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오펜하이머’의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기대를 품고 관람한 ‘오펜하이머’가 좀 아쉬웠던 입장이라면, 그럴 만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오펜하이머’는 그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연출한 작품과는 장르가 전혀 다르다. ‘메멘토’(2001), ‘인셉션’(2010), ‘인터스텔라’(2014), ‘덩케르크’(2017) 등 감독의 대표작은 시공간을 왜곡하고 뒤트는 콘셉트를 주재료 삼아 시각적 볼거리를 극대화한 장르성 짙은 영화다. 반면 ‘오펜하이머’는 핵폭탄을 개발한 과학자의 성취와 고뇌에 집중하는 전기 영화다. 책으로 비교하면 상상력에 제한이 없던 휘황찬란한 SF소설을 주로 쓰던 작가가 실존 인물을 토대로 사실에 입각한 고상한 평전을 쓴 셈이다.

▲ 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
▲ 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

장르에 우열은 없지만, ‘예상과 다르다’는 건 관객 만족도를 좌우하는 중요 요소가 된다. 고기반찬을 원했던 관객이 채식 식단을 마주할 때의 당혹스러움이 있듯, SF 장르 특유의 환상적인 볼거리를 예상한 관객이 시간과 돈을 들여 영화관을 찾은 뒤 정적인 드라마로 가득 찬 영화를 보고 나오는 일은 아쉬움을 남기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오펜하이머’는 ‘IMAX 전용 카메라로 촬영한 데다가 최초로 흑백 분량까지 들어있다’는 점을 들어 ‘볼거리’를 강조한 마케팅을 진행한 만큼, 인물의 생애와 심리상태에 집중한 본 내용을 접한 관객이 애매모호한 관람평을 남기게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평범한 관객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에게 가장 기대하는 건 시공간을 뒤튼 특유의 장르적 세계관일 것이다. 이를 통해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한다는 점에서 관객은 그를 ‘천재’이자 ‘거장’으로 불러왔다. 25년 전 연출한 단편 ‘두들버그’(Doodlebug, 1997)가 ‘벌레를 때려잡는 나’와 ‘그런 나를 벌레처럼 때려잡는 또 다른 나’를 등장시켜 시공간을 광범위하게 확장하고 존재에 대해 철학적으로 접근했다면, 데뷔작 ‘메멘토’는 이 역량을 극대화한 작품이다. 시간을 역순으로 흐르게 하는 혁신적인 왜곡은 관객이 전에 없던 방식으로 사건의 단서를 찾고 진실을 유추하도록 했다. 상업자본의 지원을 받아 큰 흥행에 성공한 ‘인셉션’, ‘인터스텔라’, ‘덩케르크’와 같은 작품이든 ‘지나치게 어렵다’는 혹평을 받은 ‘테넷’(2020)이든, 모두 시공간을 ‘가지고 노는’ 일관적인 개성으로 뭇 관객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 영화 '오펜하이머' 스틸컷
▲ 영화 '오펜하이머' 스틸컷

‘오펜하이머’에도 시공간을 오가는 설정은 있다. 다만 이번에는 시공간의 뒤틀림이라는 테마 자체로 장르적 재미나 심리적 긴박감을 주기보다는, 한 인물의 지난 삶을 지루하지 않게 보여주려는 복잡한 플래시백(과거 회상) 형태로 활용했다. 영화는 오펜하이머의 오래전 과거(핵폭탄 개발), 최근 과거(비공개 청문회), 비교적 현재(스트로스 제독의 인사청문회)로 구성을 나누고 시간을 뒤섞었고, 이는 전형적인 전기 영화의 병렬적 구조를 탈피하려는 시도다.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영화를 관객이 끝까지 쫓아오도록 일종의 기술을 발휘한 셈이다.

물론 기대와는 다른 구성이나 전개일지라도, ‘오펜하이머’를 한 편의 인물 중심 드라마로 분류해본다면 주인공이 얼마나 복잡하고 심오한 사람이었는지를 묘사하는 데에는 성공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는 일반적인 도덕관념으로는 규정할 수 없는 인간관계와 결혼 생활을 지속한 사람이다. 동시에 전범국인 나치 독일보다 더 빠르게 핵폭탄을 만들어 평화를 끌어내고자 분투했던 과학자이고, 반공주의 광풍과 국가주의 앞에서 고초를 겪은 자유시민이자, 자신이 개발한 핵폭발이 세계에 미칠 여파에 고뇌했던 한 분야의 선구자다. 일단 영화를 보고 나면 주인공 삶의 질곡을 충분히 가늠하고 반추해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의아한 지점은 여전히 존재한다. 스트로스 제독(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에 얽힌 반전을 드러내는 후반부에서 주요 인물의 행동 동기를 대사로 설명하는 경우가 특히 그렇다. 극 내내 별 존재감이 없던 데이비드 힐 박사(라미 말렉)가 돌연 나타나 ‘제독은 모욕감을 느껴 오펜하이머에게 앙심을 품은 것’이라고 콕 짚어 설명하거나, 급작스럽게 전개되는 반전 상황을 지켜보던 보좌관이 ‘옳은 일을 하려 했을 것’이라는 대사로 데이비드 힐 박사의 행동을 정당화해 주는 식이다. 3시간이라는 넘치는 분량을 확보하고도 ‘영상으로 보여주기’를 넘어 ‘대사로 설명하기’를 택한 몇몇 지점은 영화적이기보단 차라리 소설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대목이다.

▲ 영화 '오펜하이머' 스틸컷
▲ 영화 '오펜하이머' 스틸컷

‘굳이 IMAX로 보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건 아마 작품의 이런 특성 때문일 수 있다. 특히 핵폭탄 실험 성공 이후 분량은 비좁은 실내에서 벌어지는 청문회 비중이 절대적이다. 움직임 없는 가구가 화면 대부분을 채우고 동선 없이 대사로만 연기하는 배우 얼굴이 전면에 배치된다. 화면 모서리에서도 포탄이 튀는 ‘덩케르크’같은 작품은 일반 상영관에서는 잘려 나가 보이지 않는 시각 정보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IMAX관 관람이 필수적이지만, ‘오펜하이머’의 경우에는 그 효용이 크지 않을 수 있는 이유다. 모처럼 영화관에서 본 기대작 ‘오펜하이머’가 성에 차지 않았다면, 아마 이런 이유들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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