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3주년이 되는 올해는 미국이 일제의 한반도 침탈을 묵인한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 117주년이기도 하다. 3·1운동을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결부시키는 이유는 이 밀약이 맺어진 뒤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본격화되고 3·1운동 당시 미국이 이 운동을 철저히 외면했기 때문이다. 3·1운동 103주년을 맞아 대부분의 언론이 당시를 조명하면서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미국의 조선 독립 운동 외면 사실을 제대로 소개하지 않는 것은 역사 왜곡에 가깝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1905년 7월 29일 당시 일본 총리 가쓰라와 미 육군 장관 태프트가 비밀리에 도쿄에 만나 만든 것으로 미국은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권을,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을 각각 인정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 밀약이 맺어진 수개월 후인 1905년 8월 일본은 제2차 영일동맹에 이어 9월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반도 지배권을 세계열강들로부터 인정받게 되었다. 일본은 그로부터 불과 몇 달 후인 11월 17일 을사늑약을 강요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했으며, 미국의 묵인 아래에 조선반도 식민침략을 본격화했다.

▲ 일본 제국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왼쪽)와 미합중국 전쟁부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 일본 제국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왼쪽)와 미합중국 전쟁부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일제는 1910년 국권을 강탈한 후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근대적 기본권을 박탈하고 폭압적인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특히 1910년부터 1918년 사이에 진행한 토지 조사 사업으로 농민들의 토지를 강탈하는 등 경제적 폭압을 일삼아, 한국 사회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불만과 저항이 거세졌다.

1918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밝힌 민족자결주의와 러시아 10월 혁명 성공 후 레닌이 발표한 '민족 자결 원칙', 만주 지린에서 독립 운동가들이 발표한 대한 독립 선언서(무오독립 선언)에 이어 1919년 도쿄에서 일본 유학생들이 2·8 독립 선언서를 발표해 독립운동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그 결과 1919년 3월 1일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독립을 선언하는 비폭력 운동인 3·1 만세 운동 또는 3·1 혁명이 일어났다.

미국 국무성은 3·1 운동이 발생하자 그 다음 달인 4월 일본주재 미 대사에게 "서울주재 미 영사에게 조선 독립 운동가들이 독립운동을 하는 것을 미국이 도우리라는 믿음을 주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할 것과 일본 정부당국이 조선의 독립운동에 미국이 동조한다고 의심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Frank Baldwin, "Participatory Anti-Imperialism: The 1919 Independence Movement," Journal of Korean Studies, 1(1979): 123-61; Dae-Yoel (Tae-yol) Ku, Korea Under Colonialism: The March First Movement and Anglo-Japanese Relations (Seoul, 1985), 37-303.>.

▲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 시위를 하는 모습. 사진=나무위키
▲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 시위를 하는 모습. 사진=나무위키

약 3개월가량 전국적으로 발생한 독립운동을 제압하기 위해 일제는 화성 제암리 사건과 같은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고 유관순 열사 등 숱한 이가 이 과정에서 순국했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집회인수가 106만여 명, 사망자가 7509명, 구속된 사람이 4만7000여 명이었다. 조선총독부는 3·1 운동을 계기로 군사, 경찰을 앞세운 강경탄압정책에서 민족분열책인 일명 문화통치로 정책 기조를 바꿔, 조선어로 된 일간신문 발생을 허가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미국 윌슨 등 미국 정부 종전까지 일제의 한반도 강점 청산 지속적으로 외면

미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측면도 있었지만 이를 주장한 윌슨 대통령은 당시 일제의 한반도 강점을 포함한 서구 열강 등의 세계 지배구조에 문제를 제기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 특히 당시 일본이 전승국이었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여서 조선 독립 문제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었다. 윌슨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세계의 약소민족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자 그 적용 범위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및 터키에 속했던 주민과 영토, 그리고 독일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식민지로 국한한다고 수정했다.

윌슨은 최종적으로 강화회의에 제출할 국제연맹 규약에서 민족자결주의라는 용어를 아예 삭제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주장은 국내에서는 그 속셈을 모르고 큰 기대를 했고 오늘날에도 그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나 당시 상황을 정확히 살펴 객관적인 평가를 해야 할 것이다.

▲ 우드로 윌슨 (Woodrow Wilson) 미국 대통령.
▲ 우드로 윌슨 (Woodrow Wilson) 미국 대통령.

