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

동아일보 100년 돌아본 50가지 사건
동아일보 100년 돌아본 50가지 사건
1920년 4월1일 창간과 ‘일장기 말소’ 사건
자유언론실천선언과 해직 기자들

01. 동아일보는 1920년 4월1일 창간했다. 서울신문, 조선일보에 이어 대한민국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일간지다. 동아일보 창간호 사시는 ‘민족의 표현기관으로 자임’, ‘민주주의 지지’, ‘문화주의 제창’이었다.

02. 초대 사장은 박영효. 사실상 경영자는 호남 지주 인촌 김성수. 김성수는 전라북도 출생으로 1951~1952년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이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지만 항일과 친일, 양면적 인물이다. 

03. 1920년 5월 6회에 걸쳐 ‘조선 부모에게 고함’이란 논설을 실었다. 유교사상 인습에 사로잡힌 계층을 비판했다. 전국 유림들은 동아일보 불매 운동을 전개했다. 박영효가 사장 취임 2개월 만에 물러나고 김성수가 제2대 사장이 됐다.

04. 1921년 민간 신문 최초로 윤전기 1대를 도입했다. 윤전기에 의한 대량 인쇄가 시작됐다.

05. ‘무정’ 소설가 이광수는 1923년 5월 동아일보에 입사한다. 이광수는 1924년 1월 5회에 걸쳐 ‘민족적 경륜’이라는 논설을 쓴다. 이 논설은 무장 항일 노선의 무모함을 지적했다.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의 자치 운동을 주장했다. 

06. 동아일보 구사옥은 1926년 일본인 건축가 나카무라 마코토가 설계했다. 구사옥은 현재 일민미술관과 신문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구사옥은 서울시 유형문화재다. 현재 본사는 광화문 구사옥 옆 동아미디어센터. 

▲ 일민미술관. 사진=서울건축가이드 홈페이지
▲ 일민미술관. 사진=서울건축가이드 홈페이지

07. 1921년 3월4일자 사설에서 “재래의 한국 정치는 암흑 정치요, 총독부 정치는 문화 정치”라고 치켜세웠다. 총독부는 우리에게 “훌륭한 도로”, “훌륭한 재판”, “훌륭한 행정관”, “훌륭한 교육 진흥”을 선물로 줬다고도 했다. 

08. 첫 여성 기자는 1924년 입사한 허정숙 기자다. 같은 해 조선일보 여성 기자 최은희가 입사한 후 2개월이 지나 채용된 여성 기자였다. 이광수 부인 허영숙도 동아일보 기자로 일했다. 

09. 동아일보가 친일 사설만 실은 건 아니었다. 1926년 이완용 사망 다음날인 2월13일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사설을 실었다. “살아서 누린 것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이제부터 받을 일 이것이 진실로 기막히지 아니하랴. 부둥켰던 그 재물은 그만하면 내놓지.”

10. 1927년 9월부터 도쿄와 오사카 지국을 설치해 일본 광고를 직접 유치했다. 이 같은 광고 수주는 다른 신문들에도 확산됐다.  

11. 1928년 4월1일 ‘글 장님 없애기 운동’을 벌이겠다고 선언했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문맹 타파와 한글 보급 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을 벌였다. 

12. 월간지 ‘신동아’가 1931년 11월 창간됐다. 창간호 발매부수는 2만부였다. 

13. 1932년 이봉창 의사가 일왕 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던졌다. 1월10일 동아일보는 1면 ‘대불경 사건 돌발’ 제목으로 이봉창의 의거를 비방했다. “폐하께옵서는 무사”하다며 “범인은 리봉창”이라고 보도했다. 

14. 1936년 8월24일 베를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의 가슴에 붙어있던 일장기를 지웠다. 조선총독부는 분노했다. 송진우 사장은 사임했다. 8월29일자로 무기한 정간 조치됐다. 

15. 1937년 7월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동아일보는 중국을 비방하면서 일제 승리를 위해 조선민족도 임무와 성의를 다해야 한다고 보도했다.

