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할리우드를 쉬게 했던 대규모 작가 파업이 지난달 27일(현지시간) 종료된 가운데 거대 플랫폼 기업들에 맞서 임금 인상, 인공지능(AI) 규칙 마련 등 노동자 측이 의미 있는 승리를 거뒀다는 평가가 나온다. 잇따른 콘텐츠 제작 중단으로 큰 경제 손실이 추산되지만 파업 당위를 인정받아 일반 시민들의 지지도 얻어낸 모습이다.

▲ 미국작가파업에 동참하고 있는 배우들. WGA 유튜브 갈무리.
▲ 미국작가파업에 동참하고 있는 배우들. WGA 유튜브 갈무리.

1만1500여명 규모의 미국작가조합(WGA)은 지난달 26일 영화‧TV제작자동맹(AMPTP)과 맺은 잠정 합의안을 조합원들에 보내며 27일 파업을 종료하겠다고 밝혔다. 10월2일부터 10월9일까지 합의 확정을 위한 조합원 투표가 남아 있지만 현지 보도에 따르면 무난한 통과가 예상된다. 명시된 계약 기간은 3년이다.

뉴욕타임스(NYT),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현지 보도를 종합하면, 잠정 합의안에는 3.5% 이상의 임금 인상과 ‘로열티’에 해당하는 재상영분배금(Residual) 인상 등 작가들의 처우 개선이 주로 담겼다. 그간 넷플릭스 등 주요 OTT 기업들이 스트리밍 횟수 등 데이터를 공개하지 않아 로열티 산정이 어려웠지만 노조에겐 시청 시간 등 데이터 투명성도 강화할 예정이다.

WGA는 제작진에 지급되는 재상영분배금(해외 스트리밍)이 약 76% 증가할 것이라 봤다. 예를 들어 넷플릭스 1시간 에피소드의 경우 해외 재상영분배금이 3년 동안 1만8684달러였지만 3만2830달러로 오르게 된다. WGA는 이번 합의안에 연간 약 2억 3300만 달러 가치의 개선 사항이 포함돼 있다고 추산했다.

▲ WGA가 공개한 잠정 합의안.
▲ WGA가 공개한 잠정 합의안.

임금 인상과 더불어 한 프로젝트에 고용해야 하는 최소 인력 수도 명시됐다. 합의안에 따르면, 6부작 시리즈에는 최소 3명의 작가-제작자가 있어야 한다. 7~12부작은 5명, 13부작 이상은 6명으로 에피소드에 따라 최소 인력 수가 달라진다. 최소 인력 수 보장은 노사 간 가장 이견이 컸던 내용 중 하나로 알려졌다.

WGA는 지난 5월2일 OTT 도입 이후 업무 강도가 강해지는 동시에 임금은 줄어들었다고 주장하며 대규모 파업을 시작했다. 1988년 파업(154일)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길었던 파업(148일)으로 WGA가 의미 있는 승리를 거뒀다는 평가다. 워너브라더스 소속 작가 라토야 모건은 엑스(전 트위터)에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2023년 WGA 협상위원회는 훌륭한 일을 해냈다”고 했다.

▲ 지난 1일 나온 가디언 분석 기사.
▲ 지난 1일 나온 가디언 분석 기사.

특히 이번 파업은 AI의 업무 침범에 맞선 인류의 첫 파업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영국 가디언은 지난 1일 분석 기사에서 이번 파업이 AI를 상대로 ‘큰 승리를 거뒀다’(scored a major victory)면서 인류의 ‘창의성’을 놓고 예술가들과 로봇이 경쟁하는 시대가 왔다고 해석했다.

OTT 기업들은 효율성을 위해 AI를 창작에 활용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이에 WGA는 작가들의 창작물이 무분별하게 AI 학습 훈련에 쓰여선 안 된다고 주장하며 AI가 최종 결과물을 쓸 수 없도록 보장해달라고 요구해왔다. 이미 현장에선 AI가 만든 대본 초안을 작가들에게 수정하라고 지시하는 등 AI와 작가의 분업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번 합의안으로 AI 활용이 전면 금지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종의 ‘사용 규칙’이 생겼다. 가디언에 따르면 기존 작가가 이미 작성한 시나리오를 AI가 편집할 수 없게 됐고, 작가가 AI의 결과물을 각색하더라도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간주될 수 있도록 했다. AI의 보조 수단으로 적은 임금이 지급될 사례를 방지한 것이다. 회사가 동의하는 경우, 작가에게 AI 기술을 사용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는 내용도 있다.

MIT 경제학자 사이먼 존슨은 가디언 인터뷰에서 “작가들에겐 환상적인 승리다. 이것이 나머지 산업의 올바른 모델이 되길 바란다”며 “작가가 받는 크레딧, 보상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연구 도구로 AI를 사용할 수 있어 매우 똑똑한 결과가 나왔다. 이번 합의로 더 나은 결과물이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에 스튜디오 측도 손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 여론조사업체 갤럽이 지난 1일 공개한 8월 조사 결과에 따르면 WGA 파업에 대해 사측보다 노조를 지지한다는 의견이 72%로 더 우세했다. 사진=갤럽
▲ 여론조사업체 갤럽이 지난 1일 공개한 8월 조사 결과에 따르면 WGA 파업에 대해 사측보다 노조를 지지한다는 의견이 72%로 더 우세했다. 사진=갤럽

파업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지지도 뚜렷하다. 여론조사업체 갤럽이 지난 1일 공개한 8월 조사 결과에 따르면 WGA 파업에 대해 사측보다 노조를 지지한다는 의견이 72%로 더 우세했다. 이번 파업으로 미국 내 50억 달러(약 6조 8천억 원) 규모의 경제적 손실이 추산되지만 OTT 산업 구조의 불공정 계약과 AI 저작권 문제가 더 시급하다는 쪽에 힘이 실렸다.

작가들의 파업은 끝났지만 아직 배우들의 파업은 남아 있다. 배우·방송인 노동조합(SAG-AFTRA)도 지난 7월13일 WGA와 발맞춰 파업을 선언했다. 미국 공영라디오 NPR은 지난 2일 기사에서 “배우들과 작가들은 서로 다른 이유로 파업에 돌입했다”며 “배우 파업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빨리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배우조합은 AI로 실존적 위협을 받고 있으며 일부 배우들은 AI 사용을 위해 신체스캔을 받았다고 밝혔다.

▲ 지난6월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넷플릭스 한국지사 건물 앞에서 진행된 미국작가조합 파업지지 연대 시위. 사진=윤유경 기자.
▲ 지난6월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넷플릭스 한국지사 건물 앞에서 진행된 미국작가조합 파업지지 연대 시위. 사진=윤유경 기자.

한편 한국에서도 WGA 파업에 대한 연대 시위가 열렸다.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SGK)·웹툰작가노동조합·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작가지부·국제사무직노동조합연맹 한국협의회는 지난 6월 서울 종로구 넷플릭스 한국지사 건물 앞에서 WGA 파업 지지 연대 시위를 진행했다. 최정식 국제사무직노조연합 한국협의회 사무총장은 “어마어마한 수익을 내는 넷플릭스 등 OTT 업체가 작가, 창작자, 노동자들의 보상은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반드시 이 부분을 현실화시키고 정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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