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은 한국언론의 역사에서 특별한 해임에 분명하다. 2019년 3·1운동 100년, 대한민국 100년에 이어 2020년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각각 100년을 맞이한다.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두 신문 모두 3·1운동의 직접적인 결과물로 탄생한 것인데, 그 100년을 맞는 오늘 주변에서 축하하는 사람은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어인 일일까? 나를 포함하여 내 주변의 사람들이 편협하고 삐뚤어져서일까, 아니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100년간 쌓은 죄업이 하늘을 찌르기 때문일까? 이제 3·1 운동 무렵만큼이나 모든 것이 정신없이 변화하는 또 다른 100년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역사를 간략하게나마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창간 

지금의 평가와는 달리 100년 전 때는 3·1운동이 실패한 운동이었다.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조선은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교사들까지 칼을 차던 무단통치가 문화통치로 이름을 바꾸며 칼을 풀어놓았다는 것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하나 뿐이던 조선의 신문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되면서 셋으로 늘어났다는 점뿐이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3·1운동이라는 대폭발에 놀란 일제는 압력밥솥의 김구멍 마냥 폭발을 방지하기 위해 미리미리 조선 사람들의 불만과 분노를 조절할 장치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일제는 조선어 신문 두 개를 만들면서 동아일보는 민족주의자들에게 조선일보는 친일파들의 모임인 대정실업친목회 측에 발간 허가를 내주었다. 민족주의자들이 만드는 동아일보가 총독부를 비판하더라도 매일신보와 조선일보라는 친일지 두 개로 여론을 주도해나갈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대중들은 후발 친일지를 용납하지 않아 조선일보는 운영난에 빠졌다가 결국 진보적 민족주의자들의 기관지로 거듭나게 되었다.       

지금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지탄의 대상이 되었지만, 1920년대 중반 두 신문은 우리 민족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의 근대 문화예술, 학술, 정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양대 신문의 기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청년들에게는 관계로 진출하는 길이 거의 막혀 있었고, 그렇다고 기업이나 대학의 문이 열려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신문사로 인재들이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선일보나 동아일보의 사장이나 편집국장의 위상은 지금과 비할 수 없이 높았었고 사회적인 존경을 받는 자리였다. 한편 독립운동에서도 언론인들의 역할은 두드러졌다, 1920년대 중후반 식민지 조선을 뒤흔든 조선공산당 사건의 주역들 역시 거의 대부분 기자였다. 조선일보는 민족주의 좌파를 대변했고, 동아일보는 민족주의 우파를 대변하면서 두 신문은 한동안 민족진영의 좌우 두 날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기대를 저버린 친일  

3·1운동의 직접적 산물로 태어난 두 신문은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민족의 기대를 저버리고 친일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1920년대부터 일제와 타협적인 태도를 보여온 동아일보는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일본제국주의와 경제적으로 사실상 공동운명체가 되어버렸다. 만주침략이 김성수 소유의 경성방직에 새로운 시장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 좌파인사들이 발간하던 조선일보는 심각한 경영난 끝에 금광왕 방응모가 판권을 인수하면서 그 성격이 크게 변하였다. 당시는 지역대립의 기본 축이 지금과 같은 영호남의 갈등이 아닌 기호와 서북의 갈등이었는데, 조선일보는 진보적 민족주의의 기관지에서 서북세력의 기관지로 전락한 것이다. 

지금은 한국언론사에서 잊힌 존재가 되었지만 일제강점기 민족진영의 한글신문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이외에 하나가 더 있었다. 시대일보, 중외일보, 중앙일보, 조선중앙일보로 성격과 제호와 운영주체가 계속 바뀌어왔지만, 1933년 이후 여운형 선생의 사장취임 이후 조선중앙일보는 논조가 현격히 퇴색한 조선일보, 동아일보와는 달리 민족적 입장을 고수하였다. 현재의 조선일보나 중앙일보와는 아무 상관없는 조선중앙일보는 1936년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당시 일장기 말소 사건과 관련하여 사라지게 되었다, 이 사건 직전 조선중앙일보의 발행 부수는 동아일보를 근소하게 제친 바 있다. 일장기 말소사건의 최대 수혜자는 조선일보였다. 시장을 3분할하고 있던 상황에서 경쟁지 였던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가 한꺼번에 발간되지 않는 사이, 조선일보는 구독자를 크게 늘릴 수 있었다. 

