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광복절을 맞으면 매년 새롭게 발굴하거나 결정한 독립운동 관련 사실 등이 공개되고 있는데 올해 3·1절 102주년에는 1919년 3월1일 일어난 독립만세 운동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 미국 AP통신 임시특파원이 살았던 서울 집이 전시관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이 공개되었다.

서울시는 최근 미국 AP통신 임시특파원 앨버트 W. 테일러(1875∼1948)가 서울에 짓고 살았던 가옥 ‘딜쿠샤’(Dilkusha)의 원형을 복원해 3.1절에 개방한다고 밝히면서 사전 언론 공개 행사에는 테일러의 손녀 제니퍼 테일러가 참석했다고 밝혔다(연합뉴스 2021년 2월25일). 앨버트 테일러는 1896년 조선에 들어온 광산 사업가였는데 AP통신 특파원으로도 활동하면서 3·1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을 해외에 보도했다.

그러면 3·1 독립만세 운동에 대해 미국 정부는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이는 1919년 3월14일 미국무부 발표한 성명서에 나와 있는데 3·1운동을 왜곡 폄하하는 내용이었다. 미국무부는 3·1운동을 조선인들이 언론 자유와 기타 불만 사항을 시정해 달라며 소요를 일으켰다고 진실을 외면하고 조선인을 깎아내리는 공식 성명서를 발표했다. 다음은 성명서 전문이다(뉴시스2014년 2월27일).

--3월12일 서울을 비롯한 지방에서 사실상 시위가 중단됐으며 공식적으로 시위 참여자의 15%만이 기독교 신자로 파악됐다. 시위 지도자들은 새로운 정치적 종교계의 사람들이며 외국 선교사들은 독립 운동에 관계되지 않았다는 전문을 국무부는 받았다. 시위의 목적은 언론의 자유와 청원권, 학교에서 한국어 학습, 기타 불만 사항을 시정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 국무부의 성명서는 불과 나흘 만에 심각하게 왜곡하고 진실을 외면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뉴욕 타임스는 1919년 3월18일 헤드라인을 ‘미선교단 한국의 평화적 독립 운동 설명’, 부제를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잔인성 고발’ ‘한국 전역에서 공포정치(Reign of Terror) 자행’이라고 단 기사를 올렸다.

미 국무부가 3·1 운동에 대해 조선민중이 독립을 원한다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넣지 않고 부수적이거나  부정적인 내용을  공식 발표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그 이유는 미국 정부의 비밀 자료로 분류되었다가 공개된 미 정부 극비서류에서 확인된다. 그것은 미국과 일본이 1905년 맺은 ‘미국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한다'는 내용의 ‘가쓰라·태프트 비밀협약’ 때문이었다. 미국 정부는 3·1 운동이 일어나자 서울 주재 공관에 미국이 만세운동을 지지하는 인상을 일본에 주지 말도록 당부하는 전문을 보내기도 했다.

미국이 3·1 운동에 대해 취했던 태도는 그 뿌리가 ‘가쓰라·태프트 비밀협약’ 이전 미국이 서울에 공관을 최초로 설치한 1882 년 이후  20여 년간 조선과 일본 간에 발생한 주요 정치적 사건 사고에서 미국이 취했던 소극적이고 방관적인 태도에서 확인이 된다.

이런 사실은 미국의 역사학자 John Edward Wilz가 1992년 미 공군사관학교 HARMON MEMORIAL LECTURES 프로그램에서 ‘1850~1950년까지 미국의 한국에 대한 정책’이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미국 역대 정부 비밀문서를 공개하면서 밝혀졌다. 미국 콜로라도주 콜로라도스프링스에 소재하는 공군사관학교에서 운영하는 HARMON MEMORIAL LECTURES 프로그램은 매년 군사학에 저명한 학자나 전문가를 초빙해 강연을 하고 그 내용은 전 세계 도서관이나 관련 학자에게 배포된다.

