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 70년이 되는 오늘날 한반도는 6·25 전쟁 직전의 상황보다 훨씬 전쟁위기감이 높고 실제 미래의 전쟁을 위해 한미일, 북중러 군사협력체제가 강화되고 있다. 미국이 중국 포위, 압박 전략을 군사, 경제 등 전방위적으로 강화하면서 동북아의 신냉전 파고가 높아지고 있다.

세계 최장의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전환되어야 하지만 그럴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대신 국내 일부 대중매체는 6·25에 참전한 외국인들의 영웅담과 함께 그들이 오늘날 한국의 발전을 닦는데 기여했다는 점, 국내산 무기가 세계 시장에서 호평 받고 새 국산무기가 개발되고 있다는 점, 이승만의 공덕을 기려야 한다는 수구인사들의 발언을 크게 보도하고 있다.

6·25 전쟁 이전 남북한군이 38도선 부근에서 끊임없는 총격전을 벌이는 상황이었지만 김일성이 쉽게 남한을 점령, 적화 통일할 수 있다는 오판을 한 점이 먼저 지적되어야 한다. 동시에 이승만은 집권 후 국방력이 북한에 비해 열세인 상태에서 무력에 의한 북진통일을 앞세우다가 6·25 전쟁을 맞았다. 민족상쟁의 비극이 벌어지면서 미국이 유엔기를 앞세워 다국적군을 만들어 참전하면서 한국전은 국제전 성격으로 비화했다.

이어 중공군 60~70만 명이 참전하자 미국은 확전을 자제하고 정전협정을 추진하려 할 때 이승만은 맥아더 장군의 중국 공격 주장에 적극 찬성했다. 동시에 정전협정 체결에 반대하기 위해 군국 단독 북진 주장, 반공포로 일방적 석방 등으로 저항했다(https://en.wikipedia.org/wiki/Syngman_Rhee).

이승만은 정전협정 대신 미국의 한반도 전쟁 자동개입 조항이 포함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고집했지만 그런 조항은 포함시키지 못하고 주한미군에게 특권을 주는 식의 불평등 조약이 만들어지게 만들어 한국의 군사적 자주권을 외세에 철저하게 예속시키는 우를 범했다. 그는 국가안보를 철저하게 미국에 의존하면서 국방 자주권은 철저하게 외면했다.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해 주한미군의 한국 주둔을 ‘권리’로 인정받아 각종 특권을 누리면서 동북아 방어 전략에 활용하는 실속을 챙겼다. 미국은 이승만의 북진무력통일론을 경계해 한국군 작전 지휘권을 유엔사령관이 장악하게 만들고 한국군의 국방자주권 확립을 원천 봉쇄하는 장치를 만들었다.

▲ 2010년 7월19일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우남 이승만 박사 45주기 추도식'에서 참석자들이 분향후 고개숙여 묵념하고 있다. ⓒ 연합뉴스
▲ 2010년 7월19일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우남 이승만 박사 45주기 추도식'에서 참석자들이 분향후 고개숙여 묵념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승만 맥아더 해임에 크게 실망, 영국 등에 독설 퍼부어

이승만은 6·25 전쟁이 발생하자 서울 사수 라디오 방송을 한 뒤 미 군사고문단에 사전에 통고하지 않은 채 정부각료들과 함께 서울을 탈출하고 한강다리가 폭파되게 만들었다. 당시 이승만은 북한 동조세력의 거사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고 변명했으나 그 후에도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증오와 전쟁 공포증은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 수차 언급되고 한국군 단독의 북진무력통일론으로 표출됐다.

이승만은 전쟁 발생 후 전국 군과 경찰에 좌익세력 학살을 지시했고 1951년 봄 맥아더 장군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해임 당하자 이 대통령은 크게 실망해 맥아더 낙마에 책임이 있다고 알려진 영국, 호주, 캐나다 군을 향해 공개적으로 ‘한반도를 통일시키려는 맥아더의 노력을 훼방했으니 이제 한반도 전선에서 떠나라’라는 내용의 독설을 퍼부었다. 이 대통령은 소련과의 핵전쟁을 감수해서라도 중국에 대해 전면전을 펴야 한반도가 통일된다는 맥아더 장군의 전략을 전적으로 신뢰한 나머지 분노한 것이다(Hastings, Max (1988). The Korean War. Simon and Schuster. pp. 32–34. ISBN 9780671668341. p. 235).

