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 KBS 사장이 KBS 이사회에 출석해 주요 취재·보도 관련 국장에 대한 임명동의제가 위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판단의 근거가 될 법률 자문 결과 등은 제시하지 못했다.

박민 사장은 24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KBS 본관에서 열린 KBS 임시이사회에서 단체협약 제29조에 규정된 국장 임명동의제 관련 보고를 했다.

KBS는 교섭대표노조인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와의 단체협약에 따라 2019년 통합뉴스룸국장(보도국장)·시사제작국장·시사교양2국장 임명동의제를 도입했고, 2022년엔 그 대상을 시사교양1국장·라디오제작국장으로 확대했다. 이에 따라 임명동의 대상자는 해당 부서에 소속된 KBS본부 조합원 과반이 참여한 투표에서 과반이 찬성해야 임명될 수 있다. SBS·MBC·YTN·MBN 등 주요 방송사들도 보도국장 임명동의제를, 주요 신문사들도 편집국장에 관해 임명동의제나 중간평가제, 신임(불신임)평가 등을 두고 있다.

박 사장은 이사회에서 “단체협약상 임명동의 절차를 따를 경우 방송법 위반 소지가 있고 임명동의 절차를 거치지 않을 경우 노사간 신의성실 원칙을 위배할 수 있다”고 했다. 박 사장은 “그간 관련 법률과 KBS 정관, 관련 판례 등에 대해 광범위한 조사를 진행한 법무실과 관련 부서 등은 임명동의제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며 “5개 국장들은 KBS 방송과 경영의 핵심 직책들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임명이 지연되면서 정상적인 방송 제작은 굉장히 차질”을 빚고 있다고 말했다.

▲2023년 11월14일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에서 발언 중인 박민 KBS 사장. 사진=KBS
▲2023년 11월14일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에서 발언 중인 박민 KBS 사장. 사진=KBS

그러나 박 사장은 “법적 자문을 받았다고 하는데 법무실에서만 받았나”라는 이상요 이사(야권) 지적에 명확한 답을 하지 못했다.

이 이사는 이후로도 “누가 법적 검토를 한 것이냐”며 “법무팀에 한 것도 아니고 외부에 한 것도 아닌가. 직원들이 했나”라고 재차 물었다. 그러자 박 사장 대신 류삼우 부사장이 “원래 그런 게 이뤄지면 대부분 부서에서 한다”며 “사장님이 헷갈리셨을 것”이라고 말을 보태기도 했다. 이 이사는 이에 “이사회도 집행부(경영진)도 법적 타당성 위에서 행동을 해야 하는데 그 판단을 자기 마음대로 ‘뇌피셜’로 하면 안 된다”고 비판했다.

법적 검토가 미비하다는 질책이 한동안 이어진 끝에 박 사장은 지난달 서울행정법원이 김의철 전 KBS 사장의 해임정치 가처분 신청을 기각하면서 밝힌 결정문 일부를 참고했다고 밝혔다. 김 사장이 재임 기간 임명동의제 대상을 확대한 것에 대해 ‘사장이 상위직 승격 임용을 한다는 KBS 인사규정에 저촉되고 이사회 심의·의결을 거쳤어야 한다’고 지적한 대목이다. 또한 2016년 대법원이 한국노동교육원의 임금피크제 도입이 이사회 결의를 거치지 않아 무효라고 판단한 사례를 제시했다.

박 사장은 위 사례들을 전한 뒤 “공식 보고하기 전에 임의로 내부 수임료를 주고 자문을 구하는 것도 논란이 될 소지가 있다”며 “내부 변호사, 관련 부서에서 열심히 기존 판례를 찾았고 부합하는 판례가 수집됐다. 요새 온라인으로 판례 수집을 많이 한다”고 덧붙였다.

다만 김의철 전 사장 관련 결정문은 임명동의제 대상을 확대할 당시의 절차적 문제를 지적했다는 점에서 제도 자체의 정당성 판단과는 차이가 있고, 김 사장 측이 항고해 법적 다툼이 진행되고 있는 사안이다. 한국노동교육원 사례의 경우 정년 전까지 일정 비율로 임금을 삭감하고 2년간 고용을 연장하는 사안에 대해 이사회 의결이 중요하다고 지적된 사례다.

박 사장 보고를 둘러싸고 여러 질의가 잇따르자 서기석 이사장(여권)은 “검토를 하겠다는 것이다. 앞으로 법무법인 검토도 받고 하겠다는 취지이니까 제대로 훌륭한 태도”라거나, “오늘은 그 정도로 답변하시라”며 이사회를 정리하려는 듯한 발언을 거듭하기도 했다.

▲KBS 이사회 회의 전경. 사진=KBS
▲KBS 이사회 회의 전경. 사진=KBS

KBS 경영진은 또한 주요 국장이 공석인 사태라며 임명동의제 문제 해소가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박 사장은 13일 취임 후 첫 인사에서 기존 임명동의 대상자 국장들을 타 부서 등으로 발령낸 뒤 후임자 지명을 하지 않고 있다. 이는 전임 임명동의 대상 국장들의 경우 후임자 임명동의 절차가 완료된 뒤 인사조치가 이뤄진 것과 대비된다는 지적을 초래한 바 있다.

박 사장은 향후 임명동의제에 관해 대표노조인 KBS본부와 보충협약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이다. 이를 두고 김찬태 이사(야권)는 “구성원들이 공감하고 수긍할 만한 사람을 내놓으면” 되지 않겠느냐며 “신뢰를 갖고 대화를 해서 풀어보라. 그러면 나중에 박민 사장을 훌륭한 사장으로 기억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여권 이사중 한 명인 이석래 이사는 이날 “사장한테 실망했다. 이러려고 이사회에 긴급 안건을 올렸나”라며 “지금에 와서 보충협약을 하겠다는 건 임명동의제에 대해 스스로 수긍하겠다는 것 밖에 안 된다. 밑에 분들, 사장 제대로 모시라”고 말했다. 그는 “변호사 몇 명, 노무사 몇 명 자문 받아서 방송법 위반이고 (사장이 국장 임명을) 시행해도 된다고 할 정도의 자문을 받아서 보고를 하는 정도는 돼야지.오늘 와서 보충협약 하겠다니 장난치는 것인가”라며 임명동의제 무효화에 속도를 내라는 취지의 질타를 했다.

언론노조 KBS본부는 이날 박 사장 발언에 대해 성명을 내고 “낙하산 박 사장은 법무실 판단이라고 말했지만 법무실 검토 결과를 제출하지 못했다. 법무실 검토도 제대로 받지 않아 놓고 받았다고 대놓고 거짓말을 한 것”이라며 “면접 때 청탁금지법 위반과 관련해 권익위 유권해석을 받았다고 해놓고 자료 제출을 요구하자 전화 상담을 받았다고 변명 했던 모습과 묘하게 겹친다. 낙하산 박 사장은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는 게 습관인가”라고 비판했다.

KBS본부는 “임명동의제는 공정방송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라고 강조했다. 이들은 “제작자율성과 독립, 방송의 공정성에 대한 실천 의지와 자질을 갖춘 인물인지 내부 구성원들에게 평가를 받으라는 것이 과한 요구인가. 얼마나 몰상식한 인사를 주요 보직에 앉히려고 이토록 무리 수를 두는 것인가”라며 “임명동의 없이 국장을 임명한다면 해당 인사에 대한 가처분은 물론, 낙하산 박 사장 등에 대해서도 부당노동행위 혐의로 추가 고발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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