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 칼부림’ 사건이 줄지어 발생한다. 일종의 모방범죄로 보인다. 대낮 길거리조차 다니기 두려워진다.

대한민국은 치안이 꽤 좋은 나라다. 범죄 검거율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높은 범죄 검거율이 무용지물이다.

이들은 검거 이후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어떤 이는 자신과 헤어진 여자친구 동네에서 묻지마 칼부림을 예고했다고 한다.

이들의 묻지마 칼부림이 성공했을 때는 언제일까? 불특정 다수에 상해를 입혔을 때가 아니다. 이별 이후 자신이 폐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 여자친구가 알아챌 만큼 사회적 이슈가 될 때다. 그래서 언론은 칼부림의 목적과 이유를 보도해서는 안 된다.

사회를 향한 증오 발언을 쏟아내고 싶은 범죄자의 범죄 목적을 달성시켜 주면 안 된다. 모방범죄 등 부작용이 우려되는 사안에는 언론의 보도가 제한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2024년도 예산안이 발표되었다. 정부는 건전재정을 통해 ‘재정 정상화’를 이뤘다고 홍보한다. 정부는 건전재정의 증거로 23조 원의 규모에 달하는 ’지출 구조조정’을 강조한다. 2년 연속 23조 원 내외의 구조조정을 단행했기 때문에 건전재정을 이루었다고 홍보한다.

그러나 정부가 자랑하는 23조 원의 구조조정 사업 리스트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검증 가능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이다. 정부가 23조 원의 구조조정의 리스트를 발표하지 않기 때문이다.

▲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8월24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2024년 예산안 및 2023~2027년 국가재정운용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기획재정부 홈페이지
▲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8월24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2024년 예산안 및 2023~2027년 국가재정운용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기획재정부 홈페이지

많은 언론들은 지출구조조정 사업 리스트를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는 지출구조조정 리스트를 발표하면 사회적 혼란이 발생한다며 리스트를 공개하지 않는다. 정부는 지출구조조정 사업 리스트를 발표하면, 이해관계자가 반발해서 불필요한 사회적 혼란이 커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정부의 잘못된 주장이다. 정부는 지출구조조정 사업 리스트를 언론에 제공해야 한다.

언론의 보도 자유는 신성불가침의 권리는 아니다.  ‘묻지마 칼부림’의 목적처럼 보도하지 말아야 할 부분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정부의 23조 원의 지출구조조정 리스트는 보도할 수 있도록 정부가 자료를 제공해야만 한다.

물론, 지출구조조정 리스트를 발표하면 이해관계자의 반발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산은 정치다. 정치란 자원의 권위적 배분이라고 한다.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대화와 타협, 그리고 투쟁을 통해 예산 금액을 늘리거나 줄이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이해관계자가 대화와 타협을 하려는 전제조건이 투명한 정보공개를 통한 현실파악이다. 내가 지지하는 사업의 예산이 증액되었는지, 또는 감액되었는지 조차 모르면 사회적 대화와 타협이 불가능하다. 예산 금액을 이해관계자의 타협과 투쟁 없이 정부가 정해주는 대로 믿고 따르라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을 벗어나는 행위다.

정책은 믿음의 영역이 아니라 검증의 영역이다. 23조 원의 지출구조조정 자체로는 무조건 적인 찬성도 불가하고 반대도 불가하다. 어떤 사업을 줄였는지에 따라 다양한 의견과 찬반이 가능하다. 즉, 지출구조조정 자체가 선은 아니다.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다양한 정치적 철학에 따라 지출구조조정이 필요한 사업과 불필요한 사업으로 판단된다.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고 이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지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다.

정부는 내년도 예산안 보도자료를 통해 건전재정을 홍보한다. 이에 따라 많은 언론은 내년도 예산안의 특징으로 ‘건전재정’을 강조한다. 그러나 내년도 예산안에는 건전재정이 담겨있지 않다. 올해 예산보다 재정수지 적자 폭이 확대되고 국가채무 비율이 증가한다. 관리재정수지 적자는 올해 -58조 원에서 내년 -92조 원으로 악화되고,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올해 50%에서 51%로 증가한다.

정부 주장과는 달리 내년도 예산안이 건건하지 않은 이유는 세입이 감소되기 때문이다. 정부는 총지출 증가율이 2.8%에 불과하다고 건전재정이라고 하지만 총수입 증가율은 -2.2%다. 총수입은 감소하는데 총지출은 증가하니 부채가 증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세입 감소의 주요 이유는 법인세 등 대규모의 감세 때문이다. 감세와 재정건전성의 두 마리 토끼는 동시에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증명되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법인세율을 내려도 세수가 줄지 않는다는 기적의 논리를 여러번 언급했다. 법인세율을 내리면 기업의 투자가 늘고, 투자가 늘면 내수가 좋아져서 세수입이 증가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기획재정부조차도 법인세율 인하에 따라 향후 5년간 약 30조 원의 세수가 감소한다고 한다. 기재부 장관의 말을 기재부가 부정하는 기묘한 일이 발생했다.

▲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8월24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2024년 예산안 및 2023~2027년 국가재정운용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기획재정부 홈페이지
▲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8월24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2024년 예산안 및 2023~2027년 국가재정운용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기획재정부 홈페이지

정리해보자. 정부는 내년도 예산안에 건전재정이 담겨있다고 한다. 이를 그대로 믿고 내년도 예산안의 특징은 건전재정이라고 보도한 것은 언론의 잘못이다. 언론은 정부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면 안 된다. 언론은 정부의 주장을 검증해야 할 책임이 있다.

다만, 내년도 예산안 23조 원의 지출 구조조정의 내용을 언론이 검증하지 못한 것은 정부의 잘못이다. 정부는 사회적 혼란을 피하기 위해 지출 구조조정 리스트를 발표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망각한 행위다.

민주주의 대화와 타협의 원칙은 ‘묻지마 칼부림’이 아니다.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지닌 이해관계자들이 차이를 드러내놓고 공개적으로 토론할 수 있도록 정부는 자료를 제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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