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표현이지만, 한동안 한국 관광을 독려하는 캠페인 문구로 ‘다이나믹 코리아’(Dynamic Korea)가 사용된 적이 있었다. 100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빠르게 개발과 발전, 성장을 일구어낸 한국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었으리라. 그러나 ‘다이나믹’하다는 것은, 다시 말해 ‘역동적’인 상황은 결코 긍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의미로는 분명한 기준과 원칙을 확립하거나 다질 시간을 만들지 못하고, 빠르게 변하는 상황에 따라가기 바쁠 수도 있음을 넌지시 드러내는 모습이기도 하다. 제조업을 비롯한 한국의 주요 산업 전반이 세계적인 기업들을 여럿 배출할 정도로 성장했지만, 주간 노동시간이나 노조 결성율을 비롯한 노동권의 측면에서는 최악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2014년부터 국제노총(ITUC)이 매기는 ‘글로벌 노동권 지수’(Global Rights Index)에서 한국이 매년 최하위 등급인 5등급(노동권이 전혀 보장되지 않음)을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차지하는 것은 그 어두운 단면이다.

한국의 대중문화 역시 한국의 ‘다이나믹’한 상황을 그대로 따라갔다. 분명 시장은 다른 나라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하드웨어 측면으로도 꾸준히 크고 작은 공간들이, 국공립과 민영을 가리지 않고 계속 등장하고 있으며, 소프트웨어 차원으로 들여다 보아도 내수 시장에서는 물론 해외에서도 주목받는 창작자와 작품이 꾸준히 제 모습을 드러내는 중이다. 게다가 최근 몇 년간은 그렇게도 선망했던 해외의 유수 시상식들이 한국의 작품들을 후보작이나 수상작으로 선정하고 있다. 그것도 특정 분야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영화(봉준호 ‘기생충’, 박찬욱 ‘헤어질 결심’), 만화(마영신 ‘엄마들’), 음악(BTS, 피아니스트 조성진‧이혁), 문학(한강 ‘채식주의자’, 정보라 ‘저주토끼’, 이수지 ‘여름이 온다’) 등등 다양한 문화의 영역에서 수상작/자들이 배출되었다.

▲영화 '기생충' 제72회 칸 국제영화제 현장.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영화 '기생충' 제72회 칸 국제영화제 현장.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이러한 상황이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치지 않으니, 일각에서 제기되는 내셔널리즘적 표현이라는 비판에도 ‘K-’ 접미사가 유행이 되는 것도 어떤 의미로는 당연한 일이다. 특히 1990년대 이전 문화 창작과 향유‧접근이 일상적으로 정착되기 이전의 시절,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까지 IMF 경제위기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상흔이 아직 가시지 않던 시기를 기억하는 이라면 더더욱 지금의 상황을 감격스럽게 쳐다보기 쉬울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K-’ 수식은 모진 고난을 이겨내고 마침내 극복하여 목적을 달성한 ‘영웅 서사’를 비추는 하나의 증표로서도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 빠른 시간 동안 괄목할 수준으로 성장한 한국 대중문화는 경제적인 발전 수준 만큼 영역 내부의 작동 구조도 그만큼 성숙했는가. 앞서 언급한 국제노총의 글로벌 노동권 지수와 다르게, 각 국가별 문화 영역의 상황을 쉽게 국제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렵다. 동시에 상대적으로 당사자 개개인의 노동자성 인식을 지니는 것이 용이한 일반적인 산업 영역과 달리, 문화 영역의 경우 자신을 ‘창작자’로서는 인식해도 ‘창작 노동자’로 인식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저조한 측면이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상 참작 요소’에도 불구하고 2022년 한국 문화 영역에서 등장한 뉴스들은 여전히 한국 대중문화에 수많은 과제들이 도사리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 문화 영역에서도 점차 심해지는 양극화 현상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모습은 점차 심해지는 ‘양극화’의 현상이다. 무수한 문화‧여가 활동 중 한국인들이 압도적으로 선호하는 ‘영화’에서 이러한 모습이 특히 두드러졌다. 12월 28일 현재, 극장에 개봉한 영화 중에서는 단 22편의 영화만이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 중 한국 영화는 13편에 그친다. 물론 개중에는 올해 유일하게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작품으로 등극할 것으로 보이는 ‘범죄도시 2’(약 1269만명)이나 약 726만 관객을 기록한 ‘한산 : 용의 출현’ 같은 작품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수혜를 맛본 작품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게 되었다. 2022년에도 여전히 코로나-19의 영향력이 강했다는 것을 고려해도, 코로나가 유행한 시기 수익 구조를 개선하겠다는 명목 아래 CGV 등 대형 멀티플렉스 체인들이 몇 차례나 티켓 가격을 인상하며 영화관을 찾는 문턱이 높아졌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일부 초대형 흥행작을 제외하면 영화관 자체를 방문하는 움직임이 줄었음을 보여준다. (참고로 코로나 이전 2019년의 경우 100만 관객을 돌파한 개봉작은 총 50편이었다. 2021년의 100만 관객 이상 개봉작은 16편이다.)

