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거미집’의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상투적인 사랑 얘기나 찍는 그저 그런 영화감독이라는 평판에 눈에 띄게 자존감을 잃어가던 김감독(송강호)은 이번만큼은 결단코 걸작을 만들어 내겠다고 다짐한다. 조건은 하나, 이미 끝마친 작품의 결말부를 다시 찍는 것! 마무리만 바꾸면 엄청난 작품이 완성될 거라는 망상에 사로잡힌 그는 제작자(장영남)의 단호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케줄 바쁜 배우들을 몰래 불러 모으기에 이른다. 그러나 콧대 높은 배우들은 갑자기 바뀐 난해한 내용이 이해되지 않는다며 투덜대고, 사전 허가도 받지 않은 채 바뀐 내용을 재촬영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검열 당국 공무원까지 촬영장에 들이닥친다.

▲ 영화 '거미집' 스틸컷
▲ 영화 '거미집' 스틸컷

1970년대 한국 영화계를 배경으로 한 ‘거미집’은 걸작을 찍으려는 김감독과 서로 다른 입장을 지닌 제작자, 배우, 공무원 등 무수한 출연진이 얽히고설키는 소동극이다. 고전영화 시절 배우의 과장된 발성과 연기를 준수하게 재현하는 임수정과 오정세, 도회적인 미모에 까칠한 성격을 지닌 신인배우 이미지에 꼭 들어맞는 정수정, 카리스마 있는 베테랑 연기자로 극의 중심을 잡는 박정수, 재촬영이 진행되도록 상황을 주무르는 신인 제작자 역의 전여빈 등 캐릭터의 색깔을 또렷하게 살리는 이들의 연기 앙상블이 톡톡한 재미를 안긴다. 중심 인물인 송강호가 이들의 조화에 자연스레 안겨 들어가 1/n정도의 공평한 역할 정도만을 수행한다는 인상을 줄 정도로, 전체 출연진의 연기가 고르게 좋은 편이다.

‘영화적’이라고 평가할 만한 볼거리도 빼놓을 수 없다. 흑백으로 시작해 컬러로 자주 전환되는 유려한 영상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흑백은 김감독이 새롭게 촬영하려는 극중 영화 속 시점을, 컬러는 김감독의 촬영장에서 벌어지는 현재의 사건을 나타낸다. 서로 다른 시공간의 이야기를 매끄럽게 오가는 덕에 ‘거미집’의 만듦새는 한층 입체적인 형태를 갖춘다. 오마주 장면의 원작을 떠올려보는 재미도 적지 않다. 계단 시퀀스는 김기영 감독의 ‘하녀’, 임수정의 싸이코 살인마 연기 장면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샤이닝’ 자장 안에서 완성된 감이 크다. 극중 김감독이 내내 운운하던 플랑 세캉스(롱테이크) 기법이 기어코 시연된 뒤, 관객은 두 눈으로 그 결과물을 확인하는 기회까지 얻는다. 일종의 ‘떡밥’처럼 던져둔 개념을 마지막에 들어 정확하게 회수하는 연출로 영화 애호가들의 지지를 받기에 충분한 대목이다.

▲ 영화 '거미집' 스틸컷
▲ 영화 '거미집' 스틸컷

그럼에도 이 작품을 ‘영화 만드는 일에 대한 헌사’정도로만 해석하는 건 지극히 납작한 접근이 될 것이다. ‘거미집’의 감정적 정점이 제작자와 김감독이 과거 어떤 공간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장면에서 비로소 성사되기 때문이다. 오래 전 한 영화 촬영장에서 무리한 현장 진행으로 큰 불이 났을 때, 한 여인은 영화사 금고에 모아둔 돈을 차지하기 위해 달려갔고 한 조연출은 영화사 서랍에 숨겨진 시나리오를 확보하기 위해 뛰어갔다. 안전사고로 정신없던 현장의 빈틈을 타 자신에게 이득이 될 무언가를 훔치는 데 여념 없던 두 사람은 우연히 서로를 목격하는데, 그게 바로 현재의 영화 제작자(장영남)와 김감독(송강호)이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타인에게 인간적인 약점을 들킨 순간의 뜨악함과 당황스러움, 수치심을 명백히 기억하면서도 짐짓 모른 체 지금에 이른 이들이 완성한 작품은 과연 어떤 의미인가.

▲ 영화 '거미집' 포스터
▲ 영화 '거미집' 포스터

아니나 다를까. 김감독의 재촬영 현장에서도 큰 화재가 발생한다. 그리고 오래 전 한 촬영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인명사고가 우려됨에도 ‘진짜 같은 촬영’을 위해 카메라는 멈추지 않는다.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 앙상블, 유려하게 빚어진 영화적 볼거리, 영화 애호가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연출로 초중반을 꽉 채운 ‘거미집’을 흥미롭게 음미하던 관객이 처음에는 미처 예상치 못했던 작품 본연의 목적을 가늠하게 되는 것도, 이즈음이다. 무슨 일을 감수하더라도 걸작을 만들어 내겠다는 한 영화감독의 광기에 가까운 집착이 주변 사람을 소진시키고 자신의 인간성까지 크게 훼손할 때, 누군가는 기억 한편에 조용히 감춰뒀던 모종의 장면을 떠올리게 될지 모른다. 열망이 도덕의 선을 훌쩍 뛰어넘는 순간들. 아마 그것은 비단 영화를 창작하는 일에 종사하는 이들만이 감추고 있는 치부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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