이 글은 John Edward Wilz의 강연 내용과 위키피디아 등의 자료 등을 종합한 것으로 조미수교가 이뤄진 1882년부터 2차 대전 종전이후 1950년대 초년까지의 미국의 대조선 및 대한 정책을 정리했다.

미 정부, 서울주재 공사에게 민비 시해 사건 중립 지키라 지시

미국은 1882년 조미 수호통상조약에 따라 조선과의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당시 청나라는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막고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조선과 수교하도록 주선했다. 미 슈펠트 제독은 조선의 종주국인 청나라에 먼저 간 뒤 미군 전함 스와타라 호를 타고 중국 산둥성의 옌타이 항을 출발해 황해를 거쳐 1882년 5월 22일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그 날 제물포 바닷가의 임시장막에서 조선과 미국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이 열려 조선의 전권대사 신헌과 미국전권대표인 로버트 슈펠트 해군제독이 마주 앉았다.

그러나 참으로 해괴한 광경이 벌어졌다. 조약 문서에 도장은 신헌이 찍었지만 조약의 교섭권을 행사한 쪽은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이었다. 교섭과정에서도 청나라 이홍장은 ‘조선은 청나라의 속방’이라는 조문을 조약문에 삽입하려 했고 조선조정은 이를 적극 찬동했다. 조선 조정은 일본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본 것인데 자주에 대한 기본 상식이 없는 한심한 모습이었다. 조선 조정은 미국과 통상조약 체결 이후 미국이 조선을 다른 강대국의 간섭과 압박으로부터 보호해줄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는데 이 또한 어리석은 태도였다.

조선은 미국과 통상 조약을 체결한 뒤 영국, 독일, 러시아 등과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조약의 내용은 불평등한 내용으로 이들 외국에게 치외 법권, 최혜국 대우를 제공했다. 이를 통해 조선에 대한 열강의 침입이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일본이 1894년 7월~1895년 4월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조선에 대한 장악력을 강화한 뒤 미국은 엄격한 중립을 유지했다. 일본을 견제하거나 한반도 침략을 제어할 어떤 의지나 행동도 보여주지 않았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의 자객들이 명성황후의 침소인 경복궁 옥호루로 쳐들어가 황후를 시해하고 시신을 불태운 사건이 발생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공관이 미국 공사에게 일본에게 고종황제를 보호하고 그 지위를 유지하도록 촉구하자고 제의했을 때 미국무부는 그에 반대하면서 중립을 지키라고 지시했다. 당시 리처드 올네이 국무장관은 서울 공관에 전문을 보내 엄하게 질책했다.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은 공사의 업무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고 미 국법에 따르면 불법이다. 공사는 자신의 업무가 미국 시민과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타국의 내정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민비가 시해된 수개월 뒤인 1896년 2월11일 새벽, 고종은 극비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아관파천을 계기로 친러파가 정권을 장악했고 러시아는 조선에 대한 접근 책을 강하게 펴면서 고종과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고종은 러시아를 움직여 일본을 견제하고 싶어 했다. 고종이 1897년 황제에 즉위하자 미 국무장관 존 셔먼은 서울의 미국 공사에게 중립을 지키라는 전문을 다시 발송했다.

“공사는 러시아와 일본 간의 긴장이 고조되는 것에 유의해 처신에 신중을 기하라. 공사는 어떤 경우에도 충고나 제안 또는 영향력을 행사하지 말고 최대한 신중에 신중을 기하라.”

고종황제는 1899년 미국에게 서구 세력이 조선의 자주권을 보장하도록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윌리엄 매킨리 미 대통령과 존 헤이 국무장관은 서울의 미국 공사 호레이스 알랜에게 고종의 요청을 거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900년 일본주재 조선 공사가 동경의 미국 공사 알프레드 버크에게 미국이 서구 열강들이 조선의 독립과 중립을 보장하는데 앞장서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버크 공사의 답변은 냉담했고 종래의 내용을 반복했을 뿐이다.

“그런 요구는 워싱턴에 주재하는 조선 공사가 미국 정부에 직접 보내는 것이 타당하다. 이는 존 헤이 국무장관의 승인을 받은 답변이다.”

