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12월4일 최초의 한글신문이자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이 창간 약 4년 만에 폐간됐다. 

독립신문은 1896년 4월7일 독립협회 전신인 독립문 건립 추진위원회에서 창간한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이자 순한글 신문이다. 독립신문의 창간일인 4월7일을 1957년부터 신문의 날로 정했다. 한글 표기 시 기존에 없었던 띄어쓰기를 정착시킨 신문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주 3회(격일간지) 300부를 발행했다가 1898년 7월1일 일간지로 바꿨다. 1989년 11월 독립협회 회원이 4000명이 넘었을 무렵, 3000부까지 발행했다. 당시 독립신문을 읽거나 낭독을 듣는 사람이 발행부수에 수십~수백배에 달한다는 얘기도 있다. 

처음에는 가로 22cm, 세로 33cm의 국배판 정도 크기로 4면으로 발행했다. 1면 머리에는 ‘논설’을 싣고, 이어서 ‘관보’, ‘외국통신’, ‘잡보’의 순으로 1면에서 2면으로 가면서 기사를 배치한 뒤 3면에 광고를 실었다. 광고는 영문과 한글 2종류였다. 4면은 영문판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로 편집했다. 이듬해인 1897년 1월부터는 한글판과 영문판을 분리하여 두 개의 신문으로 발행했다.

▲ 1899년 12월4일 독립신문 마지막호
▲ 1899년 12월4일 독립신문 마지막호

독립신문은 계몽신문이 필요하다고 인식한 서재필과 유길준 등 개화파 내각의 합작으로 탄생한 신문이다. 이에 처음에는 정부에 협조적 논조였다. 그러다 국내에서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개혁파는 친러세력에게 탄압을 받기 시작했고 1897년 12월 서재필이 추방되면서 폐간 위험에 직면했다. 정부 비판으로 논조도 바뀌었다. 

1898년 독립협회 회장인 윤치호가 주필이 됐지만 독립협회가 해산됐고 1899년에는 주필이 아펜젤러로 변하면서 정부 비판 논조도 잦아들었다. 1899년 6월1일 영국 선교사 엠벌리를 사장 겸 주필로 임명하고 아펜젤러가 동업자로 후퇴하면서 국문판 논조에 힘이 빠지고 영문판도 오자 투성이로 2주 만에 중단됐다. 정부는 독립신문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1899년 7월18일 독립신문 사옥 반환을 요구했는데 당시 신문사가 적자 운영 상태였기에 사실상 폐간에 이르는 타격이었다. 

1899년 11월27일 대한제국 외부 대신이 신문사 사옥 반환을 재촉했고 미국 공사 알렌이 정부와 서재필 사이에서 독립신문사 매수 중개를 알선했다. 결국 12월4일 신문사를 4000원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정부에 양도하기로 하고 독립신문은 1899년 12월4일 제4권 제278호로 종간호를 냈다. 정부는 독립신문 매수 당시엔 아일랜드 사람을 주필로 임명해 속간하겠다고 했지만 매수한 뒤에는 독립신문을 폐간했다. 

한편 1797년 12월4일,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재규가 직속 부하인 박선호, 박홍주 등과 함께 대통령 박정희 암살사건(10·26)에 대한 계엄보통군법회의 첫 공개 재판을 받았다. 김재규는 이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참고 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일보, 오늘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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