결정되자 한 신문이 이튿날 1면 머리기사 <방폐장 군산 유치 좌절/허탈…분노…증오…심리적 공황까지>(전북중앙신문)로 "경주에 무릎을 꿇은 2일 밤 군산의 분위기는 허탈, 그리고 분노와 증오, 심지어 반대편에 대한 적개심까지 뒤섞여 한마디로 '충격' 그 자체였다"고 묘사할 정도로 현지 주민들의 표정은 심각했다.

   
  ▲ 전북중앙신문 2005년 11월3일자 1면.  
 
지난 2004년 2월 전북 부안 방폐장 찬반 주민투표관리위원회 사무처장을 맡았던 하승수 변호사는 "지역공동체는 갈등이 생기면 한 세대를 간다고 한다. 정부가 이제 와서 사과하고 치유책을 내놓는다고 해도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지금이라도 (방폐장 입지 선정 과정 중 발생한 문제에 대해) 반성하고 사과하는 게 필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런 지적에도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27일 참여정부 4년 정책과 관련해 "부동산말고는 꿀릴 것 없다"고 말했다.

학습효과, 향후 국책사업에 영향

이런 자신감의 발로였을까, 올해 초 산업자원부는 하나의 '학습효과'를 자랑스레 내세웠다.

"방폐장 부지선정 과정을 통해 습득된 학습효과가 국민여론에 반영된 결과다. 정부의 투명한 부지선정 절차관리로 원자력 정책에 대한 국민의 신뢰성이 높아졌고, 설명회·토론회·주민투표 등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에 국민들이 직접 참여함으로써 원자력에 대한 이해도가 향상되었다." (1월4일 산업자원부 '방폐장 부지 선정 계기 원자력 수용성 대폭 개선' 보도자료)

그러나 '방폐장 부지선정 과정을 통해 습득된 학습효과'란 결국 중앙정부가 하는 국책사업 약속은 믿을 수 없다는 것뿐이라는 게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부안부터 시작해 부지선정에서 탈락한 포항·영덕·군산은 물론 '약속된 땅' 경주에서마저도 중앙정부와 한수원, 그리고 지자체가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서로 어려운 결정을 떠넘겨 민-민 갈등을 방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 지난 2005년 11월1일 경북 경주시에서 방폐장 반대단체가 주민투표의 불법성을 지적하며 내걸은 현수막. ⓒ이창길 기자 photoeye@mediatoday.co.kr  
 
앞으로 다가올 더 큰 문제는 고준위(사용후 핵연료) 방폐장 입지선정이다. 한겨레 조홍섭 편집국 부국장은 지난해 11월10일자 칼럼 <다음 정부에 넘긴 진짜 핵폐기물>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중·저준위와 고준위 폐기물을 분리한다는 원칙 때문에 법적으로 경주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고준위 방폐장이 들어설 수 없는 곳이 됐다. 이제 정작 중요한 고준위 방폐장은 중·저준위 처분장보다 덜 안전하고 주민 수용성이 떨어지는 곳에 들어가야 할 판…우리 정부는 필요한 법과 조직 마련은커녕 사용후 연료를 폐기물로 처분할지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2016년이면 사용 후 핵연료 임시저장고가 포화된다'는 말을 되뇌이고 있다. 결국 다음 정부의 일이 되겠지만, 졸속이 불 보듯 뻔하다. 이런 방식으로 고준위 방폐장을 얻을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양치기 소년'으로 전락한 중앙정부가 이제 어떤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으로 국책사업을 추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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