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박민 KBS 사장이 취임하고 난 뒤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지만 훨씬 폭력적이었다. 진행자 교체를 놓고 여권에서조차 시청자와 마지막 인사는 해줬어야 했다는 쓴소리가 나왔을 정도다.

박민 사장도 자신의 최종 임무가 ‘KBS 죽이기’에 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이 조선일보와 인터뷰에서 “대통령은 방송계 내부 인사로는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보셨다. 카르텔을 깨고 제대로 개혁하려면 외부의 칼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대가 있었다”고 한 발언은 앞으로 박민 KBS 사장 체제가 어디로 향할지를 보여준다.

▲ 11월13일 서울 영등포구 KBS 본사에서 박민 KBS 신임 사장이 취임식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KBS 제공
▲ 11월13일 서울 영등포구 KBS 본사에서 박민 KBS 신임 사장이 취임식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KBS 제공

박민 사장이 대국민 기자회견에서 구조조정 단행에 강한 의지를 밝히고 구성원 징계에 엄포를 놓은 것은 ‘KBS 죽이기’ 좌표 타깃을 전시한 것이다.

구조조정 대상은 누가 될까. <KBS 죽이기>라는 책(정영주, 오형일, 홍종윤 지음)은 “KBS 내부적으로는 구조조정의 불안 속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힘이 없는 약한 고리, 지난 정권에 부역했다는 꼬리표가 붙은 집단부터 구조조정 1순위에 자리 잡을 개연성이 크다”고 전망하면서 “작금의 상황은 정부가 무소불위한 정권을 휘두르고 있기 때문에 경제적 합리성이나 시청자 권익에 앞서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의해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다 보니 한국 공영 방송의 미래를 상상할 때 정치권력의 의중, 감정을 눈치 보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정치권력의 의중은 ‘KBS 죽이기’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이유는 하나, 본인들이 볼 때 편파적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 책 ‘KBS 죽이기-방송 장악인가 방송 개혁인가’ 표지
▲ 책 ‘KBS 죽이기-방송 장악인가 방송 개혁인가’ 표지

KBS 죽이기는 수신료와 맞닿아있다. 차기 KBS 사장 후보들이 난립했을 때 KBS 구성원들 사이에선 정권 입맛에 맞는 사장만 온다면 수신료 분리징수 문제를 원점으로 돌릴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박민 사장은 철저히 짓밟았다.

그는 지난해 7천억 원의 수신료를 받아놓고 방만 경영을 했다고 질타했다. 수신료 분리징수로 인해 수익이 떨어지면 ‘어떻게 하겠다’라는 경영 계획은 밝히지 않은 채 수신료 자체를 악으로 규정한 것이다.

박민 사장은 임원 임금과 프로그램별 예산 삭감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지만 수신료에 대한 대안으론 턱없이 부족하다. 수익 감소에 따라 제작비용을 줄이게 되고 콘텐츠 질 하락으로 이어진다. 대규모 인력 유출 사태가 벌어지고 악순환에 빠진다. 박민 사장 체제의 ‘KBS죽이기’ 시나리오다.

편향성 보도를 막는 장치로 기능한 수신료의 효과를 없애는 것도 ‘KBS 죽이기’ 목표 중 하나다. 프로그램 제작과 취재 현장에선 ‘수신료를 받고 있으니’라는 일종의 규율 준거틀로 작용해왔고 이에 “평균적으로 다른 여타 언론사나 방송사에 비해 편향성이나 비윤리성이 줄어드는 효과”(KBS 죽이기)가 있었는데 이젠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 TV 수신료 고지서 이미지.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 TV 수신료 고지서 이미지.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박민 사장이 “불공정 보도로 논란이 될 경우 잘잘못 따져 책임 물을 것”이라고 한 대목은 언론사 대표이사가 아닌 정권 비판 보도 검열자 역할을 자처하겠다는 것과 다름아니다. 해당 발언은 취재 일선 기자들에게 불공정 보도 판단에 대한 자기 검열을 강화시키고 소위 정권 비판 의혹 보도를 하지 말라는 가이드라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언론은 최종 ‘확인자’의 위치에 있지 않다. 사실 확인을 위한 노력은 수반되지만 오보 가능성까지 내포하고 있는 게 (의혹성)언론 보도다. 문화일보 출신 박민 사장이 이런 기본적인 상식을 모를 리 없다. 징계니 오보에 대한 문책이니 하면서 정권 불편한 리포트는 하지 말라고 윽박지른 것이다.

정치권력이 언론을 얼마나 망칠 수 있는지 일주일치 KBS 뉴스만 보면 알 수 있다. 박민 사장이 취임하고 난 뒤 KBS 보도에서 정권 비판 뉴스가 사라지거나 후순위로 배치되고 대통령 국무회의 발언을 전하거나 치적을 홍보하는 뉴스로 도배되고 있다. 용산 대통령실을 향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박땡크’라고 조롱을 받는 사람이 있는 방송이 뻔하지 않겠는가. KBS 뉴스 시청률이 바닥으로 곤두박질 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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