16. 1938년 1월1일 1면 일왕 사진을 실었다. 이런 보도가 1940년까지 지속됐다. 일왕 생일인 천장절(4월29일)마다 일왕 부부 사진을 실었다. “천황폐하”를 찬양하고 “황은의 광대심후함”을 보도했다. 

▲ 동아일보 1938년1월1일. 천황 부처의 사진을 1면 머리기사로 실었다. 사진=동아일보 디지털 아카이브
▲ 동아일보 1938년1월1일. 천황 부처의 사진을 1면 머리기사로 실었다. 사진=동아일보 디지털 아카이브

17. 1938년 4월 일제는 징병제 전 단계로 지원병제를 실시했다. 4월3일 ‘양 제도 실시 축하’라는 사설을 실었다. ‘양 제도’란 육군 지원병 제도와 조선 교육령을 말한다. “지원병 제도의 실시는 조선 민중에게는 병역 의무를 부담시키는 제1보”라며 특혜인 것처럼 보도했다.

18.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일제는 전시 체제에 돌입했다. 1940년 8월10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폐간됐다. 당시 동아일보 직원은 902명이었다.

19. 1937년 7월 중일 전쟁 후 김성수의 친일 행각이 시작됐다. 1943년부터는 노골적이었다. 보성전문학교 교장 자격으로 1943년 8월5일 징병제를 찬양하는 논설을 ‘매일신보’에 기고했다. 징병제와 학병제를 독려했다. 

20. 1945년 12월28일 열린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오보를 냈다. 동아일보는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오보였다. 좌우대립 시초가 됐다. 

▲ 동아일보 1945년 12월28일자 1면기사.
▲ 동아일보 1945년 12월28일자 1면기사.

21. 제주 4·3항쟁을 ‘폭동’으로 보도했다. 1948년 4월6일 “제주도서 총선거 반대 폭동”이라고 보도했고, 4월17일 “제주도에 무장한 폭도, 게릴라전 전개, 경찰은 교통 차단하고 만전의 포진”이라고 썼다. 

22. 1948년 김구를 비난하며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남한 단독 총선거를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고 촉구한 언론이다. 1948년 2월3일자 사설 제목은 ‘총선거를 단행하라’였다. 선거일인 5월10일까지 유사한 사설을 열 차례 게재했다.

23. 동아일보 사사는 “1948년 5·10선거를 이틀 앞둔 5월8일 동아일보 사옥은 좌익의 방화로 편집국과 공장이 몽땅 불에 타버리기도 했다”고 기록했다.

24. 1950년 6월28일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다. 동아일보는 하루 전 27일 ‘적, 서울 근교에 접근, 우리 국군 고전 혈투 중’이라는 호외를 300부 가량 내고 종간했다. 그해 10월4일 복간했다. 

25. 김성수는 1951년 제2대 부통령에 선출됐으나 부산정치파동을 계기로 이승만 대통령과 틀어졌다. 1년 만에 사임한다. 1950년대 대표 야당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 동아일보 창업주 김성수(왼쪽)와 이승만 전 대통령.
▲ 동아일보 창업주 김성수(왼쪽)와 이승만 전 대통령.

26. 조봉암 사법 살인에 방관했다. 동아일보는 1958년 1월 진보당 사건에 “진보당 간부급 여러 명이 북의 괴뢰들과 연결돼 있다. 조봉암의 집에서 김일성의 편지가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이후 조봉암에게 사형이 집행됐다. 

27. 1961년 5월16일 동아일보는 호외를 통해 군사 쿠데타를 “반공혁명”이라고 지지했다. 다음날 ‘당면 중대 국면을 수습하는 길’이라는 사설에서 쿠데타 원인이 장면 정권 무능에 있다고 했다.

28. 1963년 4월25일 민영 동아방송 DBS가 개국했다. 모기업은 동아일보다. 

29. 1964년 7월30일 신문과 방송을 규제하는 언론윤리위원회법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그해 8월17일 한국기자협회가 탄생했고 동아일보도 정권 반대편에 섰다. 정권은 부처와 산하 금융기관의 신문 구독을 중지토록 압력을 가했다. 

