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7년 초, 영화 ‘싱글라이더’가 한국에 개봉했다. 배우 이병헌과 공효진이 주연으로, 그것도 신인 감독의 장편 첫 데뷔작이자 상대적으로 저예산인 작품에(공표 제작비 45억원) 등장하는 것으로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비록 ‘싱글라이더’의 흥행은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했지만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문 미스터리가 오묘하게 가미된 드라마 장르의 연출을 선보이며 주목을 받은 작품이기도 했다. 이 작품을 연출한 이는 바로 감독 이주영이다.

‘싱글라이더’ 이후 한동안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던 이주영 감독이 다시 복귀한 작품은 6부작 드라마 ‘안나’였다. 차기작이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이긴 했지만, 이미 영상 산업에서 드라마와 영화 사이의 경계는 흐려진지 오래다. 오히려 약 6년 간의 공백을 요새 영상 산업의 또 다른 중심이 되고 있는 OTT의 드라마로 돌아오는 것은 긴 공백을 메꿀 무척이나 좋은 소식이 될 수 있었다. 동시에 주연은 아이돌 그룹 ‘미스에이’ 출신이자 ‘건축학개론’ 등의 작품으로 이름을 알린 수지에, 대형 상업 영화부터 독립영화까지 다양한 작품에서 열연을 펼치고 최근에는 애플TV 플러스 ‘파친코’에 출연하며 활동 범위를 넓히는 배우 정은채였다. 장르 또한 ‘싱글라이더’에 이어 미스터리가 뒤섞인 드라마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게다가 복귀작이 공개되는 곳은 OTT에서 무척이나 출발이 느린 후발주자였지만 본업으로 쌓은 인지도와 자본, 이를 통한 여러 독점작을 통해 빠르게 입지를 쌓아가던 플랫폼 ‘쿠팡플레이’였다. 코로나 이전부터 주목받던 OTT는 코로나로 인해 영화관이 제 기능을 못하는 사이에 빠르게 주도권을 가져갔고, 쿠팡플레이는 그 수혜를 받은 OTT 중 하나였다. 많은 이들은 ‘안나’가 주목받는 신인 감독의 차기작에 투자를 선택해 서로의 원-윈을 노리는 후발 OTT의 시도라고만 생각했었다. 이주영 감독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쿠팡플레이 '안나'.
▲쿠팡플레이 '안나'.

지난 8월 2일, 작품의 연출자인 이주영 감독이 고용한 법률대리인인 로펌 ‘법무법인 시우’가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배포하며 그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던 ‘안나’에 얽힌 문제가 수면 위로 비로소 드러나게 되었다. 해당 보도자료에는 “본래 8부작으로 제작, 연출한 작품을 쿠팡플레이가 일방적으로 6부작으로 축소 편집하며 분량을 줄이는 것은 물론, 그로 인해 본래 이주영 감독이 각본 및 연출에서 의도했던 서사·촬영·편집·내러티브의 의도가 모두 크게 훼손되었다”는 연출자의 입장이 담겨 있었다. 또한 “자신이 보지 못한 편집본에 본인의 이름을 달고 나가는 것에 동의할 수 없어 크레딧의 ‘감독’과 ‘각본’에서 자신의 이름을 뺴달라고 요구했으나 쿠팡 플레이가 거절했다”는 이야기도 함께 담겨 있었다.

그야말로 대형 사건이었다. 영상 작품의 편집권을 놓고 다투는 일은 영상 산업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많은 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다툼이자 갈등이지만, 제대로 된 협의도 없이 무단으로 투자배급사가 편집을 감행해 멋대로 공개하는 것은 2022년 현재로는 정말 전무후무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영상 산업이 후진적인 국가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토대를 다지며 남 부럽지 않은 산업의 크기를 갖춘 국가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그런 국가에서, 대형 자본을 갖춘 신생 OTT 서비스가 산업의 기본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을 저지른 셈이다.

즉각 쿠팡플레이는 이주영 감독이 보도자료를 배포한 바로 다음 날인 8월 3일 입장을 발표해 이주영 감독의 입장을 반박했다. 무단으로 편집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계약에 의거해 작품을 편집한 것이며, 본래 이주영 감독이 최종적으로 연출과 편집을 마친 8부작은 ‘감독판’으로 8월 중 공개할 예정이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 해명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각 영상 제작 프로젝트마다 세부적인 계약의 내용은 다르지만, 편집권의 행사 여부를 제대로 명시한 계약이었다면 이렇게 ‘플랫폼이 무단으로 편집했다’는 주장은 애시당초 나올 수가 없다. 일각에서는 ‘미국 할리우드 등 해외에서는 유명 감독의 작품이 아닌 이상 스튜디오(투자배급사)가 편집권을 가져가는 것이 일방적이며 한국의 사례만 특수한 케이스이다’ ‘한국에서도 전적으로 촬영 현장 관리 등에 주력하는 ’고용 감독‘의 사례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계약서를 허투루 체결하지는 않는다. 만약 쿠팡 플레이의 주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주영 감독이 로펌과 계약을 맺으면서 강력한 대응에 나선 것은 계약 자체에 어딘가 문제가 있었다는 심증만을 강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쿠팡플레이 '안나'.
▲쿠팡플레이 '안나'.

