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과정에서도 회사 측 증인의 위증과 이재학 PD에게 유리한 진술을 해준 이들에 대한 진술번복 압박, 자료 제출 거부와 진실 왜곡 등이 이재학 PD에게 지속적인 고통으로 다가왔다. (…) 이재학 PD의 죽음의 원인은 (청주방송이) 부당해고를 하고 소송 과정에서 진실을 왜곡하는 등 위법·부당한 행태로 일관하여 결국 이재학 PD를 패소에 이르게 한 것에 있다.”

CJB청주방송 고 이재학 PD 사망사건 진상조사위원회(진상조사위)는 청주방송과 부당해고로 다투다 숨진 이재학 PD의 사망 원인을 이같이 결론 내렸다. 청주방송이 이재학 PD와 함께 일한 직원들을 동원해, 그가 15년 간 노동자로 일해온 흔적을 조직적으로 지운 행태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는 것이다.

▲2020년 6월 발행된 CJB청주방송 고 이재학 PD 사망사건 진상조사 보고서.
▲2020년 6월 발행된 CJB청주방송 고 이재학 PD 사망사건 진상조사 보고서.

이재학 PD가 ‘억울함을 풀어달라’며 숨진 지 3년, 그의 사건을 진상조사한 보고서가 나온 지 2년여가 지났지만, ‘무늬만 프리랜서’를 착취해온 방송사는 또다른 ‘이재학들’의 흔적 지우기에 나서고 있다.

김현남(가명) PD는 ‘제2의 이재학 PD’로 불린다. 춘천MBC에서 근로계약 없이 회사에 종속돼 10년 넘게 일하다 해고된 뒤 서울남부지법에 해고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춘천MBC는 그가 춘천MBC에 전적으로 속해 일해온 점을 부인하며 김현남 PD의 ‘PD’ 호칭까지 지우고 있다. 방송노동계는 진상조사위가 밝혔던 청주방송의 ‘이재학 PD 지우기’ 전략의 되풀이라고 보고 있다.

1. “이재학 AD”라는 거짓말… 춘천MBC도

청주방송은 이재학 PD가 ‘PD’라는 사실을 부정했다. 진상조사위는 하아무개 청주방송 기획제작국장을 두고 “증인신문 과정에서 본인은 물론 다른 직원들도 고인을 PD로 부르지 않았다고 적극적으로 허위 진술했다”고 밝혔다. 회사는 이 PD의 구체적인 근무 방식과 해고 사실을 사실확인서로 써 준 직원들을 압박해 취소하게 하고, 경위서를 쓰게 한 뒤 ‘PD’ 호칭을 빨간펜으로 삭제했다. 팀장들과 이재학 PD의 동료들은 상급자 지시로 이재학 PD를 ‘AD’이자 ‘프리랜서’라고 밝힌 내용의 사실확인서를 제출했다.

춘천MBC도 김현남 PD가 “PD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춘천MBC 윤아무개 경영국장은 그가 “프리랜서 AD”라며 “PD라는 것은 본인 주장이고, PD의 연출 업무를 시킨 바가 없다”고 했다. 그가 정직원과 팀을 이뤄 회사 프로그램을 연출·제작한 사실을 부정하면서다. 그러나 미디어오늘이 접촉한 복수의 정규직 노동자는 모두 그를 ‘김 PD’라고 불렀다. 그가 제작한 프로그램 엔딩크레디트 ‘연출’ 란엔 그의 이름이 정규직 PD와 함께 적혔다. 회사는 김 PD에게 ‘춘천MBC 프로듀서’라 적힌 명함을 지급했다.

▲이재학 PD가 연출·조연출한 CJB청주방송 프로그램들의 방영분 갈무리. ‘CJB 청주방송 고 이재학 PD 대책위원회’ 제공
▲이재학 PD가 연출·조연출한 CJB청주방송 프로그램들의 방영분 갈무리. ‘CJB 청주방송 고 이재학 PD 대책위원회’ 제공
▲춘천MBC 김현남(가명) PD가 연출한 프로그램 방영분 갈무리.
▲춘천MBC 김현남(가명) PD가 연출한 프로그램 방영분 갈무리.

진상조사위는 “조연출(AD)인 사실을 강조한 것은 AD=프리랜서, PD=정규직이라는 황당한 논법을 전제한 것”이라며 “1심 법원은 (청주방송의 논리를 받아들여) 판결문에서 고인이 PD가 아니라 AD였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고 밝혔다.