미국의 정전협정 타결 강조에 이승만 ‘중국과 북한에 남한 괴멸될 것’ 주장

아이젠하워는 1952년 대선을 앞두고 있어 이승만의 정전협정 반대는 재선에 큰 악재가 될 것으로 판단했다.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켜야 했고 대통령에 당선된 뒤인 1952년 12월 한국을 방문해 정전협정 타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Sasangch’oyuŭi Kwibin” [The Unprecedented VIP], December 7, 1953. Dong-A Daily).

1953년 4월 9일 정전협정 타결이 임박한 시점에서 이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정전협정이 타결된다면 미국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한다. 한국군은 휴전협상을 하기보다 독자적으로 싸우겠다.”고 밝혔다. 미국은 정전협정을 조속히 타결 짓기 위해 핵무기로 중국과 북한을 위협할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의 최후통첩을 받고 경악했다.

아이젠하워는 1953년 4월23일 이 대통령에게 보낸 답서에서 “이 대통령의 친서를 받고 크게 불편했다. 이 대통령의 태도는 한반도에서의 적대행위를 끝내려는 미국의 노력을 심각하게 방해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1953년 5월30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낸 답신을 통해 정전협정에 반대한다는 자신의 의지를 강조하면서도 정전협정 수용 조건을 제시, 중공군이 한반도에 잔류해서는 절대 안 되며, 한미 간에 정전협정 발효 이전에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 정전협정 발효 후 미국은 한국이 침략을 받으면 즉각 군사적 지원과 원조를 해야 하고 미군 없이 한국군이 독자적 방위능력을 갖추도록 충분한 무기 지원을 하고 적의 재침을 막기 위해 미 해군과 공군을 잔류시켜야 한다는 것 등을 강조했다.

이승만은 이 답신에서 중공군이 한반도에 계속 잔류하게 되면 한국은 사형선고를 받는 것과 다를 바 없다면서 주한미군이 떠나게 되면 중국과 북한에 의해 남한이 괴멸된다는 주장을 폈다.

이런 태도는 주권국 원수로서 50만 명의 국군이 전투중이고 미국이 정전협정이후 한국군에 대한 지원 등을 약속한 것을 감안할 때 납득하기 어려운 태도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과도한 전쟁 공포증이나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 적대감을 지니게 된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될 수 있는 부분이다.

이승만의 답신을 본 아이젠하워는 한국과 방위조약을 필리핀, 호주 등과 유사한 형태로 맺을 방침을 고려중이었기 때문에 이승만의 제안을 수용 가능한 것으로 판단했다.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이 반공포로를 석방하기 6일 전인 1953년 6월6일 이승만에게 보낸 서한에서 ‘본인은 이 대통령이 정전협정에 동의하는 연장선상에서 방위조약을 체결할 의향이 있다, 미국이 아시아판 북대서양조약기구와 같은 집단 안보체제를 만들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아이젠하워의 이런 언급은 미국이 아시아판 집단안보 체제에 소극적이었지만 이승만이 1948년부터 집단안보체제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Ch’oe, Yŏng Ho. 1999. “Yi Sŭnngman chŏngbu ŭi t’aepyŏngyangdongmang kusang kwaasiapangongyŏnmaeng kyŏlsŏng” [Syngman Rhee Administration’s Plan for PacificAlliance and Anti-Communist Asian Alliance]. Kukjejŏngch’I nonch’ong 39(2): 165-182). 아이젠하워는 그러나 이승만이 요구한 미국의 자동개입 조항이 들어가 있는 방위조약은 미국의 헌법체계에서는 의회의 동의가 필요하다면서 수용하기 어렵다는 점을 밝혔다. 아이젠하워는 6월 13일 이승만에게 워싱턴을 방문해 기밀사항을 협의하자고 제안했다.

