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의 진상은 미군 비밀자료 등에서 확인된 미국의 군사적 개입, 친일경찰과 군인들의 양민학살 등에 대해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공개한 관련 자료 등을 통해 그 전모의 일부가 들어나는데 이를 2회에 걸쳐 소개한다. 제주 4.3의 발생 원인의 하나로 미국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 추진 반대가 손꼽힌다. 따라서 제주 4.3을 다루기 위해서는 미국의 유엔을 통한 남한 단독 정부 수립 추진에 대한 설명이 우선되어야 한다. 미국은 소련과 협의하던 한반도 신탁통치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한국문제를 1947년 9월 23일 유
미국의 태평양전쟁 종전후 한반도 점령은 일본 점령 정책의 일부로 인식되어 집행되면서 조선인의 독립 열망 등은 점령 초기 정책에서부터 배제되었다.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면서 가쓰라-데프트 밀약을 원용하는 원칙 등이 중시된 감이 있다.미국은 특히 중국이 모택동에 의해 공산화 되는 것을 주시하면서 일본과 남한을 소련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주요 전진기지로 만든다는 전략에 치중했다. 미국은 중국에서 장개석 군을 지원해 모택동 군을 압박하면서 소련의 진출을 저지하는 동북아 전략을 성공키기 위해 한반도와 일본에서도 동일한 목적의 방안을 추진했다
일본 정부는 1945년 8월 6, 9일 두 번의 미군 원폭 투하와 소련의 참전으로 궁지에 몰리자 8월 14일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겠다고 미국과 영국에 통보했다. 8월 15일 일본 천왕 히로히토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쟁이 끝났음을 자기네 국민에게 알렸으며 일본 정부는 8월 16일 일본군에 교전 중지 명령을 내렸다. 공식적인 일본의 항복 조인식은 1945년 9월 2일 도쿄 만에 정박한 전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맥아더 장군과 일본 외상, 일본군 사령관이 항복문서에 서명하면서 이뤄졌다.맥아더는 미군이 서울에 진입해서
맥아더는 미주리 함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아들인 뒤 본국 정부의 명령을 받아 미군이 남한을 점령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맥아더에게 남한 점령은 일본 본토 점령에 비해 지엽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미군은 남한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보하면서 공산주의로부터 지켜낸다는 목적이었지만 결국 한반도가 냉전기간 동안 미소가 정면 격돌하는 현장이 되고 말았다< Michael C. Sandusky, America's Parallel (Alexandria, Va.: Old Dominion Press, 1983. Irving Matray, The Rel
일본 항복이후 미국의 일본 점령정책에 대해 흔히 맥아더가 주인공인 것처럼 기술하거나 남한 군정의 경우 군정사령관 하지 장군에게 초점을 맞춰 맥아더나 하지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과 같은 인상을 주고 그런 인식이 국내에 팽배해 있다. 그러나 맥아더, 하지는 그의 상층부에 미국 대통령, 전쟁부, 합동 참모 본부 등이 존재했고 그들은 미국 정부가 1942년부터 준비해온 일본 점령 정책을 실행하는 역할에 불과했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맥아더의 지휘를 받았기 때문에 일본에 진주한 점령군의 일부에 불과했다.미국은 태평양전쟁이후 한반도가 포함된
미국정부는 3·1운동이 발생한 10여일 후인 1919년 3월14일 미국무부가 발표한 성명을 통해 3·1운동을 왜곡 폄하하는 내용을 발표했다. 미국은 조선인들이 언론 자유와 기타 불만 사항을 시정해 달라며 소요를 일으켰다고, 진실을 외면하고 조선인을 깎아내리는 공식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다. 다음은 성명서 전문이다. ---3월12일 서울을 비롯한 지방에서 사실상 시위가 중단됐으며 공식적으로 시위 참여자의 15%만이 기독교 신자로 파악됐다. 시위 지도자들은 새로운 정치적 종교계의 사람들이며 외국 선교사들은
북한의 핵, 미사일 개발과 무력시위에 대해 한미가 동맹을 앞세워 미국의 핵우산을 강조하면서 유사한 군사적 대응조치를 취해 한반도는 전쟁위기감이 높아지고 있다. 한반도 남북에서 강대강 군사행동이 향후 계속 될 전망이어서 우발적 충동 등에 의한 국지전 위협이 우려되고 있다. 한반도 핵전쟁 가능성도 배제 못해 남북한 절멸의 위기도 걱정되는 실정이다. 미국은 남한에서 고마운 존재, 혈맹관계로 일컬어진다. 미국이 6.25 한국 전쟁에 참전에 수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희생을 당했고 그 이후 미군 주둔에 의해 안보가 보장이 도면서 한국이 엄청난