30. 1968년 3월8일자 ‘한은, 정부에 통화량 억제 긴축 정책 건의’ 기사에서 비관적 경제 전망을 보도한 기자들이 중앙정보부로 연행됐다. 같은 해 ‘신동아’ 12월호에 경제 전망을 비판적으로 다룬 기자도 역시 구속 기소됐다. 동아일보는 압력에 굴복해 12월7일 사고를 게재했고 동아일보 주필과 신동아 주간과 부장 사표를 수리했다. 

31. 1971년 3월26일 서울대 학생회장단 30여명이 동아일보에서 ‘언론화형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에는 “동아야 너도 보는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올라만 가는 조선의 저 추잡한 껍데기를. 너마저 저처럼 전락하려는가”라는 내용이 담겼다.

32. 1974년 10월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기자들은 “오늘날 우리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하고 “자유언론은 어떠한 구실로도 억압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것”이라 밝혔다.

33. 1974년 12월25일 동아일보 광고 지면은 백지로 나갔다. 박정희 정권이 동아일보 광고주를 회유, 협박했다. 12월30일 광고국장 김인호는 격려 광고를 요청하고 국민들이 백지를 격려 광고로 채우기 시작했다. 1975년 1월1일 동아일보에 ‘언론 자유를 지키려는 한 시민’의 격려 광고가 실리는데 후일 이 광고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게재한 것으로 밝혀졌다. 

34. 1975년 동아일보 기자들 대량 해직됐다. 3월17일 경영진은 150여 명의 폭력배를 동원해 회사에서 농성 중이던 기자 150여 명을 내쫓는다. 113명이 강제 해고됐다. 해직 기자들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동아투위를 결성했다. 

35. 1980년 5월19일부터 닷새간 사설을 싣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최소한의 양심과 저항의 표시”라고 평가하기도 했지만 5월31일에는 신군부가 발표한 ‘광주사태의 전모’를 그대로 받아썼다. 광주시민을 ‘폭도’로, 항쟁을 ‘난동’ 혹은 ‘폭동’으로 표기했다. 

36. 1980년 8월11일 ‘한국 새 세대의 지도자 필요’, 8월23일 ‘40대 이하 자주적 민주세대의 등장, 새 시대가 바라는 새 지도자 상’, 8월29일 ‘새 시대의 전두환 대통령’ 전두환 옹호 기사가 연속 보도됐다. 

▲ 1980년 8월23일 동아일보 1면. 정든 군을 떠나 새시대 새역군으로 라며 전두환 대장 관련 보도. 사진=동아일보 디지털 아카이브
▲ 1980년 8월23일 동아일보 1면. 정든 군을 떠나 새시대 새역군으로 라며 전두환 대장 관련 보도. 사진=동아일보 디지털 아카이브

37. 1986년 6월 ‘부천 성고문 사건’에 검찰수사 발표 전까지 1~2단으로 축소 보도했다. 7월17일에는 “검찰 ‘성적 모욕 없었다’ 발표, ‘폭언과 폭행 없었다’”고 보도했다. 사회 2면에 “혁명을 위해 성도 도구화했다”는 주장을 그대로 받아썼다. 

38. 1987년 1월 박종철 사건 후 ‘고문근절 추방 캠페인’ 특집 기사를 냈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은 중앙일보가 1월15일 처음으로 보도했지만, 윤상삼 동아일보 기자는 박종철을 죽음으로 몬 고문의 수법이 물고문이라는 사실을 밝혀내며 정권에 타격을 가했다.

39. 1989년 3월16일 서울지하철노조의 파업을 비판했다. 파업 하루 전 “권리란 무한추구가 가능한 가치가 아니라 칼집 속에 들어있는 칼처럼 지닌 사람의 무게를 지켜주는 장식”이라며 “꼭 쓸 때가 아닌 경우 빼어드는 칼(권리)은 자칫하면 흉기가 될 수 있다”고 썼다. 

40. 1991년 8월 동아일보 사장 김병관은 편집국장 김중배를 경질했다. 김중배는 “언론은 권력과의 싸움에서 보다 원천적인 제약 세력인 자본과의 힘겨운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김중배 선언’이다. 

