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전문 채널이 아닌 이상, 한국의 수많은 방송사들에게 있어 쉽게 떼놓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친하지도 않은 애증의 존재가 있다면 그건 바로 ‘팬덤’이 아닐까. 직역하면 누군가의 ‘팬’(fan)들이 만든 일종의 ‘영토’(-dom) 같은 존재인 ‘팬덤’(fandom)은 그야말로 특정한 스타에 대한 열렬한 애정으로 움직이는 공동체다. 나이도, 성별도, 사는 곳도, 심지어는 국적도 모두 다르지만 특정 스타를 마음 깊이 좋아한다는 공통점은 수많은 이들을 하나로 묶는 것에 큰 기여를 한다. 물론 이 집단적 움직임은 때로는 다른 팬덤과 감정적으로 맞붙어 싸움이 일거나, 새로운 음원이나 앨범, ‘굿즈’(goods, 상품)이 나올 때 경쟁적으로 ‘총공’(‘총공격’의 줄임말. 주로 팬덤 차원의 단체 행동 및 구입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에 나서는 모습에서는 여러 비판의 소지를 낳기도 한다. 정말 부정적으로 팬덤을 바라보는 이들은 팬덤을 일종의 ‘집단 패거리 문화’라 단정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러한 팬덤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간 사회에서 ‘팬덤’은 쉽게 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영미권의 주요 사전 중 하나인 미리엄-웹스터 사전(Meriam-Wester’s Dictionary)에 의하면 ‘팬덤’이라는 단어의 용례는 무려 1903년부터 존재했다. 초창기에 기록된 팬덤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코난 도일의 추리 소설 ‘셜록 홈즈’ 시리즈의 팬덤이다. 이들은 본래 셜록 홈즈가 사망하는 것으로 코난 도일이 시리즈를 마무리하자 이에 집단적으로 항의의 편지를 보내 끝내 결말을 바꿔내고, 코난 도일이 사망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2차 창작을 만들어낼 정도로 여전히 맹위를 끼치고 있다. 팬덤의 극성맞은 모습에 코난 도일은 때로는 언짢은 반응을 드러내기도 헀지만, 이들 팬덤이 없었다면 셜록 홈즈 시리즈는 10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꾸준히 읽히는 장르소설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팬덤을 말할 때 가장 흔하게 이야기되는 아이돌의 팬덤 역시 마찬가지이다. 몇몇 지나친 팬들은 아이돌의 일거수 일투족을 붙어지내는 ‘사생팬’이 되기도 하고, 앞서 언급했던 대로 과한 경쟁 의식으로 인해 필요 이상의 싸움을 초래하거나 ‘총공’으로 인해 다른 음악들이 주목하거나 이야기할 기회를 제한하는 등의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아이돌의 성공에 있어 이들 팬덤의 존재는 아이돌 활동의 지속성을 결정하는 큰 핵심적인 요소기도 하다. 아이돌 상당수는 가수들이 자발적으로 뭉쳐 태어나는 대신, 기획사들의 비즈니스를 통해 탄생한다. 적극적으로 애정을 드러내고, 그 애정을 담아 ‘소비’를 하는 팬들, 그리고 그 팬들이 똘똘 뭉친 ‘팬덤’이 없이는 이들의 활동 역시 큰 지장을 받을 수 밖엔 없다. 그러기에 기획사와 팬덤 사이의 관계는 때로는 긴장적이면서도, 적극적으로 기획사 차원에서 공식 팬클럽을 창설/인증하거나 팬클럽 이벤트를 펼치는 등으로 협력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사진출처=pixabay.
▲사진출처=pixabay.

아이돌 팬덤과의 복합적인 관계를 맺는 모습은 방송사 역시도 마찬가지다. 1990년대 KBS가 ‘가요톱10’이나 MBC ‘인기가요 BEST 50’, SBS ‘인기가요’ 등 순위제 가요 프로그램을 할 때에도 팬덤은 프로그램 녹화의 열기를 돋구는 가장 큰 요소였다. 본래 한 가수에 집중해서 방영하는 컨셉이었던 KBS의 음악 프로그램 ‘빅쇼’가 본래 패티김, 조용필, 신승훈 등 유명 솔로 가수를 주로 다루다가 폐지 직전인 1997년부터는 서서히 지누션이나 영턱스클럽, H.O.T. 등을 출연시킨 것은 방송국이 아이돌과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하나의 중요한 지표였다.