3·1운동 103주년이 되는 올해는 미국이 일제의 한반도 침탈을 묵인한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 108주년이기도 하다. 3·1운동을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결부시키는 이유는 이 밀약이 맺어진 뒤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본격화되고 3·1운동 당시 미국이 이 운동을 철저히 외면했기 때문이다. 3·1운동 103주년을 맞아 대부분의 언론이 당시를 조명하면서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미국의 조선 독립 운동 외면 사실을 제대로 소개하지 않는 것은 역사 왜곡에 가깝다.가쓰라-태프트 밀약은 1905년 7월 29일 당시 일본 총리 가쓰라와 미 육군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포용적인 역사의식’을 강조하며 조선의 비타협 민족주의자 안재홍을 소환했다.“해방 다음날인 1945년 8월16일, 민족의 지도자 안재홍 선생은 3000만 동포에게 드리는 방송 연설을 했습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선생은 패전한 일본과 해방된 한국이 동등하고 호혜적인 관계로 나아가자고 제안했습니다. 식민지 민족의 피해의식을 뛰어넘는 참으로 담대하고 포용적인 역사의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해방으로 민족의식이 최고로 고양된 때였지만 우리는 폐쇄적이거나 적대적인 민족주의로 흐르지
역사는 누가 기술하느냐에 따라 그 평가 내용이 달라지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한 역사적 사실관계에 입각해서 이뤄져야 한다. 충실하고 객관적인 사실 관계가 우선이고 그 다음에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말이다. 평가의 부분은 헌법에 보장된 사상과 표현의 자유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존중되어야 한다. 역사적 사실이 부정확하거나 왜곡된 것일 경우 그것을 바탕으로 한 평가는 존중받을 수 없다.최근 정치권에서 1945년 일본이 항복한 후 남한에 들어온 미군이 점령군으로 들어오고 친일 세력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서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느냐를
3·1절, 광복절을 맞으면 매년 새롭게 발굴하거나 결정한 독립운동 관련 사실 등이 공개되고 있는데 올해 3·1절 102주년에는 1919년 3월1일 일어난 독립만세 운동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 미국 AP통신 임시특파원이 살았던 서울 집이 전시관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이 공개되었다.서울시는 최근 미국 AP통신 임시특파원 앨버트 W. 테일러(1875∼1948)가 서울에 짓고 살았던 가옥 ‘딜쿠샤’(Dilkusha)의 원형을 복원해 3.1절에 개방한다고 밝히면서 사전 언론 공개 행사에는 테일러의 손녀 제니퍼 테일러가 참석했다고 밝혔
01 동아일보는 1920년 4월1일 창간했다. 서울신문, 조선일보에 이어 대한민국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일간지다. 동아일보 창간호 사시는 ‘민족의 표현기관으로 자임’, ‘민주주의 지지’, ‘문화주의 제창’이었다.02 초대 사장은 박영효. 사실상 경영자는 호남 지주 인촌 김성수. 김성수는 전라북도 출생으로 1951~1952년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이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지만 항일과 친일, 양면적 인물이다. 03 1920년 5월 6회에 걸쳐 ‘조선 부모에게 고함’이란 논설을 실었다. 유교사상 인습에 사로잡힌 계층을 비판했다. 전국
2020년은 한국언론의 역사에서 특별한 해임에 분명하다. 2019년 3·1운동 100년, 대한민국 100년에 이어 2020년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각각 100년을 맞이한다.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두 신문 모두 3·1운동의 직접적인 결과물로 탄생한 것인데, 그 100년을 맞는 오늘 주변에서 축하하는 사람은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어인 일일까? 나를 포함하여 내 주변의 사람들이 편협하고 삐뚤어져서일까, 아니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100년간 쌓은 죄업이 하늘을 찌르기 때문일까? 이제 3·1 운동 무렵만큼이나 모든 것이 정신없이 변
구한말을 다룬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10회에 이런 장면이 있다. 노비 출신 유진 초이(이병헌 분)가 “귀하가 구하려는 조선엔 누가 사는거요. 백정은 살 수 있소? 노비는 살 수 있소?”라고 묻자 고애신(애기씨, 김태리 분)은 “그는 그저 제게 물었을 뿐인데 물은 이도 물음을 받은 저도, 다쳐서요”라며 얼어붙은 강바닥에 주저앉을 뿐 유진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경기도 주최로 19일 수원 경제과학진흥원에서 열린 ‘3·1운동 100년, 깨어있는 시민의식을 위한 경기도 명사초청 역사 콘서트’에서 이 장면을
우린 너무 몰랐다 (김용옥, 통나무, 2019.1.28, 399쪽)..2019년2월1일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계속되던 1945년 12월27일 동아일보는 1면 머리에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철학자 도올 김용옥이 최근 자신의 책 ‘우린 너무 몰랐다’에서 이 희대의 오보, 혹은 의도된 대중선동 보도가 한반도의 역사를 엉망으로 만들어놨다고 지적했다. 동아일보는 삼상회의 논의의 핵심을 ‘신탁통치’라고 짚었다. 그 내용은 ‘38선 분할점령’이란 인상을...