41. 1993년 4월1일부터 석간에서 조간으로 전환했다. 석간신문 조간화는 세계적 추세였다. 동아일보는 조간으로 돌아서기 전 다른 신문처럼 매주 4면 분량에 이르는 대입 학습지 서비스를 실시했다. 

42.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3년 8월15일 동아일보 광복 48주년 특별기고에서 김성수를 옹호했다. “인촌은 비록 감옥에 가고 독립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어떠한 독립투쟁 못지않게 우리 민족에 공헌을 했다고 나는 믿는다. 인촌은 동아일보를 창간해 우리 민족을 계몽해 갈 방향을 제시해 줬고 큰 힘을 줬다.” 

43. 2000년 삼성과 사돈을 맺었다. 당시 동아일보 회장 김병관의 차남 김재열과 삼성 회장 이건희의 차녀 이서현이 결혼했다. 

44. 2000년 9월9일 ‘대구, 부산에는 추석이 없다’ 기사. 지역 감정을 조장했다. 부산과 대구 지역이 엉망이라는 기사였는데, 실제 통계는 광주지역 부도율이 가장 높았다. 허위 기사를 이용한 지역감정 조장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45. 2001년 언론사 세무 조사가 시작됐다. 6월29일 조선일보 사장 방상훈, 동아일보 전 명예회장 김병관 등이 구속됐다. 그해 7월 김병관 부인인 안경희씨가 투신 사망했다.

46. 2008년 8월2일 “14년 무파업 ‘선물’ 7년 파업의 ‘눈물’”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노조 파업 때문에 콜트악기 공장이 폐업했다는 보도였다. 허위 보도였다. 대법원 판결로 정정 보도가 이뤄졌다. “노조의 파업은 대부분 부분 파업이어서 회사 전체의 매출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은 사실이 밝혀졌다.”

47. 신동아는 2009년 2월호에서 정부 비판 누리꾼으로 유명했던 미네르바 단독인터뷰를 내보냈다. 그러나 실제 미네르바가 아니었다. 동아일보는 사과문을 냈고, 신동아는 그해 4월호에서 ‘미네르바 오보 진상 조사 보고서’를 내야 했다. 

48. 동아일보 2013년 1월22일 1면에 “간첩 정체는 탈북자 행세한 화교였다” 기사는 오보였다. ‘유우성 간첩 조작’ 사건이다. 보수정권과 이를 뒷받침하는 언론에 의해 간첩으로 몰린 유씨는 국정원 간첩 조작 피해자였다.  

49. 삼성 장충기 문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동아일보 고문이었던 배인준씨는 장충기에게 만남과 통화를 요청하는 문자를 보냈다. “제 거취에 관해 말씀드리고 한선재단에 관해 지도 받고 싶다.” 

▲ 뉴스타파 “장충기문자 대공개-기사 보고, 합병 축하… ‘장충기문자’ 속 언론인들” 보도 갈무리. 사진=뉴스타파 유튜브 갈무리
▲ 뉴스타파 “장충기문자 대공개-기사 보고, 합병 축하… ‘장충기문자’ 속 언론인들” 보도 갈무리. 사진=뉴스타파 유튜브 갈무리

50. 2017년 광고 영업담당 직원이 영업 실적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11층 아파트에서 투신했다. 다행히 목숨은 구했다. 동아일보 간부의 과도한 실적 압박과 욕설, 인격 모독 발언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벌어진 일이다. 이 간부는 정직 3개월을 받고 원직 복귀했다.  

 

※ 참고 : 동아일보사, 동아일보 디지털아카이브, 강준만 ‘한국 언론사’, 최준 ‘1987’, 자유언론실천재단 ‘조선·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 최악 보도 100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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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2020-04-01 12:05:38
13. 1932년 이봉창 의사가 일왕 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던졌다. 1월10일 동아일보는 1면 ‘대불경 사건 돌발’ 제목으로 이봉창의 의거를 비방했다. “폐하께옵서는 무사”하다며 “범인은 리봉창”이라고 보도했다. <<< 역사는 반복되고, 과거와 현재는 변한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