이후 8월 4일 ‘안나’의 촬영에 참여한 스태프 6인의 입장문이 발표되며 좀 더 자세한 정황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들은 단순히 제작 현장에 말단으로 참여한 스태프가 아니라, 오랜 시간 영화를 비롯한 여러 콘텐츠 제작 현장에서 촬영, 조명, 그립, 편집, 사운드, 음향의 영역에서 감독급으로 참여해왔던 핵심 스태프라는 점에서 더욱 이 입장문의 무게는 컸다. 해당 입장문에서 6명의 스태프는 “(쿠팡플레이의 일방적인 편집에) 감독도 동의하지 않았고 저희 중 누구도 동의하지 않았다”고 적시하며 이주영 감독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덧붙여 쿠팡 플레이의 ‘안나’ 편집에는 편집감독이 참여하지 않은 채로 편집이 이뤄지는 등 후반 편집 작업에서도 쿠팡플레이 직원이 단독으로, 또는 임의로 고용한 인원이 작품을 일방적으로 매만졌다는 주장까지 나오며 파장이 더욱 크게 일게 되었다.

이후 8월 11일에는 영화 전문 매체 ‘씨네21’이 이주영 감독과의 단독 인터뷰를 게재하며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상세한 문제의 상황이 밝혀졌다. (관련 기사 : 씨네21: [단독] ‘안나’ 이주영 감독 “쿠팡플레이, 뭐든 돈으로 사면된다고 생각”) 이주영 감독은 쿠팡플레이가 편집본 논의 과정에서 “회의다운 회의를 하지 않았다”면서, 심지어는 “왜 모든 장면을 의도를 갖고 찍었느냐”는 말을 쿠팡플레이 실무자가 했다면서 쿠팡플레이의 행태에 강하게 문제를 제기했다. 이외에도 쿠팡플레이는 제작사를 통해 “독립영화같다. 다 마음에 안 든다”는 등의 입장을 계속 전달했으며, 이후 쿠팡플레이가 여러 편법을 쓰면서 편집 프로젝트 파일을 받아가며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편집을 할 수 있는 원천 소스를 챙겨갔다는 점을 재차 언급했다. 인터뷰 말미에서 이주영 감독은 “입장문을 통해 밝힌 첫 번째 요구는 쿠팡플레이가 배우와 스탭을 향해 사과하란 것이었다”고 지적하며 쿠팡플레이가 무단으로 작품을 편집, 수정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할 것을 촉구하는 입장을 남겼다.

하지만 쿠팡플레이의 입장은 최소한 8월 12일 현재에는 크게 변한 것이 없어 보인다. 쿠팡플레이는 이날 매우 짧은 보도자료를 보내며 “지난 7월 초 6회로 마무리된 ‘안나’는 높은 몰입도와 긴장감을 선사하며 시청자의 호평을 이끌어냈으며, 쿠팡플레이는 당시 감독판 8부작 공개도 약속한 바 있다”, “감독의 편집 방향성을 존중해 시청자들에게 이미 약속한 감독판 8부작을 공개하게 됐다”는 설명만을 담아냈다. ‘감독의 편집 방향성을 존중’한다는 수식은 있었지만 일방적인 무단 편집에 대한 해명이나 사과는 한 마디도 없었다. 게다가 쿠팡플레이는 “이미 7월 초에 안나의 ‘감독판’을 공개한다고 약속했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실제 7월 쿠팡플레이가 발송한 보도자료에는 “8월 중 ‘확장판’을 공개한다”는 구절만이 있을 뿐 해당 공개본이 감독판인지, 왜 OTT에서는 드문 일반판/확장판을 별도로 따로 공개하는지에 대한 언급 단 하나도 없었다. ‘감독판’ 8부작은 쿠팡플레이를 통해 공개되었지만, 문제는 쉽게 가라앉기에는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쿠팡플레이 '안나'.
▲쿠팡플레이 '안나'.

