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과 지상공격으로 한 달 새 1만 명 넘게 숨진 가운데 미국 언론인들이 서구 미디어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보도를 규탄하는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

전·현 미국 언론인 900여명(10일 기준)은 공개 서한을 내고 “우리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언론인 살해를 규탄하며 서방 언론보도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잔학 행위를 진실하게 보도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이 성명은 600명이 연명해 9일 처음 발행됐고, 10일 현재 기준 연명자가 900명으로 늘어났으며 서명이 이어지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와 로이터, 가디언, LA타임스, 인디펜던트, MSNBC 등 서구 주류 언론사의 기자들도 이름을 올렸다. 공개 서한 페이지는 한 AP 기자가 서명했다가 회사 요구로 서명을 철회했다고 밝혔다.

▲ 미국 언론인들의 공개 서한 '우리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언론인 살해를 규탄하며 서방 언론보도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잔학행위를 진실하게 보도할 것을 촉구한다' 페이지 갈무리.
▲ 미국 언론인들의 공개 서한 '우리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언론인 살해를 규탄하며 서방 언론보도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잔학행위를 진실하게 보도할 것을 촉구한다' 페이지 갈무리.

언론인들은 공개 서한에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에 대한 파괴적 폭격과 언론 봉쇄는 전례 없는 방식으로 뉴스 수집을 위협한다”며 “이스라엘이 가자의 언론인들에 대한 폭력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고, 서구 언론사 뉴스룸 책임자들이 이스라엘의 반복적 잔학 행위를 명확하게 보도할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우리는 팔레스타인 인종청소를 정당화하는 데에 일조한 비인간화하는 수사(레토릭, rhetoric)에 대해 서방 언론 책임을 묻는다. 이중 잣대와 부정확성, 오류들은 미국 보도에 넘쳐나며 이들은 이미 잘 기록돼 있다”고 했다.

▲10월13일 타임지 1면. 이스라엘 정부가 하마스에 살해당한 아기들의 절단된 시체 사진을 제시했다고 밝히는 제목 아래, 이스라엘 공습 피해를 입은 팔레스타인 어린이들 사진을 보도했다.
▲10월13일 타임지 1면. 이스라엘 정부가 하마스에 살해당한 아기들의 절단된 시체 사진을 제시했다고 밝히는 제목 아래, 이스라엘 공습 피해를 입은 팔레스타인 어린이들 사진을 보도했다.

기자들은 “언론사(뉴스룸)들은 팔레스타인들과 아랍, 무슬림의 관점을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폄훼하고, 이슬람 혐오와 인종차별 비유를 강화하는 선동적 표현을 써왔다”며 “이스라엘 당국자들이 퍼뜨린 잘못된 정보를 보도하고, 미국 정부가 지원한 가자 민간인 무차별 살해를 면밀히 탐사하는 데에도 실패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권력에 책임을 지우는 것은 우리의 일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집단학살의 부역자가 될 위험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우리는 언론인들이 두려움이나 편향적 호의(favor) 없이 완전한 진실을 말하기를 다시 한 번 촉구한다. ‘아파르트헤이트’와 ‘인종청소’, ‘집단학살’을 비롯해 국제 인권기구들이 정의한 정확한 용어를 사용할 것을 촉구한다”고 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탄압과 전쟁 범죄를 숨기기 위해 언어를 왜곡해 쓰는 것은 저널리즘적 과실이자 도덕적 해이임을 인식할 것을 촉구한다”고도 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공습했던 지난 2021년에도 이스라엘 점령과 잔학 행위에 대한 공정 보도를 요구하는 공개 서한을 발표한 바 있다.

한편,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8일 오피니언 면에 하마스가 자신의 몸에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을 묶어 민간인을 인간 방패로 쓴다고 시사하는 만평을 올렸다가 팔레스타인인을 비인간화한다는 비판이 쏟아지자 웹사이트에서 이를 내렸다.

▲한편 워싱턴포스트는 하마스가 자신의 몸에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을 묶고 민간인을 방패로 쓴다고 시사하는 만평을 올렸다가 팔레스타인인을 비인간화한다는 비판이 쏟아지자 웹사이트에서 이를 내렸다.
▲한편 워싱턴포스트는 하마스가 자신의 몸에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을 묶고 민간인을 방패로 쓴다고 시사하는 만평을 올렸다가 팔레스타인인을 비인간화한다는 비판이 쏟아지자 웹사이트에서 이를 내렸다.

카타르 도하에 있는 하마드 빈 칼리파 대학의 마크 오웬 존스 중동학 부교수는 12일 알자지라와 인터뷰에서 “영국에서 가장 많이 유통되는 지면 중 하나인 데일리메일은 첫 면에 이스라엘 전쟁을 보도하며 가자에서 숨진 팔레스타인인 수치를 언급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이스라엘 피해자 수치는 대여섯 번 명시했다”며 “이는 팔레스타인인의 고통을 삭제하고, 이스라엘인 고통만이 1면에 언급할 가치 있는 고통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오웬 존스 부교수는 “1면과 헤드라인은 언론사가 독자에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알리고자 하는지, 그 내부 편집 과정을 반영한다”고 밝힌 뒤 “심지어 가디언처럼 영국에서 질 높은 보도를 하는 언론도 하마스가 한 행위를 ‘잔혹하다’, ‘학살’ 등 단어로 소개하는 반면 1만 명을 죽인 이스라엘의 가자 폭격에 ‘잔혹’이란 단어를 절대 쓰지 않는다. ‘정밀 타격’, ‘부수적 피해’ 같은 단어들”이라고 했다.

팔레스타인 언론인 아흐메드 알나우크 기자는 같은 인터뷰에서 “나는 단 하나의 폭탄에 가족 21명을 잃었다. 방송 진행자는 인터뷰에서 나를 소개하며 ‘아흐메드는 가족 21명을 잃었다’라고 했다. ‘이스라엘이 그의 가족 21명을 죽였다’고 하지 않았다”며 “언론은 이스라엘인에 대해선 ‘잔혹하게 살해됐다, 테러리스트가 죽였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팔레스타인들은 단지 가족을 ‘잃을’ 뿐이고, 팔레스타인인은 항상 죽는 존재”라고 말했다.

UN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에 따르면 2008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점령과 공습 이래 올해 9월 중순까지 이스라엘군에 의한 팔레스타인인 사망자는 6407명, 이스라엘인 사망자는 308명이다. 지난 10월7일 하마스의 기습 공격 이후 이스라엘에 의한 팔레스타인 민간인 사망자는 1만1000여명이다. 하마스 공격으로 인한 이스라엘 사망자는 군인을 포함해 1200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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