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도 영상 산업이 구축된 모든 나라에는 각각의 시상식이 존재한다. 엄연한 미국 국내용 시상식이지만 국제적 위상 덕분에 덩달아 높은 지위를 가지게 된 ‘아카데미 시상식’을 비롯해 영국의 BAFTA, 프랑스의 세자르상, 스페인의 고야상, 일본의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 대만의 금마장을 비롯해 각국에는 최소 1개 이상의 영상 부문 시상식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199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한국에서 이런 지위를 지니고 있던 시상식은 1962년에 첫 막을 올린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 시상식 ‘대종상 영화제’였다. 그러나 모두가 익히 알디시피 대종상은 긴 역사와 별개로 2022년 현재 이전같은 영향력을 지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안정적 후원 주체를 가지지 못하며 계속 스폰서를 찾아 헤매던 것도 문제의 이유지만, 가장 큰 문제는 줏대가 없는 후보작과 수상작 선정 문제에 있었다.

1996년에 발생한 속칭 ‘애니깽 사태’는 더 이상 대종상이 한국 영화를 대표할 수 없는 영화제임을 보인 매우 상징적 사건이었다. 홍상수의 첫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비롯해 박철수의 연출작 ‘학생부군신위’가 후보에도 오르지 않는 일이 발생했다. 박광수 연출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장선우 연출의 ‘꽃잎’, 강제규 연출의 ‘은행나무 침대’, 장현수 연출의 ‘본 투 킬’이 후보에 등극하긴 했으나 정작 상을 휩쓴 작품은 따로 있었다. 대종상이 열린 1996년 4월에는 아직 개봉도 하지 않았던 김호선 연출의 ‘애니깽’이 작품상, 감독상, 여우조연상을 받고 만 것이다.

‘애니깽’을 연출한 김호선은 1970년대 ‘영자의 전성시대’나 ‘겨울여자’ 같은 호스티스물로 일세를 풍미했던 감독이었지만, 1990년대에는 이미 대중의 주목에서 많이 멀어진 상태였다. 한편 애니깽을 제작, 배급한 ‘합동영화사’는 최근 오랜 역사를 마치고 문을 닫은, 그러나 전성기 시절에는 압도적 영향력 행사로 많은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종로3가 서울극장의 소유주였다. 어떤 의미로는 1990년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고 있던 한국 영화에 1970, 1980년대를 대표하는 이들의 반란과도 다름 없는 수상 결과였다. 하지만 그런 영화계 내부의 알력 다툼을 떠나 제대로 개봉조차 하지 않은 작품이 후보에 오르고 끝내 상을 받은 것은 대종상 내부의 자체 규정에도 맞지 않는 완벽한 대참사였다.

▲백상
▲백상예술대상 홈페이지. 

‘애니깽 사태’는 상대적으로 대종상보다 후발주자였던 ‘청룡영화상’(1963년 첫 시작), ‘백상예술대상’(1965년 첫 시작)이 주목받는 계기를 만들었다. 본래 국가 주도의 영화 시상식이었으나 1990년대 이후부터는 삼성, 쌍방울 등 다양한 스폰서를 찾아다녀야 했던 대종상과 달리 청룡영화상은 조선일보 계열의 스포츠조선, 백상예술대상은 1990년대 당시 한국일보 계열이었던 일간스포츠가 주최하며 상대적으로 자금의 여유도 있었다. 여기에 백상예술대상은 마치 미국의 ‘골든 글로브’처럼 당시 한국에서는 방송사가 아닌 곳이 주최하는 유일한 방송 대상 시상식을 겸하며 나름대로의 정체성까지 형성하고 있었다. (단 백상예술대상은 2003년 일간스포츠가 한국일보에서 계열 분리된 이후 한국일보와의 관계가 끊기고, 2005년부터는 중앙일보가 일간스포츠를 인수하며 현재는 중앙그룹 차원에서 시상식이 진행되고 있다.)