영국이 1902년 1월 영일동맹을 통해 일본에게 조선에 대한 특권을 인정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만주에서 러시아의 단독지배를 인정하지 않고, 제국주의 열강과의 협조 하에 조선 지배뿐 아니라 중국 분할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일본과 영국은 교섭을 거쳐 1902년 1월 30일 영일동맹을 체결했다. 이에 대항해 러시아는 3월에 러시아-프랑스 공동선언을 발표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조선이 일본의 침략으로 독립을 상실할 위기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챙기는 조치를 취하는 약삭빠른 태도를 드러냈다. 국무부가 1902년 11월 서울 주재 미 공사에게 보낸 공문에 그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조선과 1882년 맺은 통상조약의 개정을 위한 회담을 개시해 미국에 대한 통상권을 확대하라.”

그러나 조선은 이를 거부했다.

미국은 1903년 조선에게 중국 동북부에 있는 단둥 항의 부근에 있는 압록강의 의주항을 미국에게 개항할 것을 제안했다. 영국과 일본, 러시아는 각각 다른 항구의 개항을 요구했다. 미국은 조선이 거부했지만 계속 요구를 굽히지 않다가 러일전쟁이 발생하면서 교섭은 더 진행되지 못했다.

1904년 `1905년 동안 만주와 한반도에서 이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기 전 1905년 7월 일본의 총리 가쓰라 다로와 미국의 육군장관 태프트는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한다'는 내용의 ‘가쓰라·태프트 비밀협약’을 맺었다. 이어 그해 8월12일 일본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외교적으로 보장하는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했다. 일본은 여러 제국주의 열강의 동의를 얻어 한국의 식민지화를 노골적으로 추진했다.

1905년 9월5일 러일전쟁이 끝나면서 러시아는 조선에서 일본이 최상의 이익을 보장받는데 동의했다. 1905년 11월17일 조선은 을사늑약을 강요받아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말았다. 미국무부는 그로부터 일주일 뒤 서울 주재 공사에게 서울의 미영사관을 폐쇄하고 한국에서 철수하라고 지시했다. 서울의 미영사관은 11월28일 폐쇄하고 모든 영사업무는 동경에서 대행하라고 지시했다. 워싱턴 주재 조선 공사관은 1905년 12월16일 폐쇄됐다.

일본은 을사늑약을 체결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 실질적으로 주권을 빼앗고 내정 장악을 위해 통감부를 설치해 식민지에 준하는 통치와 수탈을 자행했다.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26대 대통령은 이에 대해 전혀 반대하지 않았다.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는 노일전쟁이 나기 4년 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바 있었다.

“나는 일본이 조선을 정복하는 것을 보고 싶다. 그래야 일본이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이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보면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미 대통령, 을사늑약 4개 월 전 ‘가쓰라·태프트 밀약’ 체결 지시

미국은 당시 다른 열강에 비해 후발 제국주의 국가로 강대국과의 연대를 통해 이익을 챙기려는 외교 전략에 의존했으며, 일본이 동아시아 최강자로 떠오르자 일본을 주목했다. 미국은 일본과 손을 잡는 것이 동아시아에서 자국의 이익을 챙길 수 있는 방법으로 판단한 것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자신의 견해에 따라 을사늑약이 만들어지기 4개 월 전인 1905년 7월 일본과 필리핀, 조선을 각각 식민지로 삼는 조건에 합의하 비밀 각서를 만들도록 각료에게 지시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그것이다.