어찌하여 이런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인가. 8월 12일 현재까지 등장한 쿠팡플레이와 이주영 감독 양자의 입장을 토대로 봤을 때, 가장 큰 핵심은 ‘계약 내용’이다. 쿠팡플레이는 제작사와 계약의 내용에 따라 적절하게 편집권을 행사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정확히 편집권에 대한 계약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밝히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영상물 제작은 감독(연출자) 등의 핵심 스태프 뿐만 아니라 제작사, 투자배급사(플랫폼)이 모두 관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계약 단계에서 영상과 관련된 각종 권리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가 매우 중요하다. 이주영 감독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계약서 상에서는 8부작으로 제작하는 것이 명시되어 있었다.”고 언급을 했던 구문에 의거하면, 오히려 쿠팡플레이 측은 왜 계약과 달리 일방적으로 6부작으로 작품을 편집하여 공개했는지에 대한 해명을 해야만 할 것이다.

OTT 번성하는 와중, 편법 통해 영상 산업 권리 후퇴 가능성도

그러나 그 이상으로 심각한 것은 여전히 한국의 영상 산업이 제대로 된 체계나 권리 및 의무 규정 없이 좌충우돌 굴러가며, 도리어 OTT가 번성할수록 역설적으로 후퇴할 가능성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잠시 기억을 과거로 돌려 봉준호의 최신작 ‘기생충’이 개봉했을 때를 생각해보자. ‘기생충’은 ‘반지하’와 ‘지상의 거대 저택’이라는 공간을 대비하며 전개하는 스타일과 프랑스 칸 영화제-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의 최고상을 모두 휩쓴 점으로도 주목받았지만, ‘주 52시간제 상한제’를 철저하게 지키고 촬영 당시 폭염이 기승을 부리자 어린이 배우(아역 배우)의 건강 보호를 위해 본래 기획했던 촬영 계획을 변경하였다는 점도 주목을 받았다.

이에 다수의 언론은 봉준호 감독의 ‘선의’와 이를 가능하게 한 투자배급사 ‘CJ ENM’에 대한 상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찬사를 받아야 할 곳은 따로 있었다. 바로 2005년 결성된 이래 오랜 시간 투쟁을 거쳐 2015년 영화 ‘노동자’의 규정과 권리를 대폭 규정한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이하 영비법)의 개정안 통과라는 큰 성과를 만든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이하 영화산업노조)이다. 한국 영화 촬영 현장은 현재의 드라마 촬영 현장과 다를바 없이 주먹구구로 돌아가는 곳이었다. 아무리 대형 자본이 투자되도 영화 촬영 스태프, 다시 말해 ‘영화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규정과 준칙이 없는 상황에서 제작사나 배급투자사의 의견이 일방적으로 강요되기 쉬웠다. 이러한 구조에서 ‘감독’은 촬영 현장에서는 갑으로 간혹 어떤 감독이 스태프에 폭력이나 불합리한 지시를 행사하며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다시 한편으로는 감독 또한 제대로 된 권리 규정이 없어 제작사/배급투자사에게 제대로 권리를 존중받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기도 하였다. 특히 신인, 청년, 여성 등등 소수적 위치에 있는 감독이 특히 그러하였다.

▲안병호 영화산업노동조합 위원장이 9일 문화예술노동자들의 안전하게 일할 권리 보장을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문화예술노동연대 제공
▲안병호 영화산업노동조합 위원장이 9일 문화예술노동자들의 안전하게 일할 권리 보장을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문화예술노동연대 제공

영화산업노조의 오랜 투쟁은 한동안 제대로 된 권리 규정이 없던 영화 제작 현장을 정비하는 것에 큰 일익을 했다. 그 투쟁의 결과로 권력을 지닌 이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맞게 마구 현장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라 법에 의해, 때로는 사전에 협의를 맺은 단체 협상 내용에 의거하여 서로가 지켜야 할 권리와 의무를 존중하는 영화 제작 환경이 서서히 정착이 되어가고 있었다. 몇몇 영화인과 언론은 이들의 투쟁과 그 결과로 탄생한 변화의 과정을 ‘가뜩이나 돈이 없는 영화 현장을 어렵게 한다’는 식으로 부정적인 편견을 쏟아내었지만, 이러한 변화는 영화 촬영 현장은 빠른 속도로 개선하게 만든 것은 물론 코로나 19가 유행하는 상황에서도 다른 문화예술 영역보다 상대적으로 종사 노동자들이 버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에도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OTT의 득세는 이러한 변화에 조금씩 제동을 걸고 있다. 현재의 영비법에서 ‘영화’는 극장 등의 대중 공간에서 상영을 위한 목적으로 만든 영상물을 의미하며, ‘비디오’와 별도의 정의로 묶여 있다. ‘영화산업’과 ‘비디오산업’도 모두 별개로 규정되어 있다. 그리고 2015년 영비법 개정안에서 추가된 ‘영화근로자’에 대한 규정은 안타깝게도 ‘영화산업에 종사하는 자’로 한정되어 있다. 즉, 처음부터 극장에 개봉하지 않고 ‘비디오물’로 등급 분류를 받으며 ‘비디오’의 정의로서 유통되는 작품은 영비법 규정상 ‘영화산업’이 아니라 ‘비디오산업’에 해당한다. 다시 말하면, 2015년 이후 영비법에 대폭 확충된 ‘영화근로자’의 권리 규정을 무시해도 이를 제재할 수 있는 방법이 마땅치가 않다는 것이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방송작가유니온),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등의 활동으로 잘 알려진 것과 같이 ‘영화’가 아닌 한국의 영상 산업은 OTT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이전에도 무척이나 열악했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지만 영화에서는 이뤄낸 권리 쟁취는 영화 이외의 영역에서는 적용이 되지 않으며, CJ ENM처럼 영화와 드라마를 동시에 다루는 회사는 큰 차원에서는 같은 ‘영상’임에도 공개되는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권리 작용에 심각한 격차가 발생하는 일이 계속해서 발생했다.

