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 KBS 사장이 13일 취임사를 통해 “공영방송을 개인이나 집단의 이념이나 소신을 실현하는 곳으로 생각하는 분은 앞으로 설 자리가 없을 것”이라며 “재창조 수준의 조직 통폐합과 인력 재배치를 주저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박민 사장은 이날 서울 영등포구 KBS 본사에서 진행된 취임식에 참석해 “KBS는 전례 없는 재정 위기에 직면해있다. 모두들 알고 계시는 수신료 분리 징수, 2TV 재허가, 예산지원 삭감”이라며 “OTT가 없어지고, 수신료 통합 징수가 계속되고, 2TV가 10년간 재허가를 받고, 예산이 고정적으로 지원된다면 KBS는 지금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사장은 “공영방송의 정체성을 재확립해야 한다. 국민이 사회 이슈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정확하고 편견 없는 지식과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공영방송을 개인이나 집단의 이념이나 소신을 실현하는 곳으로 생각하는 분은 앞으로 설 자리가 없을 것”이라며 “수신료를 낭비하는 모든 적폐는 일소해야 한다. 더 이상 기둥 뒤 직원, 고용 자체가 목적인 조직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2023년 11월13일 서울 영등포구 KBS 본사에서 박민 KBS 신임 사장이 취임식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KBS
▲2023년 11월13일 서울 영등포구 KBS 본사에서 박민 KBS 신임 사장이 취임식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KBS

이어 “지난 10여 년간 미디어 시장은 파괴적 변화를 거듭해왔지만 KBS는 충분한 대비를 하지 못했다. 국내 주요 지상파들조차 제작 시스템을 혁신하고 변화를 꾀했지만 KBS는 기득권 지키기에 급급했다”며 “이제 미디어 시장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할 수 있도록 재창조 수준의 조직 통폐합과 인력 재배치를 주저해선 안 된다. 이런 자기 혁신이 선행되면 KBS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회복될 것이다. 국민이 KBS의 필요성에 공감하면 재정적 위기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박 사장은 “부족하지만 앞장서서 외풍을 막고 걸림돌을 치워나가겠다”며 “우리 스스로 나아가 우리 가족들이 KBS인임을 자랑스러워하는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 사장은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KBS노동조합 등 성향이 다른 양대 노조들이 모두 ‘윤석열 정권의 낙하산’으로 규정했던 인사다. 실제 박 사장 취임 전후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이 요구했던 진행자 교체나 프로그램 폐지 등이 현실화하면서 이러한 우려는 더 높아지고 있다.

10일 KBS 아침 ‘뉴스광장’ 앵커들이 하차를 통보 받은 뒤 마지막 방송을 했고, ‘사사건건’ 앵커도 물러났다. 박 사장이 임명된 12일엔 아무런 권한이 없는 라디오센터장 내정자가 KBS 1라디오 ‘주진우 라이브’ 제작진에게 진행자 하차 통보를 지시했다며 KBS 라디오PD들이 항의하고 있다. 같은 날 KBS 메인뉴스프로그램 ‘뉴스9’ 앵커도 하차를 통보 받았다고 전해진다. KBS 2TV 시사프로그램 ‘더 라이브’는 방송 당일인 13일 나흘간의 ‘편성 삭제’가 결정됐다.

박 사장 취임식은 KBS 내부에서의 갈라치기 우려를 드러내는 단적인 사례가 되기도 했다. 박 사장 퇴진 목소리를 내고 있는 언론노조 KBS본부(KBS교섭대표노조)가 취임식 장소 앞에서 피켓 시위에 나선 가운데 해당 노조의 강성원 KBS본부장은 취임식장 입장이 불허됐다. 사장 공모 초기에 박민 사장 반대를 주장하다 입장을 선회한 KBS노동조합의 허성권 위원장은 취임식에 가지 않았다. 지난 8월 ‘대안 노조’가 되겠다면서 출범한 ‘같이(가치)노조’ 측 인사는 취임식에 참석했다.

▲2023년 11월13일 서울 영등포구 KBS 본관 앞에서 전국언론노동조합이 박민 KBS 사장 사퇴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노지민 기자
▲2023년 11월13일 서울 영등포구 KBS 본관 앞에서 전국언론노동조합이 박민 KBS 사장 사퇴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노지민 기자

KBS본부가 속한 전국언론노동조합은 일련의 사태 배경에 “용산 대통령실의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언론노조는 박 사장 취임식 직후 KBS본관 앞 기자회견에서 “사장 임명 재가가 나기 전 용산 대통령실이 박 후보자 인사청문단이 꾸린 차기 보직자 인선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재가를 늦추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실제로 박 후보자에 대한 임명 재가는 청문회 닷새가 지난 일요일 오후 늦게야 났고, 이어진 주요 보직에 대한 인사도 확정에 가깝다고 돌던 차기 주요 보직자들이 대폭 물갈이됐다”며 “공영방송 KBS의 주요 보직자 인선에 용산 대통령실의 입김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심이 짙어지는 부분으로, 사실이라면 공영방송의 독립성을 심각하게 침해한 것”이라 주장했다.

윤창현 언론노조 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오늘부터 임기를 시작하는 박민 업무 계획에 ‘수신료 원상복구, 정상화’ 이런 거 없다. KBS에서 평생을 헌신해왔던, 미디어 공론장에서 평생 일해왔던 많은 이들이 권력에 의한 구조조정 칼날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일선 제작현장에서 피땀 흘려 온 수많은 KBS 노동자들에게 ‘입막음’이 강요될 것”이라며 “이미 ‘뉴욕타임스’, ‘뉴요커’ 등 세계 유수의 언론이 대한민국의 언론탄압, 시대착오적인 언론자유말살에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공영방송 KBS가 외신에 오르내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강성원 KBS본부장은 “언론인 같지도 않은 언론인의 삶을 살아온 자가, 아직도 해소되지 않은 각종 비윤리적인 비리 의혹에 대해서는 여전히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해소하지 않은 자가 ‘비효율성’을 얘기하고 있다. ‘정권 낙하산’이 ‘편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며 “국민 앞에 사죄해야 할 대상자는 KBS 구성원들이 아닌 정권의 낙하산 사장일 것이다. 정권의 낙하산은 공영방송 KBS 수장이 될 자격이 없다”며 박 사장 사퇴를 요구했다.

이날 KBS노동조합의 경우 “가장 중요한 건 KBS를 정상화시켜 국민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노총 노조 출신이 통제한 노영방송체제를 완전히 청산하고 공영방송 본연의 역할로 돌아오는 이른바 정상화개혁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KBS 구성원이 가장 많이 가입한 언론노조 KBS본부를 겨냥한 성명을 냈다. 이들은 “국민이 바라는 공영방송 개혁의지를 망각하고 민노총 언론노조의 물밑에서 아양을 떨며 타협하려는 경영진에 대해서는 높은 강도의 투쟁을 통해 심판받게 할 것”이라고 했다.

한편 박 사장은 14일 오전 11시 ‘박민 KBS 사장 대국민 기자회견’을 진행한다. 박 사장이 후보자 공모 지원 당시 경영계획서에서 “불공정 보도에 대해 사과하고 재발방지와 혁신 다짐”을 하겠다고 밝혔던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날 기자회견엔 박 사장과 이춘호 전략기획실장, 김동윤 편성본부장, 장한식 보도본부장, 임세형 제작1본부장, 조봉호 경영본부장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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