▲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러일 전쟁 직후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과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 승인하는 문제를 놓고 1905년 7월29일 당시 미국 육군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일본 제국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가 도쿄에서 회담한 내용을 담고 있는 대화 기록이다. 사진=위키백과
▲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러일 전쟁 직후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과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 승인하는 문제를 놓고 1905년 7월29일 당시 미국 육군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일본 제국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가 도쿄에서 회담한 내용을 담고 있는 대화 기록이다. 사진=위키백과

이 밀약에 이뤄진 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을 구체적 조치인 을사늑약을 조선에 강요한 것이다. 일본의 조선 침략 과정에서 미국은 일본과 한통속이 된 제국주의적 야욕을 채우는 짓을 한 것이다.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후 3·1운동에 한민족이 일본의 엄청난 탄압을 받는 것을 철저히 외면하면서 일본 편을 들었다. 미국은 1945년 해방 이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맺을 때 이 밀약을 감안해 한반도, 특히 독도 문제 등을 일본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방향으로 만들어준 것으로 추정된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맺어진 뒤 일본은 같은 해 8월 제2차 영일동맹과 9월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반도 지배권을 미국 등 세계열강들로부터 인정받게 되었다. 이 조약으로 미국·영국뿐만 아니라 패전국 러시아도 일본의 조선 지배를 승인함으로써 일제의 한국 지배가 국제적으로 확인되었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중재로 미국 뉴햄프셔 주의 군항도시 포츠머스에서 1905년 8월부터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강화회의가 열릴 즈음 고종황제가 워싱턴에 특사를 보내 루스벨트에게 아래와 같이 간청했다.

“조선과 미국이 1882년 5월 제물포에서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 제 1조가 ‘두 나라가 제 3국으로부터 불공경모(공정하지 못한 대우를 받거나 모욕을 받았을 때)한 일이 있을 때 필수상조(필히 서로를 돕는다)를 원칙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오늘날 일본이 조선을 자국의 보호국으로 만들려 하니 조미수호통상조약 제 1조에 근거해 일본을 제어해 달라.”

루스벨트는 조선 황제의 요구를 접수하기를 거절했을 뿐 아니라 일본이 을사늑약을 체결한 이후 미국에게 서울에 주재하던 영사관을 철수를 요구하자 그에 응했다. 미국이 앞장서 공관을 철수하자 다른 열강들도 뒤따라 동일한 조치를 취했다.

당시 서울 주재 미국 영사관 부영사 윌리엄 스트레이트는 서울의 외국 공관 철수 모습을 신랄하게 묘사했다.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뒤 외국 공관의 외교관들이 서울을 빠져나가는 모습은 마치 침몰하는 배에서 쥐들이 도망가는 모습과 흡사했다.”

또한 미국의 유명한 논객이며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하던 조지 케난은 당시 조선에 대해 쓴  기행문에서 고종황제를 혹평했다.

“그는 어린애처럼 철이 없고 가부장적인 유목민 보어인처럼 완강하며, 무식하고 우쭐대기만 하는 인물이다.”

케난의 기행문을 읽고 난 루스벨트는 “당신의 그런 통찰력은 훌륭하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루스벨트와 미국 정부가 1901년부터 일본의 한반도 강점을 묵인했다는 것은 1900년대 초 한·중·일에서 근무했던 미국 공사가 루스벨트 대통령 및 국무장관과 한국 정책을 협의한 편지와 문서, 보도 문건 등에서 드러났다.

“일본이 1904년 러·일 전쟁을 앞두고 루스벨트 대통령 주선으로 미·영의 대기업들로부터 전비 차관을 받았다. 당시 루즈벨트는 앞장서서 앤드류 카네기의 철강회사, 제이피 모건 등 미 대기업을 통해 일본의 전쟁비용 약 7억 엔(현재 14조원 상당)을 조달했다. 미국은 1905년 러·일 전쟁 처리를 위한 포츠머스 회담에서 조선과 중국을 배제하는 전략을 썼다.”