이후부터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이다. ‘애니깽 사태’ 이후로도 대종상 주최진들은 별다른 반성이나 개선이 없이 대종상을 운영했고, 결국 2015년에는 조근우 당시 집행위원장이 ‘참석이 불가능하면 상을 주지 않을 것이다’는 말로 큰 논란을 만들며 여우,남우주연상 후보 전원이 불참하는 등 24개 시상 부문에서 11개 부문에서 대리수상이 발생하는 사건이 발생하며 완전한 몰락의 길을 걷고 말았다. 이후 2017년부터는 생방송으로 수상자들의 심사 결과를 공개하는 등의 자구책에 나서고 있으나, 한번 추락한 권위는 다시 회복할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다.

대종상 몰락의 길 걷고, 백상예술대상 우위 형성

반면 대종상이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을 때, 청룡영화상과 백상예술대상은 상대적으로 정상적인 운영을 보이며 대종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우위를 형성하게 되었다. 비록 청룡영화상은 2000년대 무렵 안티조선 운동과 연루되며 이창동 감독 등이 현재까지도 출품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정치적 문제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그런 정치적인 논란조차도 대종상이 택한 자발적 추락에 비하면 약과였다. 청룡영화상은 2010년대 내내 후보작과 수상작 선정의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대종상과 달리 큰 논란을 일으키지 않은 것만으로도 우위를 지니는 것에 성공했다. 백상예술대상 역시도 이러한 효과를 얻는 동시에, 2010년대 이후 각 방송사에서 주최하는 연기대상이나 연예대상이 끊임없는 논란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역시 상대적인 우위를 지닐 수 있었다. 백상예술대상은 이 기세에 힘입어 2019년부터는 한동안 중단되었던 연극부문 시상까지 재개한 상황이다.

그러나 이들 두 시상식도 여전히 자유롭지 않은 문제가 있다. 대종상보다는 후보작의 선정이 상대적으로 괜찮다는 평가를 들었어도, 결국 후보작들의 경향이 소위 CJ나 롯데, 쇼박스 등 대형 배급사를 통해 배급되는 대형 작품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저예산 작품은 물론, 독립 ‧ 예술영화는 그야말로 하늘에 별따기 수준으로 존재했다. 비록 개봉관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어 압도적인 주목을 받지는 못했더라도, ‘해당하는 시기 개봉한 모든 작품’을 적절히 평가해야 하는 영화계 시상식으로서는 적절한 평가의 장을 마련하지 못한다는 한계는 계속 한동안 계속 되었다.

예외적으로 2009년 청룡영화상이 독립영화 ‘똥파리’의 주연을 맡은 김꽃비와 양익준에게 각각 신인 여우/남우상을, 그리고 백상예술대상이 독립영화인 ‘경축! 우리 사랑’에 작품상을, 저예산 영화였던 ‘멋진 하루’의 연출자 이윤기에게 감독상을, 그리고 그 해 다큐멘터리로는 유래없이 큰 센세이션을 낳았던 ‘워낭소리’의 연출자 이충렬에개 신인감독상을 시상한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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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제 45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수상자. 

하지만 그 이후의 상황은 딱히 독립영화나 예술영화, 저예산 영화에 대한 관심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 모두 2010년대부터 2021년까지 독립‧예술영화는 계속 신인상을 중심으로 후보에 오르거나 상을 받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외의 영역에서도 노미네이트 되거나 상을 타는 일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2011년 ‘풍산개’에 출연해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윤계상, 2015년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이정현 같이 이미 유명세가 강했던 사람이나, 또는 2014년 청룡영화상에서 신인감독상(이수진)과 여우주연상(천우희), 2015년 백상예술대상에서 여자신인연기상(천우희)를 받은 ‘한공주’가 CGV아트하우스를 통해 배급된 것처럼 대형 배급사를 통해 유통된 작품들 정도가 후보에 오르거나 상을 받기 용이했다. 이러한 경우가 아닌 수상은 2014년과 2017년 백상예술대상 시나리오상을 수상한 부지영 연출, 김경찬 각본의 ‘카트’와 윤가은 연출의 ‘우리들’, 2019년 청룡영화상 각본상을 수상한 김보라 연출의 ‘벌새’, 2021년 청룡영화상 감독상을 수상한 임대형 연출의 ‘윤희에게’ 정도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한국 밖의 시상식들도 자유롭지 않다. 해외라고 해서 개봉 규모로 인한 접근성의 차이, 주목도의 격차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동시에 설사 저예산의 작품이 상을 받는다고 한들 소니 픽쳐스 계열의 ‘소니 픽쳐스 클래식’이나, 유니버설 픽쳐스 계열의 ‘포커스 피쳐스’ 같이 대형 스튜디오 산하의 저예산 ‧ 예술영화 전문 스페셜티 브랜드, 또는 근래 들어서는 넷플릭스나 아마존 스튜디오 같이 OTT의 기세를 타고 새롭게 주목받은 신흥 자본이 대두받는다는 비판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다양한 작품들에 적절한 주목의 기회 제공치 않는 시상식