이승만 ‘정전협정 타결되면 한국 생존 고민 공포에 사로잡힐 것’ 거듭 주장

이승만은 자신이 독자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하기 하루 전 날인 1953년 6월17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정전협정이 타결되면 한국은 생존을 고민해야 할 공포에 사로잡혀야 하는데 이런 사태에 무기력한 나 자신이 실망스럽다. 6·25 전쟁 발생 첫해에는 미국과 유엔이 통일된 독립 한국의 설립과 침략자에 대한 응징을 다짐했었지만 그 후 공산군이 더 강한 것으로 보이자 유엔군은 이 전쟁은 한반도 통일과 무관하다고 말을 바꿨다. 본인은 한국이 정전협정을 수용하는 대가로 미국이 한국에 제공하려는 지원은 거부한다. 그 이유는 정전협정은 남한에 치명적인 타격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 해도 그 효과가 의심스럽고 무력한 상태로 그 의미가 축소될 것으로 우려된다. 유엔과 공산주의자가 정전협정을 맺는다는 것은 적들이 서로 손을 잡는 것과 같을 것이다. 본인은 미 대통령이 이 중차대한 시기에 대처한 처방을 내놓을 리더십을 발휘하기를 희망한다.”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에게 서한을 발송한 다음날인 6월 18일 유엔군 사령관의 통제를 받는 한국군 헌병대에게 반공포로를 석방하도록 명령했다. 이 날은 유엔군과 북한군, 중공군이 정전협정에 합의하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이 대통령의 돌발적 행동은 공산군 측이 볼 때 유엔군이 사전합의를 위반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어 정전협정 추진이 중단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의 행동에 격노해서 6월19일 “이 대통령의 행동은 전쟁 포로 문제는 유엔사령관의 관할이라는 점에서 유엔군의 권위에 대한 공격행위”라며 “이 대통령이 유엔사의 권위를 즉각 수용하지 않을 경우 모종의 조치가 필요하고 유엔 사령관이 그에 대처할 권한을 위임받았다”고 밝혔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모종의 조치가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는데 이는 이 대통령이 미 대통령의 정전계획 추진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로 해석되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학계에서 미 대통령이 이 대통령을 제거하기 위한 ‘에버레디 작전(Operation Everready)’도 포함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아이젠하워. 사진=위키피디아
▲ 아이젠하워. 사진=위키피디아

미 행정부, 이승만 제거 계획 상세한 부분까지 준비

미 행정부는 이승만이 독자적인 ‘북진 통일’을 실천하는 등 돌출행동을 할 경우 등을 우려해 극약처방을 내렸다. 미국은 1953년 중반 이승만이 정전협정 내용에 반대하거나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할 경우 미국이 제거한다는 비밀계획인 ‘에버레디 작전’을 만들었다(https://www.washingtonpost.com/archive/politics/1977/12/17/us-had-53-plan-to-overthrow-unreliable-korean-ally/53816fa5-c677-4d57-964c-09edd8605c42/).

미국은 이 작전을 수행하지는 않았으나 1953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정전협정에 반대할 경우에 대비해 만든 3가지 대처 방안가운데 하나였다. 다른 두 방안은 이 대통령이 강하게 주장했던 미군 철수 등이 포함된 한미간 안보조약을 협의하는 것이었다. 결국 미국이 최종 채택한 방안은 주한 미군의 주둔이 포함된 방위조약을 협의하는 내용이었다.

미국이 이승만을 제거하려 했던 비밀계회 에버레디 작전이 실행되지 않은 것은 강력한 반공주의자인 이승만을 제거할 경우 대체할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주한미군 및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장군은 1953년 중반 이 대통령이 한국군을 유엔군 휘하에서 철수하려 위협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비밀 작전을 만들라는 지시를 미 합동참모본부로부터 받았다. 당시 한국군은 전체 유엔군의 60%에 달했다.

클라크 장군이 1953년 5월4일 작성한 비밀작전 계획은 한국군이 유엔군에 적대적 행동을 할 것을 상정해 유엔의 이름으로 계엄령을 선포해 정전협정에 반대하는 민간인과 군인을 체포하고 유엔군의 이름으로 군사정부를 만드는 것 등이 포함됐다. 이 작전은 클라크 장군이 미 육군부에 보낸 날짜 미상의 비망록에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 본인은 본인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방해하는 한국군의 광범위한 명령불복종 사태가 발생할 경우 행동을 취할 준비가 되어 있다. 적절한 시점이 되면 미군 사령관이 부산 지역으로 이동해 이승만 독재정치를 지지하는 핵심적 한국군 장교 5~10명을 체포하고 한국군 총사령관의 명의로 선포된 계엄령에 대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

그렇게 한 뒤 이승만 대통령에게 계엄령 해제에 동의하도록 만들 것이다. 그리고 국회가 자유롭게 입법 활동을 하게하고 한국군의 통제를 받는 한국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도록 만들 것이다. 만약 이 대통령이 그런 요구에 불응할 경우 독방에 감금될 것이며 유사한 조치를 장택상 총리가 취하도록 만들 것이다. --

1953년 중반 이 대통령은 정전협정을 반대하면서 미군이 계속 싸울 것과 북한과 중공군포로 14만 명의 강제송환을 촉구하는 북한의 요구에 반대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들 포로 가운데 2만 명은 이승만의 일방적 석방조치로 남한과 대만에 남아있게 되었다.