미국과 일본은 1908년 조선에서의 상표와 저작권 보호 협정을 맺고 조선 거주 미국 시민은 일본 법원의 관할에 속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미국과 일본은 1908년 조선에서의 상표와 저작권 보호 협정을 맺고 조선 거주 미국 시민은 일본 법원의 관할에 속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미국의 일본 조선 강제 병합 승인과 3·1 만세 운동 발생

일본은 1910년 8월 조선을 강제 병합해 식민지로 만들었고 그 해 9월 미국은 이를 승인했다. 일제는 1910년 국권을 강탈한 후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근대적 기본권을 박탈하고 폭압적인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또한 조선민족 고유의 문화를 파괴하고 조선인들을 일본인들에게 복종하는 충실한 피지배자로 만들려 했다. 일제는 1910년부터 1918년 사이에 진행한 토지 조사 사업으로 농민들의 토지를 강탈하는 등 경제적 폭압을 일삼아, 한국 사회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불만과 저항이 거세졌다.

1918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밝힌 민족자결주의와 러시아 10월 혁명 성공 후 레닌이 발표한 ‘민족 자결 원칙’, 만주 지린에서 독립 운동가들이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 선언)에 이어 1919년 도쿄에서 일본 유학생들이 2·8 독립 선언서를 발표해 독립운동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그 결과 1919년 3월 1일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독립을 선언하는 비폭력 운동인 3·1 만세 운동 또는 3·1 혁명이 일어났다.

미 국무부는 3·1 운동이 발생하자 그 다음 달인 4월 일본주재 미 대사에게 "서울주재 미 영사에게 조선 독립 운동가들이 독립운동을 하는 것을 미국이 도우리라는 믿음을 주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할 것과 일본 정부당국이 조선의 독립운동에 미국이 동조한다고 의심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약 3개월가량 전국적으로 발생한 독립운동을 제압하기 위해 일제는 화성 제암리 사건과 같은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고 유관순 열사 등 숱한 이가 이 과정에서 순국했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집회인수가 106만여 명, 사망자가 7509명, 구속된 사람이 4만7000여 명이었다. 조선총독부는 3·1 운동을 계기로 군사, 경찰을 앞세운 강경탄압정책에서 민족분열책인 일명 문화통치로 정책 기조를 바꿔, 조선어로 된 일간신문 발생을 허가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3.1운동은 집회회수 1,542회, 참가인원수 202만3,089명, 사망자수 7,509명, 부상자 1만5,961명, 검거자 5만2,770명, 불탄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나 되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투쟁했던 거대한 독립운동이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진 피맺힌 외침은 중국의 5·4 운동, 간디의 독립운동에도 자극을 주었다.

▲ 3·1 운동 당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 시위. 사진=나무위키
▲ 3·1 운동 당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 시위. 사진=나무위키

조선의 독립은 외면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한편 윌슨 대통령은 조선의 독립만세 운동에 대해 지지하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이는 미국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의해 일본의 조선 점령에 동의했던 것을 의식한 행위로 보인다. 당시 미국 국무부의 조치에서 일본의 조선인 만세운동에 대한 탄압에 눈을 감고 간접적으로 동조했던 점이 확인된다.

미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했지만 당시 국제적인 지배구조에 문제를 제기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 특히 당시 일본이 전승국이었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여서 조선 독립 문제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윌슨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세계의 약소민족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자 그 적용 범위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및 터키에 속했던 주민과 영토, 그리고 독일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식민지로 국한한다고 수정했다.