그러나 OTT의 빠른 성장세, 그리고 코로나 19의 유행으로 인하여 극장 개봉을 중단하고 OTT 공개를 택한 작품이 늘어나자 이전부터 있던 한계는 더욱 많은 제작사나 배급투자사로 널리 ‘활용’할 수 있는 길을 만들게 되었다. 극장에서 공개할 수 없다는 디메리트는 존재한다. 그러나 여전히 코로나의 영향력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쉽게 회복할지 모르는 극장 흥행을 포기하고 OTT로만 작품을 유통할 수 있다면 영상 노동자의 권리를 규정하는 온갖 조항들을 ‘합법적’, 또는 ‘편법적’으로 우회가 가능하다. 실제로도 필자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재직 시절 이러한 법의 공백 상황을 악용한 작품 제작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제보가 적지 않았다. 스태프들은 모두 영화에서 활동하고, 감독이나 제작사, 배급투자사 모두 영화가 주 전문임에도 ‘극장 공개작’을 만드는게 아니라는 이유로 단체 협상을 거부당하고, 2015년 영비법 개정 전의 상황처럼 일한다는 제보도 존재했다.

▲쿠팡플레이 화면.
▲쿠팡플레이 화면.

‘안나’에서 발생한 문제의 근본 또한 이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만약 ‘안나’의 본격적인 제작과 촬영에 착수하기 전에 영화산업노조와 성실하게 권리에 대해서 협의를 했더라면, 아니면 좀 더 근본적으로 영화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영상, 더 나아가 문화예술 산업과 노동에 있어서 제대로 된 권리 및 책임 규정이 존재하고 정기-단체 협상이 보편적인 상황이었다면 무단 편집 같은 말도 안 되는 일이 과연 발생했을까. 권리과 책임이 빈 자리에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본처럼 힘이 강한 세력들이 일방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에 바빴다.

한국 영상 산업 전반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나마 영화 정도만 영화산업노조의 장기 투쟁으로 자본이 조금 자신의 이해관계를 양보했을 뿐이다. 도리어 어떻게든 법의 틈새를 찾아내, 서로를 ‘존중하지 않아도 되는’ 영역을 만들어내 다시 이전과 같이 자신들이 맘대로 해도 괜찮은 틈바구니를 만드려 애를 쓰고 있다. 이런 상황을 도외시하고, 제대로 내야 할 비용을 모조리 우회한 채 시장이 커진다고 과연 자랑할 수 있을까. 돈이 많다고 해서 선진적인 것은 아니다. 소위 선진국이라 불리는 국가 다수는 오랜 시간 투쟁과 사회 운동을 거쳐 최대한 뿌리 깊게 서로를 존중하는 시스템과 책임과 권리를 명문화시켰다. 한국은 그럴 수 있는가. 자본은 이에 기꺼이 동참하고 싶어하는가. 정부는 공공의 영역에 그 시스템을 확고히 다질 수 있는가.

이미 영상을 비롯한 한국 문화예술 산업 내의 여러 노조, 단체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꾸준히 권리 쟁취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 움직임을 제대로 듣지 않고 계속 무시한다면, 계속 커질 것처럼만 보이는 산업의 규모는 쉽게 무너지는 모래성이 될 가능성만 커질 것이다. ‘안나’ 무단 편집 사건은 그런 점에서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한국 영상 산업- 더 나아가 문화예술과 사회 전반의 향방을 가를 수 있는 하나의 지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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