2. “구성원 아닌 외주제작”…“도제식 교육 받는 외주 봤나”

춘천MBC 측이 김현남 PD가 연출한 프로그램을 “외주제작”이라고 주장하는 점도 청주방송과 겹친다. 진상조사위는 ‘외주제작’ 주장이 “고인이 프리랜서라는 판단을 하도록 유도한다”고 밝혔다.

춘천MBC는 김 PD가 프로그램의 한 코너를 ‘외주제작’했다는 취지의 상급자 PD 사실관계확인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그러나 김현남 PD 근무 기록과 그와 함께 일한 팀원 말을 종합하면 그는 ‘맛깔세상’과 ‘나이야가라’ 등 프로그램에서 메인PD 지시에 따르면서 정직원, 작가 등과 팀을 이뤄 아이템 기획과 현장 연출, 편집 등 업무를 했다.

▲김현남(왼쪽 화자) PD가 상급자 정규직 PD로부터 일상적으로 업무지시를 받은 톡방 캡쳐화면 갈무리.
▲김현남(왼쪽 화자) PD가 상급자 정규직 PD로부터 일상적으로 업무지시를 받은 톡방 캡쳐화면 갈무리.
▲김현남(왼쪽 화자) PD가 상급자 정규직 PD로부터 일상적으로 업무지시를 받은 톡방 캡쳐화면 갈무리.
▲김현남(왼쪽 화자) PD가 상급자 정규직 PD로부터 일상적으로 업무지시를 받은 톡방 캡쳐화면 갈무리.

김 PD 업무는 실제 외주제작과도 크게 다르다. 김 PD는 “외주제작 팀에는 기본적으로 회사 차량이나 수송 인원이 안 붙는다. 편집도 춘천MBC에서 이뤄지지 않는다”고 했다. 반면 김 PD는 현장에선 회사 차량으로 정규직을 포함한 팀원들과 움직이고, 사내에선 상급자 지시에 따라 타 프로그램 편집과 완제까지 맡았다.

진상조사위는 “외주제작이 아니라 다른 정규직 직원과 함께 제작했다는 점, 회사의 장비를 제공받아 촬영했다는 점이 인정되면 그만큼 고인의 노동자성은 인정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밝혔다. 하아무개 청주방송 (당시) 국장은 법정에서 이 PD 호칭을 부정하고 다른 정직원들과 함께 제작한 프로그램을 외주제작이라고 밝히는 등 증언을 했다가 위증 혐의로 검찰에 송치됐다.

한편 김 PD는 “외주제작이라면 그런 식으로 도제식으로 키우는 과정을 밟지 않았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2011년 26세에 춘천MBC에 입사했다. 초반 2년은 조연출로 사실상 PD가 지시하는 모든 업무를 했다. 2012년부터는 코너 제작 업무도 시작했다. 완벽하게 PD로 연출 업무를 한 건 2014년부터다. 그는 “보통 지역방송사에서 상주 AD에게 2~3년 되면 연출을 시켜본 뒤 PD 업무를 맡긴다”고 했다.

3. 지원금 사업계획서 등 행정업무 부인도 겹쳐

김 PD는 프로그램 연출과 무관한 회사 고유의 행정업무도 맡았다. 춘천MBC 명의로 정부지원금을 따내기 위한 사업계획서 작성이 일례다. 그와 함께 계획서를 작성한 방송작가는 “김현남과 작가들이 나눠 1차 기획안을 작성하고, 담당 PD가 양식에 맞게 수정해 올리는 정도였다”는 사실확인서를 작성해 법정에 제출했다. 김 PD가 정부지원금 기획안을 정규직 PD에 제출한 SNS톡 기록도 남아있다. 홍콩 공영방송국에 프로그램을 수출하는 데 필요한 행정·편집 업무도 했다.

▲김현남(가명) PD가 함께 ‘나이야가라’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정규직 메인PD로부터 지난해 정부지원금 사업계획서 서식파일을 받은 뒤 자신이 작성한 파일을 제출하는 내용이 담긴 톡방 캡쳐화면
▲김현남(가명) PD가 함께 ‘나이야가라’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정규직 메인PD로부터 지난해 정부지원금 사업계획서 서식파일을 받은 뒤 자신이 작성한 파일을 제출하는 내용이 담긴 톡방 캡쳐화면

춘천MBC는 정규직 PD가 사업계획서를 담당했으며 김 PD가 허위 주장을 한다는 입장이다. 사측이 김 PD에게 사업계획서 작성을 지시한 증거도 없다고 밝혔다. 청주방송의 경우 이재학 PD가 지방자치단체 지원금 업무를 담당한 것을 두고 정규직 직원이 주도적 의사결정 업무를 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진상조사위는 “청주방송의 주장은 진실 의무에 반하여 부당하다”고 결론 내렸다.