윌슨은 최종적으로 강화회의에 제출할 국제연맹 규약에서 민족자결주의라는 용어를 아예 삭제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주장을 본 조선인들은 그 속셈을 모르고 큰 기대를 했고 오늘날에도 그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한심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얼빠진 역사왜곡은 당시 상황을 정확히 살펴 시급해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3·1 운동은 비록 제국주의 세력이 외면하고 침묵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승전국 식민지에서 일어난 최초의 반제국주의 운동이면서 민족적인 항일 운동으로 조선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3·1 운동을 계기로 다음 달인 1919년 4월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미국 정부는 1920년 이후 1930년대 말까지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표한 적이 없다. 1941년 12월7일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하면서 미국과 태평양전쟁에 돌입했다. 이승만이 임시정부 수반을 하면서 미국 정부에 임시정부를 조선의 합법적 정부로 인정해 달라는 청원을 했지만 미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 영국, 중국 지도자들이 만나 조선을 적절한 조치를 통해 독립하도록 할 것을 선언했고 소련의 스탈린 수상도 이에 동의했다. 당시 열강 지도자들의 마음속에서는 조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것은 조선인들이 희망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것은 역시 제국주의적 국가이지주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전쟁이 끝나면 승전국들이 조선에 대해 조선인이 독립할 자질을 갖췄다고 판단될 때까지 수년 또는 더 긴 기간 동안 신탁통치를 한다.’로 요약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독립 운동가들은 일본이 패퇴하면 즉시 독립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 소련 견제 전략 위해 친일파 집권세력으로 등용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태평양 전쟁은 끝났다. 원자탄 두 발에 일본은 갑작스럽고 극적인 모습으로 무릎을 꿇었다. 소련은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기 일주일 전에 만주에서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쟁을 개시했다. 소련은 파죽지세로 일본군을 무찔렀으며 그 기세는 미국이 당도하기 전에 한반도 전역을 점령하고도 남았다. 미국은 오키나와에서 한반도로 군대를 이동하고 있어서 아무리 서둘러도 소련보다 앞설 수는 없었다. 그러나 미국은 원자탄이라는 신형 무기가 일본에서 가공할 파괴력을 보인 것을 소련에게 과시하면서 제안을 했다.

“한반도의 절반인 38도선을 경계로 소련과 미국이 분할 점령하자.”

소련은 미국의 원자탄에 기가 꺾여 미국의 제안을 수락했다.

미국은 1945년 일본 항복 이후 한반도 남쪽에 군대를 진주시키고 발표한 맥아더 포고문 제1호에서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 임을 분명히 밝히고 북위 38도선 이북에 들어온 소련군과 대치했다. 미군의 군사통치 체제인 미군정은 1919년 중국 상하이에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해방직후 독립정권을 수립하기 위해서 선포된 여운형 중심의 인민공화국 등 모든 정치단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군정은 일제의 통치기구와 친일파 행정관리들을 접수해 군정을 선포한 뒤 일본총독부 소속 일본 간부들을 미군정의 고문으로 위촉하고 과장급 아래의 일본인 실무자들은 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 근무를 하게 했다. 미군정은 이어 한국인으로 일제 치하에서 공공기관에 근무한 사람들을 원래 자리로 복귀시켰다.

이는 맥아더가 일본에서 전범세력의 일부를 미군정체제에서 등용한 것과 동일한 조치였다. 맥아더는 일본과 남한을 소련의 동북아 진출을 저지할 교두보로 만들기 위한 미국 정부의 전략을 수행한 것이다. 그 결과 한국에서는 친일파가 해방정국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하게 되고 결국 일제 잔재를 청산치 못하게 만든 가장 핵심적 요인의 하나로 지적된다.

미국은 일제가 항복한 이후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독도 문제를 제외함으로써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근거를 제공했다. 종전 후 남한에서 취한 미국의 태도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는 미국이 점령군으로 진주하는 것과 같은 일련의 태도가 설명되지 않는다. 미국은 그러나 오늘날까지 이에 대해 일체 함구하고 있다.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후 한반도를 일제의 식민지로 여기면서 조선의 독립을 외면하는 태도를 취했는데, 그런 태도는 일본의 항복 이후 취해진 남한에 대한 미군정의 조치에서도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의 그런 태도는 이승만이 친일세력과 야합해 집권하는데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일제 미 청산과 이승만 이후 독재의 뿌리가 가쓰라·테프트 밀약에서 비롯된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는 이유다.

미국은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한국군 군작전지휘권을 이양 받았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조인된 1953년 이후 미군이 슈퍼 갑으로 공인되면서 남한의 군사적 주권을 장악했다. 남한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거의 절대적 수준이 되면서 미군정 기간에 발생한 제주 4.3, 한국전쟁 기간 동안 미군사령관의 지휘를 받은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등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치권이나 언론이 미국이나 미군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가 해석하지 않고 친미 일색인 관행이 유지되는 것은 국가보안법의 뒷받침이 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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