김동연 전 부총리는 지난 8일 “국회에서 또 뵐 거다. 나중에”라고 말했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최근 “물귀신처럼 김 부총리까지 세트로 책임 묻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김 전 부총리를 엄호했다. 정진석 한국당 의원도 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김 부총리의 지혜를 빌려 달라”고 호소했다. 매일경제신문은 지난 10일자 5면에 ‘벌써부터… 한국당 러브콜 받는 김동연’이란 제목으로 보도했다. 그야말로 ‘벌써부터’다. 사실 김 전 부총리는 이명박정부 때 청와대 경제수석실과 국정기획수석실에서 일했고 기획재정부 2차관까지 지냈다. ...
지난 15일 광복절 73주년을 앞두고 일부 자유한국당 의원들과 보수진영에선 ‘건국 70주년’을 주장하며 또 해묵은 이념 논쟁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들이 그토록 치켜세우는 이승만 전 대통령마저 ‘1919년 건국’의 창시자이자 주도자였다는 역사학계 발표가 계속 나오면서 1948년 8월15일 ‘건국절’ 제정 요구는 더욱 무색해졌다. 지난 22일 한국근현대사학회에서 주최로 동국대 서울캠퍼스 법학관에서 열린 ‘독립운동, 그 기록과 기념의 역사’ 학술회의에선 최근 언론 보도로 주목을 받았던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교수(60)의 주제 발표가...
미국의 퓨리서치 센터가 2018년 1월에 발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언론이 ‘공정하지 않다’는 응답이 72%로 ‘공정하다’는 응답(26%)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한국 언론에 대한 불신의 근원은 정파신문이라는 데 있다. 정치적 편향을 상수로 하고 취재·보도를 하는데 공정할 수가 없다. 정파적 보도를 선도하는 조선일보에게 공정보도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왜 그럴까? 조선일보의 ‘친일 유전자’, 근현대사 맥락에서 보는 조선일보의 실체 조선일보는 친일의 역사를 유전자로 하여 태어났으며 해방...
1945년 12월27일자 동아일보 1면에 실린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이란 기사는 거짓이었다. 12월16일 모스크바에서 소련·미국·영국 3국외상이 만나 조선 문제를 논의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를 전하는 해당 보도는 실제 미국이 제안한 신탁통치를 소련이 제안한 것처럼 왜곡했다. “번즈 미 국무장관은 출발 당시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해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3국간에 어떤 결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 선언에 의...
[일파만파 왜곡의전당 3 : 동아일보, 역사를 바꾼 18자 괴담] #1 1948년 한반도에는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됩니다. #2 해방 후 3년, ‘찬탁-반탁’싸움의 허무한 결말이었고 분단 고착화의 시발점이었습니다. #3 역사엔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이 보도가 없었다면… #4 미국·소련·영국의 ‘모스크바 3상 회의’가 막바지일 때 동아일보가 1면 머리에 올린 18글자.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5 다른 언론들도 이 18글자를 그대로 베꼈습니다. #6 실제로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를 제안한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