이후 2007년 원더걸스와 소녀시대, 빅뱅 등이 인기를 받으며 아이돌 붐이 본격적으로 일어나면서 방송사와 아이돌 사이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KBS ‘청춘불패’(2009 ~ 2012), MBC ‘우리 결혼했어요’(2008 ~ 2017), SBS ‘영웅호걸’(2010 ~ 2011) 같이 팬덤이 강한 아이돌을 적극적으로 등장시키는 프로그램들이 여기저기서 기획, 제작되었다. 엠넷이나 MTV코리아 같은 음악 전문 케이블 채널들은 ‘2PM의 와일드버니’(2009)나 ‘트와이스의 우아한 사생활’(2016) 같이 데뷔한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돌을 바로 프로그램의 전면으로 내세워 팬덤의 화력에 의지하는 프로그램들을 현재도 꾸준히 만들고 있다. MBC에브리원 ‘주간 아이돌’(2011 ~ 방영중), JTBC ‘아이돌룸’(2018 ~ 2020) 같이 아이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프로그램까지 생길 정도였다.

▲ MBC everyone ‘주간아이돌’ 갈무리
▲ MBC everyone ‘주간아이돌’ 갈무리

각 방송사는 ‘한류’를 이유로 자사 음악 프로그램의 해외 특별 녹화를 진행하며 아이돌 팬덤의 인기를 활용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코로나로 인해 촬영에 문제가 발생하기 전까지 엠넷이 매년 자사의 시상식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드’(MAMA)를 해외에서 진행하고, MBC가 수많은 아이돌을 부상의 위협을 안도록 만든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아이돌 육상 선수권 대회’(아육대)를 진행했던 것은 어떤 식으로든 아이돌 팬덤이 아이돌이 등장하는 프로그램을 소비했고, 그것이 방송사에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팬덤, 예능에선 ‘돈줄’뉴스나 시사교양에선 ‘문제적 대상’

하지만 방송사는 예능의 차원에서는 아이돌을 일종의 ‘돈줄’처럼 여겼지만, 뉴스나 시사교양의 영역으로 가는 순간 이러한 시선은 180도로 달라졌다. 아이돌 팬덤은 여러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문제적 대상이자, 과도한 상업화를 추동하며 음악 다양성을 침해하는 주범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설사 긍정적으로 바라본다고 하더라도 팬덤의 꾸준한 소비로 인한 ‘시장의 성장’, 아니면 해외에서도 아이돌이 주목받는 것에 크게 일익을 했다는 ‘한류의 주역’ 정도로 바라봤을 따름이다. 열심히 돈을 쓰며 시장을 키우는 ‘역군’과 지나치게 스타를 좋아하며 때론 문제를 일으키는 ‘문제아’ 사이의 중간이 없었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유행은 몇 십번 바뀌어도, KBS나 MBC 같은 방송사들의 뉴스에서 팬덤을 대하는 모습은 참으로 한결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 지난 1월부터 KBS2에서 방송 중인 토크 예능 ‘주접이 풍년’은 실로 놀라운 프로그램이라고 부를 수 밖에는 없다. 팬덤에 대한 부정적 시선, ‘산업적인’ 측면에서 긍정적인 요소를 찾는 양극단을 떠나 ‘팬덤’이라는 존재에 다가가 묻고 바라보는 프로그램은 이전까지의 한국 방송사의 프로그램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KBS 주접이 풍년 홈페이지.
▲KBS 주접이 풍년 홈페이지.

물론 비슷한 프로그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tvN에서 2018년부터 2019년까지 두 시즌에 걸쳐 방송된 ‘300’은 특정 가수나 아이돌과 그를 사랑하는 300명의 팬을 함께 모아서 ‘힘을 과시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시즌 1에서는 특정 두 가수의 팬덤과의 배틀 방식에서 시즌 2에서는 단독 출연으로 바뀐 차이가 있었지만, 두 시즌 모두 팬과 가수가 함께 ‘떼창’을 통해 자신들의 ‘팬심’을 증명한다는 컨셉은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떼창’이 실질적인 메인이 되는 프로그램의 특성상 팬덤에 대한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아지고, 큰 실수나 흠 없이 화음에 맞춰 멋진 떼창에 도전하는 것이 프로그램의 주를 이뤘다.

