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개봉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두고 난해한 작품이라는 혹평이 이어진다.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이 통상 그렇듯 이번에도 이야기 개연성보다는 정서적인 감흥을 극대화하는 환상적인 모험에 방점을 뒀는데, 전하려는 말이 뜬구름 잡듯 추상적인 데다가 그 전개가 요즘 정서와는 맞지 않는 대목이 있어 관객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930년대 일본, 군수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 덕에 유복하게 자라온 주인공 소년 ‘마히토’는 큰 화재로 어머니를 잃어 슬픈 날을 보내고 있다. 이모 ‘나츠코’는 아버지와 재혼해 동생을 임신한 상태. 마음 둘 데 없이 쓸쓸하고 괴롭기만 하던 소년은 우연히 신비한 탑의 존재를 알게 되고, 이 탑 안에 죽은 엄마가 살아있다는 괴소문을 듣게 된다. 이모 겸 새엄마가 된 ‘나츠코’마저 이 탑 안에 갇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소년은 이들을 구하기 위한 모험에 나선다. 

▲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스틸컷
▲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스틸컷

‘아이를 지켜줄 부모가 없다’는 설정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이웃집 토토로>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시절부터 공유돼 온 특성이다. 이 결핍은 주인공이 모험에 뛰어드는 ‘동기’로 기능한다. <이웃집 토토로>의 주인공 언니 ‘사츠키’는 어머니가 아파 집을 비우는 동안 어린 동생을 챙겨야 하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소녀 ’센’(치히로)은 낯선 세계의 볼모로 잡혀있는 탐욕스런 부모를 구출해야 한다. 가족을 지키거나 구해야 한다는 이들의 목적은 보편적으로 납득되기에,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동화적인 판타지가 일종의 성장과 치유의 역할을 하게 되는 이후의 흐름도 나름의 설득력을 갖춘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주인공이 사고로 어머니를 잃었다는 설정도 바로 이런 결핍과 모험 동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모와 재혼했다’는 뜨악한 설정이 뒤따르면서 관객의 감정이 혼란에 빠진다. ‘형부-처제’ 관계가 당대 일본에서는 무리 없는 설정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문명화된 세계를 살아가는 요즘 관객으로서는 거북함을 느낄만한 찜찜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극 중 아버지와 이모의 애정 신을 목격하는 주인공의 불편감을 관객도 고스란히 느끼게 된다.

이 찜찜함은 주인공 ‘마히토’ 모험 과정의 설득력마저 슬쩍 떨어트린다. 이모 겸 새엄마를 꺼림칙하게 느끼던 주인공이 별다른 계기 없이 상대를 ‘나츠코 엄마’라고 부르며 애틋한 마음을 갖게 되는 까닭이다. 모험 도중 ‘나츠코 엄마’에 대해 관한 새로운 정보나 반전이 드러난 것도 아니라서, 관객은 이 심경 변화를 납득할 만한 합당한 단서를 찾기 어렵다. 감독이 주인공의 모험으로 강조하려는 메시지가 ‘강력한 가족애’인지 ‘주어진 환경을 수용하는 태도’인지 혹은 그 외의 무언가인지 불분명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대목이다.

자기만의 철학에 빠진 주변 캐릭터들 역시 작품을 제대로 즐기기 어렵게 하는 또 하나의 장벽이다. 신비한 탑 내부 세계를 지탱해 왔다는 큰아버지는 웬 돌 조각을 건네며 ‘악의 없이 사는 삶’을 강조하고, 탑 세계를 주도하던 새들의 왕은 주인공의 규칙 위반을 강경하게 처벌하겠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작품의 굵직한 맥락은 소년과 그 주변 관계가 얽혀 구축하는 성장담일 텐데, 이 캐릭터들은 그와는 별 상관없어 보이는 자신들만의 인생관에 집중한다. 관객으로서는 맥락 없는 이야기가 중구난방 펼쳐진다는 인상을 떨치기 어렵다.

▲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포스터
▲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포스터

이 작품을 그런저런 비평 없이 ‘통 크게’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삶의 슬픔과 기쁨을 모두 맛본 뒤 지난 시간의 태도를 관조하는 82세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라는 ‘버프’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작품은 이런 식으로 요약될 수도 있다. ‘비록 주인공 소년이 받아들이기에는 가혹한 환경이지만, 주어진 여건을 탓하며 못난 마음을 먹기보단 무엇이든 성장의 밑거름으로 받아들이는 게 나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해도 틀린 데는 없다. 다만 그 생각을 펼치는 과정에 관객이 얼마나 공감하고 감화됐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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