▲ 영화 ‘한산: 용의출현’ 스틸컷.
▲ 영화 ‘한산: 용의출현’ 스틸컷.

그렇다면 사람들은 영화관을 찾는 대신 집에서 편하게 OTT로 보는 것이 보편화된 것일까. 분명 한국을 넘어 글로벌에서 메가 히트를 기록한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이외에도 쿠팡플레이 ‘안나’, 왓챠 ‘시맨틱 에러’ 등의 작품이 화제가 되었다. 픽션이 아니더라도 티빙 ‘서울체크인’, ‘환승연애’, 넷플릭스 ‘솔로지옥’, ‘코리아 넘버원’ 등의 예능 프로그램이 화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해 단번에 부풀어 올랐던 OTT에 대한 열풍은 코로나의 위협이 점차 줄어드는 것과 함께 서서히 가라앉고 있고, 한국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이미 KT가 운영하던 OTT ‘시즌’은 CJ ENM이 운영하는 ‘티빙’에 통합되는 것으로 결정되었으며, 몇 안 되게 IT 스타트업 기반으로 OTT 서비스를 개시한 ‘왓챠’는 지속적인 매각설이 제기되고 있다. ‘티빙’은 모회사가 CJ ENM이라는 점을 이용해, 같은 그룹에 속한 CGV와 함께 ‘통합 요금제’를 선보이며 최대한 회원을 끌어모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넷플릭스, 디즈니 플러스 등의 대형 글로벌 OTT는 계속 생존할 가능성이 크지만 특별한 포인트를 발굴하지 못하는 OTT는 2023년 이후 더욱 휘청일 염려가 증가하고 있다.

이외에도 크기가 제법 크다고 생각하는 영역 다수가 이런 양극화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웹툰 작가들 사이에서는 몇 년전부터 ‘웹툰 영역은 송곳과 다를 바가 없다’는 이야기를 자조적으로 사용하곤 한다. 분명 억대 연봉을 버는 거물 작가도 적지 않지만, 대다수의 작가는 결코 그러한 수익을 거두기 어렵다는 점에서 매우 조그마한 정점과 그 정점에서 90도 가깝게 수직으로 하강한 뒤 평평한 밑바닥이 다수를 차지하는 ‘송곳’을 자신들이 생업을 영위하는 웹툰 환경에 비유한 것이다.