3·1 운동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승전국 식민지에서 일어난 최초의 반제국주의 운동이면서 민족적인 항일 운동으로 조선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3·1 운동을 계기로 다음 달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미국 정부는 1920년 이후 1930년대 말까지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표한 적이 없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하면서 미국과 태평양전쟁에 돌입했다. 이승만이 임시정부 수반을 하면서 미국 정부에 임시정부를 조선의 합법적 정부로 인정해 달라는 청원을 했지만 미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Chairman of the Korean Commission in the United States (Rhee) to the Secretary of State, 7 February 1942, FRUS, 1942, I, General, The British Commonwealth, the Far East, 859-60; The Secretary of State to the Ambassador in China (Gauss), 1 May 1942, Ibid., 873-75.>.

그러다가 미국은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영국, 중국 지도자들과 만나 조선을 적절한 조치를 통해 독립하도록 할 것을 선언했고 소련의 스탈린 수상도 이에 동의했다<FRUS, The Conferences at Cairo and Tehran, 1943, 448-49>. 당시 열강 지도자들은 ‘전쟁이 끝나면 승전국들이 조선에 대해 조선인이 독립할 자질을 갖췄다고 판단될 때까지 수년 또는 더 긴 기간 동안 신탁통치를 한다.’는 것에 합의했을 뿐 구체적인 독립 추진 계획 등은 전혀 협의하지 않았다. 이들 연합국 지도자들은 서로 자국의 이익을 챙기려 혈안이 되어 있었고 한반도에서도 이익을 나눠 갖기를 희망하면서 서로 견제하는 태도만을 취했다.

일본이 미국의 핵 공격을 받고 항복했는데 당시 미국을 포함한 연합군은 한반도를 일본의 식민지의 하나로 분류해 일본 본토에 대한 점령정책과 동일한 원칙을 적용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미국의 조선에 대한 인식을 보면 가스라-테프트 밀약에 의해 일본의 한반도 강점에 동의한 역사적 사실의 연장선에서 머물러 있었는데 그것은 한반도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공식 문건에 아래와 같이 기록된 것에서도 확인된다 - “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해 일본의 보호령이 되었고 그 이후 대한제국은 일본 통감에 의해 간접적으로 지배당했다. 그 후 1910년 일본은 한일합병조약에 의해 일본에 병합되었다. 그 후 일본은 대한제국을 대외적으로 조선으로 불릴 것이라고 선언하고 총독의 지배를 받도록 했다”<"Treaty of Annexation". USC-UCLA Joint East Asian Studies Center.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11 February 2007. Retrieved 19 February 2007>.

미국은 1945년 일본 항복 이후 한반도 남쪽에 군대를 진주시키고 발표한 맥아더 포고문 제1호에서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 임을 분명히 밝히고 북위 38도선 이북에 들어온 소련군과 대치했다. 미군의 군사통치체인 미군정은 1919년 중국 상하이에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해방직후 독립정권을 수립하기 위해서 선포된 여운형 중심의 인민공화국 등 모든 정치단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국의 일제 미청산, 미 정부의 동북아 정책 강행 결과

미국은 일제의 통치기구와 친일파 행정관리들을 접수해 군정을 선포한 뒤 일본총독부 소속 일본 간부들을 미군정의 고문으로 위촉하고 과장급 아래의 일본인 실무자들은 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 근무를 하게 했다. 미군정은 이어 한국인으로 일제 치하에서 공공기관에 근무한 사람들을 원래 자리로 복귀시켰다. 미국의 이런 조치는 미국 정부가 2차 대전이후 동북아에서 일본을 소련세력을 견제할 교두보로 삼을 목적으로 일본 본토에서 취한 일본인의 환심을 사려는 점령정책과 거의 동일했다. 한반도를 일본의 식민지로 해석한 결과였는데 이는 가쓰라-테프트 밀약에서 비롯된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 이승만 전 대통령.
▲ 이승만 전 대통령.

1948년 이승만 정권 등장까지 지속된 미군정의 이런 조치는 결국 일제 잔재를 청산치 못하게 만든 가장 핵심적 요인의 하나로 지적된다. 국내에서는 일제 미청산의 이유를 이승만과 친일파에 주목해 제시할 뿐 미국 정부가 맥아더 사령관을 시켜 실시한 동북아 정책의 결과라는 점을 거의 언급치 않는 것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접근이라고 보기 어렵다.

미국은 일제가 항복한 이후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독도 문제를 제외함으로써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근거를 제공했다. 미국은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미군을 슈퍼 갑으로 공인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조인된 1953년 이후 남한의 군사적 주권을 장악했다. 남한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거의 절대적 수준이 되면서 미 군정기에 발생한 제주 4.3, 한국전쟁 기간 동안의 민간인 학살, 광주항쟁 등에서 미국이 행한 역할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치권이나 언론이 이에 대해 침묵하는 관행이  3·1 운동 103주년을 맞아 여전한 것은 서글프고 분통터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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