하지만 이러한 해외 시상식의 한계를 고려하더라도 한국 시상식은 다양한 작품들이 한국 영화에도 이미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적절한 주목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해외와 비교할 수 없는 큰 한계를 지녔던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해외의 저예산‧독립‧예술영화에 대한 수상 결과가 자본과 자유롭지 않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이들 영역에 대한 지속적인 후보 등재와 시상은 상대적으로 주류‧대형‧상업영화에 비해 주목도가 낮은 작품에게도 시선이 오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동시에 해당 영화를 연출, 제작, 출연에 관여한 이들이 꾸준히 경험을 축적해 그에 합당한 가치를 받을 수 있는 전기를 제공할 수 있다.

이에 비교하면 오랜 시간 주류 영화를 중심으로 흘러왔던 한국 영화 시상식은 저예산‧독립‧예술영화에 대한 고립을 초래하는 측면이 분명 있었다. 아무리 독립‧예술영화에 나와 열연을 하더라도, 적절한 평가의 기제가 부족한 상황에서 해당 작품의 제작에 관여한 감독이나 배우, 스태프 등은 이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기도 어렵게 되었다. 이들이 영화계 내에서 주목을 받는 방법은 어떻게든 쌓아올린 포트폴리오를 기반으로 다른 작품에 출연하고, 그 작품이 유명세를 타고 성장하는 정도였다.

▲영화 '기생충'의 이정은 배우.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영화 '기생충'의 이정은 배우.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이미 ‘어른도감’(2017)이나 ‘미쓰백’(2018), ‘미성년’(2018) 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던 배우 이정은이 2019년 봉준호 연출의 ‘기생충’에 나와서야 겨우 주목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그 상징적인 모습이다. 이런 상황이 오랜 시간 지속되자 2014년에는 독립‧저예산 영화만을 대상으로 하는 ‘들꽃영화상’이 시작되어 자체적 시상식의 틀을 형성한 상황이다. 어디 그 뿐인가. 상대적인 인기도는 극영화에 비해 밀려도 결코 도외시 할 수 없는 다큐멘터리나 애니메이션에 대한 부문상은 청룡-백상 두 시상식 모두에게 있어 부재하며, 그나마 단편 부문 시상식이 청룡영화상에 존재하는 상황이다.

달라진 백상예술대상 라인업, 코로나19가 바꿨나

이러한 상황에서 5월 6일에 열릴 예정인 제58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은 여느 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위치한 ‘작품상’에 평화시장의 여성 노동자들을 다룬 이혁래, 김정영 연출의 다큐멘터리 ‘미싱타는 여자들’이 후보로 오른 것이다. 이와 함께 이전 ‘비치온더비치’나 ‘밤치기’ 같이 여성을 중심으로 한 도발적인 연애 서사로 꾸준히 주목을 받아왔던 정가영의 저예산 영화 ‘연애 빠진 로맨스’가 작품상과 감독상, 시나리오상, 여자최우수연기상(전종서)에 후보로 오르게 되었다. 모두 인지도가 이전부터 높았던 배우들이지만, 퀴어 로맨스를 주로 다뤄왔던 소준문 감독의 독특한 헤테로 로맨스 영화 ‘빛나는 순간’의 주연 고두심, 홍상수의 작년 작품이었던 ‘당신얼굴 앞에서’의 주연 이혜영이 여자최우수연기상 후보에, 청소년 사이의 인간 관계 문제를 다룬 이우정 연출의 ‘최선의 삶’에 출연한 배우 심달기가 여자조연상 후보에 오르게 되었다.