춘천MBC는 프로그램 수출 업무에 “(김 PD가) 위임계약 내용에 따라 자료관리 보조 업무를 수행한 데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김 PD의 노동위원회 사건을 대리했던 김승현 노무법인 시선 노무사는 “계약서에 업무를 포괄적으로 명시해 모든 일을 포함시키면 그것이 곧 근로계약”이라며 “김 PD가 계약서 없이 일한 8년은 어떻게 설명한 것인가”라고 반박한다.

▲김현남 PD가 일한 강원 춘천 삼천동 춘천MBC 사옥 2층 편성제작팀 편집실 책상
▲김현남 PD가 일한 강원 춘천 삼천동 춘천MBC 사옥 2층 편성제작팀 편집실 책상

4. “침묵을 넘어 거짓말한 동료들이 형에게 가장 큰 상처”

김 PD는 그의 사수 역할을 했던 정규직 동료가 돌아선 것이 가장 큰 상처라고 말했다. 김 PD가 지난해 초 ‘계약종료’ 통보받은 당시 법률상담을 받도록 독려하고, 업무 지시 증거 기록을 보내준 해당 직원은 사측 진술인으로 사실확인서를 제출한 상태다. 해당 직원을 비롯한 복수의 춘천MBC 직원은 사실확인서에 엔딩크레디트 연출란에 적힌 김 PD 이름이 ‘배려 차원’이라고 밝혔다. 또 김 PD가 프로그램의 일부 코너를 ‘외주제작’했다고 했다.

고 이재학 PD의 동생 이대로씨는 “형은 10년 넘게 같이 일한 선배와 후배들이 믿었던 모습이 아닌 다른 스탠스를 취한 것을 가장 힘들어했다. 사실을 말해달라고 했지만 그들은 입을 닫는 것을 넘어 사실과 반대의 이야기를 한 것”이라며 “‘뒤통수’를 떠나, 10년 넘게 몸담고 20, 30대를 보낸 곳에서 존재 자체가 부정 당하는 상처가 엄청날 것이다. 김 PD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대로씨는 “이 시점에서 가장 아쉬운 건 정규직 노조의 역할이다. 형의 부당해고와 소송 과정에서 언론노조 청주방송지부가 부재했다”며 “전국언론노동조합 춘천MBC지부를 시작으로 노조가 나서 이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고 이재학 청주방송 PD 부당해고 2심 판결문에 나타난 이 PD의 노동자성 인정 근거와 김현남(가명) 춘천MBC PD의 근무 양식 비교. 김 PD 노동위원회 구제신청 이유서 참고, 미디어오늘 보완. 그래픽=안혜나 기자
▲고 이재학 청주방송 PD 부당해고 2심 판결문에 나타난 이 PD의 노동자성 인정 근거와 김현남(가명) 춘천MBC PD의 근무 양식 비교. 김 PD 노동위원회 구제신청 이유서 참고, 미디어오늘 보완. 그래픽=안혜나 기자

이재규 언론노조 춘천MBC지부장은 통화에서 “당사자와 연락을 해봐야겠다. 김 PD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와 소송 진행 상황을 추가로 확인할 것”이라고 말했다.

백재웅 언론노조 전략조직실장은 통화에서 “중요한 것은 김현남 PD의 근로 실질이 이재학 PD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김 PD가 한 일도, (해고 뒤) 진행된 과정도 그렇다”며 “춘천MBC가 당장 소송을 취하하고 당사자를 복직시키고 응당한 처우를 해줘야 한다”고 했다. 백 실장은 “김 PD와 함께 작업한 정규직 동료 노동자들이 있는 그대로를 밝히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했다.

윤아무개 춘천MBC 경영국장은 통화에서 “김씨가 주장하는 내용의 사실관계가 다르다. 문헌 하나 하나 기자와 사실관계를 따지기는 적합하지 않다. 관련된 입장을 법원에 밝혔다”며 “이것은 이재학 PD와 전혀 다른 사건”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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