스태프들이 자신의 노동의 '디졸브 노동'이라 칭하는 이유

한편 방송을 비롯한 영상 미디어 영역에서 활동하는 스태프들은 자신들의 노동을 ‘디졸브 노동’이라 호칭한다. 영상 기법에서 한 화면이 서서히 흐려지며 다른 화면으로 전환되는 연출을 뜻하는 ‘디졸브’(dissolve)에서 착안한 이 호칭은 제대로 된 수면, 휴식 시간 없이 밤샘 촬영을 이어나가다 얼마 못 쉬고 바로 다시 촬영을 이어나가는 것이 ‘촬영과 촬영 사이 휴식 시간을 디졸브로 지운 것 같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방송‧영화‧공연 등의 연기자나, 게임 개발자, 웹소설 등 문학 영역 영역의 창작들도 예외는 아니다. 언론은 물론 정부조차도 ‘가장 잘 나가는 모습’에 주목하지만, 그 모습은 소수에 불과함에도 그 이외의 영역에는 이렇다 할 접근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희망연대본부 방송스태프지부를 포함한 ‘드라마 방송제작 현장의 불법계약 근절 및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공동행동’은 28일 서울 마포구 서부지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검찰이 불법제작 드라마를 용인했다”고 규탄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희망연대본부 방송스태프지부를 포함한 ‘드라마 방송제작 현장의 불법계약 근절 및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공동행동’은 28일 서울 마포구 서부지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검찰이 불법제작 드라마를 용인했다”고 규탄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물론 자본주의 논리가 작동하는 대다수의 국가에서 문화 산업은 ‘시장의 논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국가마다 시장의 크기나 지속적으로 다양한 문화 영역에서 기꺼이 돈을 쓰는 ‘적극적인 소비자’의 규모 등에 차이가 있을 뿐 고수익을 버는 창작자나 작품은 소수이며, 다수의 창작자나 작품은 대중의 주목을 받기 어려우며 사라지기도 쉽다. 그 자본주의적 격차를 조금이라도 메꿔주는 것이 바로 정부나 공립적인 차원의 ‘문화 정책’이다. 다른 민간 자본 못지 않은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의지만 있다면 자본주의적인 흐름이 낳는 격차의 문제를 조금이라도 해소하거나 대안을 모색하는 통로를 고민할 수도 있다.