▲제58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작품상 후보.
▲제58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작품상 후보.

다른 영화상들과 크게 다를바 없이 주류가 아닌 작품들은 주로 신인 부문으로, 또는 그나마 시나리오상 부문에 배치하던 백상예술대상에 어떤 변화가 생긴 것일까. 가장 큰 변화는 한국 영화계가 코로나19를 거치면서 대형 주류 작품의 개봉이 급속도로 줄어든 것을 고를 수 밖에 없다. 이번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에서 대형 작품이라 부를 수 있는 작품은 롯데엔터테인먼트가 배급한 류승완 연출의 ‘모가디슈’, 김정훈 연출의 ‘해적: 도깨비 깃발’, 메가박스 플러스엠이 배급한 변성현 연출의 ‘킹메이커’, 그리고 NEW가 배급한 박대민 연출의 ‘특송’ 정도다. 하지만 ‘해적: 도깨비 깃발’이나 ‘특송’은 액션 중심의 블록버스터이기에 시상식에서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운 장르의 작품들이다. 실질적으로 후보에 오르거나 상을 주기에 좋은 주류 작품이 무척이나 부재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시상의 범위를 이전보다 확장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를 고려하더라도 ‘미싱타는 여자들’의 백상예술대상의 메인 부문인 작품상 후보에 오른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선택임은 부정할 수 없다. 대종상이나 청룡영화상은 물론 백상예술대상 역시 별도의 다큐멘터리 부문상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다큐멘터리는 2009년 ‘워낭소리’의 수상을 제외하면 상을 받는 것은 고사하고 후보에 오르는 것부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주제는 2022년 한국에서 여전히 민감할 수 있는, 전태일의 유지를 이어 오랜 시간 동안 싸워온 청계피복노조의 여성 노동자들에게 대한 이야기이다. 비슷한 저예산 영화로는 많은 부문의 후보에 오른 정가영의 ‘연애 빠진 로맨스’가 CJ ENM이 배급했다는 상대적인 어필 포인트가 있는 반면, ‘미싱타는 여자들’의 배급사는 독립 ‧ 예술영화 전문 배급사인 ‘영화사 진진’이다. 후보에 오르기에 불리한 요소들이 ‘미싱타는 여자들’에 산재한 가운데, 모두의 예상을 깨고 ‘미싱타는 여자들’이 백상예술대상의 후보에 오른 셈이 되었다.

물론 아직 갈 길은 멀다. 어디까지나 ‘미싱타는 여자들’은 작품상의 후보에 오른 것일 뿐, 나머지 후보작들(‘기적’, ‘모가디슈’, ‘연애 빠진 로맨스’, ‘킹메이커’)에 비하면 아직 ‘미싱타는 여자들’의 수상 가능성이 높다고는 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코로나19가 2년 넘게 한국 영화계를 강타한 현실 등 다양한 맥락을 고려해도 백상예술대상이 분명 이전과는 다른 변화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이는 것은 분명하다. 과연 이 변화는 백상예술대상의 근본적인 변화를, 더 나아가 청룡영화상을 비롯한 한국 내에 존재하는 영화 시상식들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을까.

그리고 계속 미디어에서 소외되거나 주목을 받기 어렵고, 전용의 미디어도 많지 않은 독립영화나 예술영화 영역에서 새로운 전기를 만들 수 있을까. 아직까지 이에 대해서 확답을 내리기는 쉽지 않지만, 어찌되었든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은 극히 일부의 변화라고 할지라도 이전의 관성에서 조금씩 달라지는 길을 택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흐름이 좀 더 오래, 근본적인 변화로 이어질 수 있도록 계속 주시하고 이야기를 하는 움직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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