클라크 장군은 미 언론이 수십 년 전에 추진했던 이 작전에 대한 소회를  묻자 “미국은 그 작전을 심각하게 고려했었다. 그러나 그 작전은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는데 만약 실행되었다면 이 대통령이 완강한 인물이고 한국인이 그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행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승만 반공포로 일방적 석방, 정전협정 파탄 노렸으나 빗나가

아이젠하워는 반공포로가 석방된 일주일 뒤 1953년 6월25일 한국에 미 국무부 차관을 특사로 보내 이 대통령을 압박해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유엔 사령관에게 넘기도록 만들었다. 이후 이 대통령은 1953년 7월11일 미국 쪽에 서신을 보내 정전협정을 통한 정치적 해결 방안에 동의하고 협조할 의향을 밝혔다.

이 대통령은 그러나 정접협정이 평화협정으로 전환되지 못할 경우 자신의 북진통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군사분계선을 돌파할 계획이며 미국은 이에 동의해야 할 것이라는 점을 미 국무장관에게 통고하고 자신이 정전협정에 동의한 것에 대한 미국 측은 방위조약 타결에 응하라고 촉구했다.

이승만은 정전협정을 파탄 낼 목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해 버린 것에 대해 중국과 북한은 격렬하게 항의했을 뿐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기로 미국과 합의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타결되었다(Cha, Victor D (Winter 2010). "Powerplay: Origins of the U.S. Alliance System in Asia". International Security. MIT Press Journals. 34 (3): p. 174. doi:10.1162/isec.2010.34.3.158. S2CID 57566528). 당시 중국, 북한, 미국 모두 정전협정을 타결을 원하면서 사태 악화를 원치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정전협정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경제원조와 한국군 20개 사단 증강 지원 등을 미국에 요구했다. 정전협정 타결 시에는 한국군이 50만 명에 달해 자주국방을 추진할 최소 규모로 볼 수도 있었는데도 이승만은 공산군의 재침 시 한국군이 궤멸될 것이라고  미 대통령에게 언급하는 등 강한 위기의식을 들어냈다.

미국은 막대한 원조를 약속했지만 이승만은 이를 거부하면서 미국이 한반도 유사시 즉각 개입하는 조항을 담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만을 고집했다. 미국은 상호방위조약 추진 협상을 통해 ‘한국이 무력침략을 받을 경우, 미군의 즉각 개입’이라는 부분을  제외하고 이 대통령이 요구한 사항 대부분 수용해 1953년 8월 한미 간에 이 조약이 가조인되었다.

▲ 1953년 7월 휴전협정을 조인하는 유엔군 사령관과 북한 측 대표. 사진=위키피디아
▲ 1953년 7월 휴전협정을 조인하는 유엔군 사령관과 북한 측 대표. 사진=위키피디아

미국 ‘이 대통령 북진통일 추진 시 미군과 유엔군에 강력 저지될 것’ 경고

1953년 11월 4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이 대통령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개되도록 일방적으로 행동할 경우 본인은 미 상원에 상호방위조약이 평화와 상호 안보를 보장할 것이라고 확인해 줄 수 없다. 그리고 만약 이 대통령이 단독으로 북한 공격을 결정할 경우 그것은 한국군을 비참한 패배로 몰아넣으면서 효율적인 국방력을 영원히 상실하게 만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아이젠하워가 이 대통령에게 강력 경고한 이유는 △미국이 정전협정 대가로 약속한 원조물자가 처음 부산항에 도착한 1953년 8월29일 이 대통령이 ‘한국군은 유엔군의 도움 없이 단독으로 북진할 것’이라고 공개 언급했다(“T’ongilwihan t’ujaengŭn pulp’ogi” [Never Give Up the Struggle for Unification], August 31, 1953. Dong-A Daily). 

이어 △한국 내에서 정전협정에 규정된 ‘3개월 이내에 평화협상 대체’ 조항이 이행되지 못할 경우 북한에 대한 공격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주장이 다양하게 전개된 것을 겨냥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Chŏngch’ihoedam kyŏlryŏlsi pukjinppun” [Only One Solution is Marching North if the Political Conference is failed], September 30, 1953 Dong-A Daily).

정전협정 제4조 60항은 정전협정이 조인되어 효력을 가진 뒤 3개월 안에 한반도로부터의 외국군 철수와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을 토의할 고위정치회담을 열도록 건의하도록 기재되어 있었다.