그 이후로도 ‘팬덤’을 프로그램의 전면에 내세우는 작품 상당수는 꾸준히 ‘대결’이나 ‘세를 과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명목 아래 경쟁을 붙이는 컨셉이 게속 주를 이뤘다. 엠넷이 2019년부터 계속 시즌을 제작 중인 ‘퀸덤’ 시리즈는 이를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비록 바로 직전에 ‘프로듀스 101’ 시리즈의 조작 논란이 터지면서 경쟁을 조장하는 컨셉은 상당수가 순화되었지만, 컴백이나 인기를 노리는 아이돌이 서로 맞붙고 최종 승자를 팬덤이 소비한 ‘음원 순위’와 생방송 문자투표 등을 통해서 순위를 가른다는 컨셉은 ‘팬덤의 세력 경쟁’을 적극적으로 촉진하고자 하는 목적이 너무나도 뚜렷했다.

다양한 팬덤 다루고 애정 어린 심리에 관심

이들 프로그램에 비교하면 ‘주접이 풍년’ 역시도 ‘팬덤의 힘을 드러낸다’는 측면에서는 비슷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경쟁이나 세를 과시하는 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매 화마다 아이돌이나 트로트 가수, 또는 소위 ‘스타강사’로 이름을 알린 김미경 같이 다양한 영역의 팬덤을 다루는 ‘주접이 풍년’은 스타와 팬덤이 함께 한 자리에 모이는 순간 자연스럽게 풍겨져 나오는 팬덤의 모습에, 그리고 팬덤을 이루는 각 개인들의 애정어린 심리에 관심을 맞춘다.

▲스타강사 김미경의 팬덤을 다룬 KBS '주접이 풍년'.
▲스타강사 김미경의 팬덤을 다룬 KBS '주접이 풍년'.

프로그램을 통해서 나오는 이들 ‘팬덤’의 모습은 매체들을 통해서 다뤄지던 여느 ‘팬클럽’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팬클럽이 함께 단합하여 정한 상징색과 응원봉, 상징색으로 맞춰 단결력을 드러내고 스타의 말 한 마디, 표정 변화 하나하나에 열렬한 반응을 보낸다. 팬덤에게 있어 의미있는 장소에 방문하는 모습을 다루는 장면은 마치 ‘성지순례’에 비견될 정도의 고양감까지 느껴진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프로그램이 그쳤다면 ‘주접이 풍년’은 여느 팬덤의 힘을 활용하는 다른 프로그램들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주접이 풍년’은 팬덤에 속한 각각의 인물들에게 왜 그 스타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그 스타를 좋아해서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토크쇼 형식으로 이야기를 듣는다. 이러한 질문과 대답 속에서 팬덤을 이루는 구성원들은 자신의 좀 더 내밀한 부분까지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똑같은 상징색으로 몸을 휘감은 사람들이지만, 어쨌든 이들은 결코 완전한 한 몸이 아니다. 그저 같은 가수나 유명 인사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을 뿐, 팬덤에 모여 서로를 알게 되기 전에는 쉽게 같은 점을 찾아볼 수 없는 ‘개개인’들이다. 그러던 이들이 우연한 계기로 스타의 존재를 알게 되고, 조금씩 스타에게 깊게 빠져든다.