'당장 돈 잘 버는' 문화 상품에 초점 박힌 문화 정책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문화체육관광부나 한국콘텐츠진흥원 등으로 대표되는 한국 정부의 문화 정책은 ‘지금 당장 돈을 잘 버는’ 문화 상품에 초점이 단단히 박혀 있다. 오랜 시간 문화 정책을 담당하는 관료들이 그런 경향성을 가지는 가운데, 근래의 정권 교체로 발생한 변화는 오히려 그러한 편향을 더욱 강화하는 흐름으로 이어진다. 단순히 ‘문화 정책’으로 묶인 예산의 액수는 커질지 몰라도, 지역‧대안‧비주류를 비롯해 점차 획일화되는 문화 생태계에서 조금이라도 종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움직임을 조성하기 위한 정책은 여러 명목으로 대폭 축소되거나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특히 문화 정책을 관료의 일방적인 지시나 ‘상명하달’이 아니라, 현장의 창작자와 문화를 향유하는 시민들이 참여하는 거버넌스를 모색했던 움직임이 연달아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오세훈 2기 서울시정에서 마을공동체 지원 조례를 폐지하고, 이와 연계되어 마을미디어 정책을 중단하는 등의 모습은 그 단면이다. 해당 사업의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은 ‘사업 자체의 비효율성’을 이유로 사업 중단의 정당성을 외쳤지만, 이는 다른 국가에 비해서도 지역이나 마을 언론이 발달하지 못하고 중앙 언론이나 포털로의 집중이 유난히 강한 한국의 상황을 도외시하는 발상이다. 여러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지역 공동체의 기틀을 만들고 다시 소통을 돕는 미디어로 이어지는 노력이 누군가 보기에는 ‘비효율의 극치’일지 몰라도, 오히려 효율을 앞세우며 이러한 노력을 강제로 없애려는 움직임은 도리어 더욱 획일적인 문화 향유와 접근의 틀을 만드는 것에 기여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재의 구조에서 일정한 지위를 지닌 문화 자본들은 자신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감시할 정부의 권력이 복지부동을 계속 이어나가는 가운데 굳이 공들여 변화와 노력, 개선을 꾀하는 대신 현재의 위치에서 계속 안주하는 길을 택한다. 지난 9월 30일, 지방노동위원회‧중앙노동위원회가 연달아 당사자의 노동자성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문제를 제기한 ‘무늬만 프리랜서’ 아나운서를 다시 ‘프리랜서’로 재입사를 시킨 경남CBS, 그리고 그에 다른 정부 기관들이 제대로 조치를 취하지 못하는 현실이 대표적이다. 대형 자본이 필연적으로 지닐 수 밖에 없는 권력에 대한 책임을 제대로 지라는 이야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쇠약해지고 있다. 그저 여러 보고서나 발표문에서만 ‘문화 다양성’과 같은 요소를 형식적으로만 언급할 뿐, 시장이 커져 가는 상황에 대한 경도 이상으로 그에 맞춰 제도나 정책적 접근을 정비하는 모습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돌꽃노동법률사무소,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 부산민주언론시민연합 등 10개 노동·언론·시민사회단체는 11월10일 오전 10시, CBS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경남CBS의 아나운서 꼼수 원직복직을 규탄하였다. 사진=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돌꽃노동법률사무소,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 부산민주언론시민연합 등 10개 노동·언론·시민사회단체는 11월10일 오전 10시, CBS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경남CBS의 아나운서 꼼수 원직복직을 규탄하였다. 사진=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물론 희망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모습들도 없지 않다. 올해 2월 문화체육관광부‧공정거래위원회를 비롯해 한국만화가협회‧웹툰작가노동조합 등 만화‧웹툰 분야의 창작자 단체와 사업자 단체가 공동으로 결성한 ‘웹툰 상생협의체’가 지난 12월 16일 ‘웹툰 생태계 상생 환경 조성을 위한 협약’을 체결했다. 해당 협약에는 웹툰에 대한 수익 배분의 보다 명확히 만드는 것을 비롯해, 오랜 시간 계속 지적받아왔던 웹툰 창작자에 대한 휴재권 보장‧적정 창작 분량의 기준 마련‧만화 및 웹툰 창작의 다양성 조성을 위해 서로 노력할 것을 약속하는 문구가 담겨 있다. 비록 이 협약은 ‘노력’이나 ‘약속’ 이상으로 협약의 이행을 보장할 수 있는 단계로는 아직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웹툰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만화 영역의 고질적인 불합리‧불공정 계약 및 수익 배분 문제, 작가의 건강권을 비롯한 이슈둘을 만화‧웹툰과 관련된 이들이 조금이라도 하나의 ‘기준’을 만들기 위해서 한 걸음 나아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협약이다.

2023년 한국 대중문화가 고민해야 하는 지점도 이러한 공동의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아닐까. 이미 산업의 크기는 무척이나 키우는 것에 성공했다. 여러 한계나 문제가 있었다 할지라도, 한국 문화는 최소한 ‘산업’의 측면에서는 몸집을 매우 빠른 속도로 불리며 소위 ‘규모의 경제’가 작동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내었다. 동시에 이는 지금까지는 인지하지 못했거나, 관행으로 여겼거나, 산업 육성을 명목으로 어느 정도 외면해왔던 ‘여러 한계나 문제’를 직시하며 바라봐야 할 필요성으로 이어진다.

이는 그저 정부에서 일방적으로 시정을 지시한다고 해서 말끔하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문화 현상도, 이러한 현상들을 기반으로 구축된 산업 영역도 점차 변화의 가속도가 가팔라지는 가운데 문화 현상의 당사자들이 배제된 관료적인 행정으로는 문제 해결은커녕 문제에 대한 적절한 접근 자체가 쉽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시간이 걸릴지라도, 꾸준히 현재의 상황을 마주보며 앞으로 필요한 것들을 고민하는 논의의 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장에서야 비로소 조금이라도 개선을 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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