한미 간에 방위조약 타결 등을 위해 닉슨 미 부통령이 1953년 11월13일 방한해 이 대통령과 협상을 벌였지만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제네바에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정치협상이 열리기 50일 전인 1954년 3월11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한국군의 단독 북진통일을 다시 주장했다.

이승만 집권 말까지 무력에 의한 북진통일 주장, 미국 경계

아이젠하워는 1954년 3월 21일 이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이 대통령이 자신의 계획대로 추진할 경우 미군과 유엔군에 의해 강력 저지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미국은 한국군을 강한 군대로 만들기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으며 한국이 제네바 정치회의에 대표를 파견해 줄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굽히지 않았고 1954년 7월 미 국무장관 덜레스에게 보낸 서한에서 자신의 북진통일 계획이 점차 구체화되고 있으며 두만강까지 별 힘들이지 않고 진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두 나라 사이에 긴장이 높아지자 아이젠하워 정부는 1954년 이승만 제거 계획을 다시 추진했다(Hong, Suk-ryul. 1994. “Hanguk Chŏnchaeng Chikhu Mikukŭi Yisŭngman Chekŏkyehoek,” Yŏkbi [Critical Review of History], 28: 138-169).

이 대통령은 그 후 미국 정부가 추진하는 정전협정 정치회의를 반대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1954년 제네바 회의에 한국 대표단을 파견했지만 평화협정 타결이 안 될 경우 유엔 기치아래 평화적인 해결보다 군사작전에 비중을 두는 태도를 고집했다.

이승만은 1956년 11월 에도 북진통일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개성, 웅진반도, 한강 북부 지역 등 3곳을 수복할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집권 말기까지 지속됐다. 그는 4·19혁명으로 하야하기 6개월 전인 1959년 10월까지 북진통일론을 미국 측에 설파했고, 이로 인해 미국의 심각한 경계 대상이 되었다.

이는 1959년 10월 방한한 미국 국무부 부장관 더글러스 딜런이 이승만 대통령과 회담하고 이틀 뒤인 10월25일 미국 국무부 앞으로 타전한 기밀문서에서 밝혀졌다. 딜런 부장관은 이 대통령이 “통일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무력뿐이라는 신념을 표현했다”고 기록했다(주간조선 2020년 7월21일).

▲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서명하는 일본 요시다 시게루 총리. 사진=위키피디아
▲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서명하는 일본 요시다 시게루 총리. 사진=위키피디아

 

이승만, 자주국방 외면 외세 의존 몰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외면

이승만은 집권 기간 동안 정부 관리들이 광범위하게 연루된 부정부패가 만연한 상태에서 공산주의자에 대한 증오와 공포를 앞세워 미국의 군사적 보호망아래 안주하는 방안만을 앞세웠을 뿐 자주 국방은 외면했다. 그는 미국에서 오랜 세월 독립운동을 하면서 강대국이 어떻게 제국주의적 이기주의에 사로잡히는가를 뼈아프게 경험했는데도 미국이 남한의 국방안보를 책임질 것만을 요구하거나 국군 단독으로 북침을 통한 무력 통일만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집권 연장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독재자의 길을 걸으면서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조봉암을 사법 살인하는 등 비폭력적 방식의 통일론을 원천봉쇄했다. 이승만은 미소가 벌인 냉전시대의 심각한 대립구도 속에서 2분법 논리로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식의 정치를 앞세워 국가보안법으로 사상의 자유까지 탄압하고  제주 4·3, 여순사건 등은 물론 6·25 전쟁 발발 직후 사상범으로 지목된 양민의 집단학살 등을 자행했다.

이승만은 6·25 전쟁 과정에서 국군 병력이 50~60만 명 수준에 달하자 유엔군 통제를 벗어나 단독 북진하겠다면서 정전협정을 무산시키려 지속적으로 노력했고 그것이 좌절되자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미국에 요구했다. 하지만 미국의 한반도 전쟁 자동 개입 장치를 만드는데 실패하고 미군의 남한 주둔에 특혜를 베풀어 한국군의 군사적 자주권을 스스로 내팽개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미국이 일본을 위해 남한을 철저히 짓밟고 희생양으로 삼는데도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기록은 찾기 힘들다. 일본으로부터 40년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충분히 받을 경우 경제 발전과 자주 국방 확립이 가능한 측면도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이승만은 자신의 집권을 위해 야당 탄압, 사사오입 개헌과 같은 비정상적인 방식에 매달리고 부정선거가 자행될 여건을 방치했다가 4.19 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나 망명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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