이후 개인들은 좀 더 자신이 스타를 사랑하는 모습을 같은 취향을 공유하는 이들과 나누고 싶어 팬덤에 가입하고, 그렇게 새롭게 만난 ‘팬덤’이라는 이름의 공동체는 이전까지 상상할 수도 없던 일들을 해내기 시작한다. 그것은 단순히 ‘주접이 풍년’처럼 팬덤이 집단으로 방청을 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 녹화나 콘서트에 함게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스타의 뜻을 담아 공동으로 기부를 하는 등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마치 여타의 동호회가 그런 것처럼, 팬심으로 모인 이들은 하나의 집단이 되어 많은 이들이 함께 있어야 이룰 수 있는 것들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이전까지의 방송사가 팬덤을 철저히 팬덤의 경쟁심을 이용하거나, 문제적인 요소만 짚어내거나 ‘도구적인 효용성’에 천착하는 식으로 다뤄냈다면 ‘주접이 풍년’은 최소한 이러한 함정들에는 모두 벗어나는 길을 택했다. 가끔씩 드러나는 팬덤의 ‘팬심 증명’은 방송 프로그램 특유의 ‘이미지 연출’을 위해 과장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도 들지만, 팬덤 개개인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으려 시도하는 작품은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주접의 풍년’의 행보는 얼핏 보기에는 가벼워보여도 결코 가볍지 않은 모습의 연속이다.

▲KBS '주접이 풍년' 나훈아 편.
▲KBS '주접이 풍년' 나훈아 편.

이렇게 ‘팬덤’에 눈높이를 맞추는 ‘주접이 풍년’의 흐름은 같은 대상을 바라보더라도 이전과는 다른 느낌을 만드는 효과까지도 낳고 있다. 지난 3월 31일 방송된 ‘나훈아’ 편이 좋은 예시이다. 트로트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조금이라도 이름을 들어봤을 나훈아는 이미 방송사에서 몇 차례나 주목했던 가수이다. 그의 가수 생애를 다룬 프로그램은 역시 잊을만 하면 등장했다. 하지만 ‘주접이 풍년’은 ‘나훈아’가 아니라 ‘나훈아를 사랑하는 팬덤’에 초점을 맞춘다. 나훈아의 가수 활동을 집중해도, 다양한 연령대를 지닌 이들이 어떻게, 그리고 왜 지금도 나훈아를 사랑하는지를 묻고 이야기를 경청한다. 비록 근래 TV 출연을 자제하는 나훈아의 행보로 인해 ‘주접이 풍년’ 나훈아 편에서도 나훈아의 출연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수 나훈아 대신 나훈아에 대한 애정과 관심에 집중을 하는 행보는 이전까지 나훈아를 주목했던 방식과는 다르게 나훈아를, 그리고 나훈아가 거쳐간 한국 대중음악사를 바라보는 접근법은 무척이나 신선한 느낌을 낳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팬덤’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자 극성적인 존재이며, 다른 누군가에게 ‘팬덤’은 자신들의 비즈니스에 도움이 되는 ‘지갑을 긴히 바치는 존재’가 될 것이다. 또는 조금만 심기를 거스르게 한 득달같이 달려드는 ‘귀찮은 존재’로도 비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팬덤’이라는 용어가 지닌 긴 역사처럼, 팬덤이 지니는 여러 부작용들에도 불구하고 팬덤은 우리가 ‘팬덤’이라는 용어를 쓰기 전에도 일상 생활 속에서 쉽게 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된지 오래다.

심지어는 ‘팬덤’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거나 심지어는 적극적으로 기피할지라도, 이들은 분명 박지성이나 손흥민 같은 스포츠 스타, 임요환, 홍진호, 페이커와 같은 e스포츠의 유명 선수를 지지하거나 특정 정치인의 입장을 깊게 지지하는 식으로 자기가 생각하지 못한채 어느 ‘팬덤’에 들어가 있을 가능성은 결코 적지 않다. 하지만 미디어는 이런 ‘팬덤’이라는 존재를 깊게 접근하는 대신 때로는 이용하다가도, 때로는 다시 부정적으로만 다가서는 방식 만을 반복할 따름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접이 풍년’이 보이는 접근법은 ‘팬덤’이라는 존재에 선입견을 최대한 제거하고, ‘취향 또는 팬심으로 똘똘 뭉친 공동체, 커뮤니티’를 어떻게 다가서야 할지 계기를 조금씩 만들고 있다. 그러한 시선의 변화가 TV를 비롯한 기존의 레거시 미디어가 점점 외면받는 시대에, 다양한 존재들을 아우르고 함께할 수 있는 길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큰 원동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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