동아일보의 무기정간이 풀려 신문이 다시 발간된 것은 거의 10개월 뒤인 1937년 6월3일이었다. 그 다음날 밤 김일성이 이끄는 항일무장유격대의 보천보 습격사건이 있었고 동아일보는 두 차례에 걸쳐 호외를 발간하며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1998년 동아일보 방북취재단이 김정일에게 이 호외를 황동판에 새겨 선물했다는 사실은 김일성에게 전국적 지명도를 안겨주는 데에 동아일보의 보도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아일보 와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을 비판할 때 일부에서는 이들 신문이 항일투사들을 ‘비적’이나 ‘공비’라 부르고, 이들의 일제에 대한 공격을 ‘살인’, ‘방화’, ‘약탈’ 이라 비하했다 하지만 이는 좀 과도한 비판이 아닌가 싶다. 일제의 지배체제 하에서 이런 용어의 사용은 사건 자체를 보도 하려면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 또 주민들은 이렇게라도 보도되는 항일투사들의 소식에 목말라 하고 있었다. 보천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동아일보의 양일천 특파원(혜산지국장)이 김일성 파의 조직원이었다는 것을 보면 항일세력 역시 공비의 만행이라는 식으로라도 보도되는 것이 대중들의 항일의식을 부추기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193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노골적으로 친일색채를 드러냈다. 그 점은 여기서 재론할 여지없이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친일은 두 신문이 해방 이후 군사독재 정권에 대해 협력한 것이며, 더욱 심각하게는 민주화 이후 언론이 권력 블럭의 한 기둥이 되면서 자행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악행 때문에 더더욱 가혹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천황의 사진을 1면에 크게 내걸고 온갖 아부를 다한 두 신문의 친일은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일제는 그렇게 납작 엎드렸음에도 우리말 신문을 용인하지 않았다. 두 신문은 1940년 폐간되고 말았다. 일부에서는 두 신문이 국책에 순응한다는 취지의 폐간사를 게재하고 포상금까지 받았다는 이유로 순응적 폐간이라 비판하지만, 이 역시 뒷날 두 신문의 죄악 때문에 과도한 비판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해방 후 두 신문이 복간의 기회를 맞이했을 때 과거의 친일행각에 대해 사과하지 않은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 한편으로 어떤 독립운동가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게 친일행각 때문에 복간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 조선일보 1940년 1월1일자 신년호. 히로히토 일왕 부부의 사진과 일장기가 선명하다.
▲ 조선일보 1940년 1월1일자 신년호. 히로히토 일왕 부부의 사진과 일장기가 선명하다.

동아와 조선, 서로 다른 해방과 분단   

해방 후 동아일보는 토착우파세력인 한민당의 기관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이 조선에 전해졌을 때, 여러 가지 제약으로 처음에 신탁통치 문제를 중심으로 보도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무조건 반대만 할 것은 아니라는 온건하고 합리적인 주장을 펴던 고하 송진우 동아일보 사장이 우익 내부의 갈등으로 흉탄에 쓰러진 이후, 동아일보는 더욱 극단적으로 좌우 대결을 선도해 나갔다.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이 해방된 조선이 소련 연방의 하나로 가입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등 터무니없는 오보를 쏟아낸 것도, 극우테러단체 서북청년단에 사무실을 제공한 것도 동아일보였다. 

반면, 해방 후 조선일보는 지금의 광적인 극우선동과는 달리 나름 차분하게 중도우파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1948년 남북협상 당시 동아일보는 ‘보다 협상이 정체’, ‘기대 난’, ‘민정에 현혹치 말라’, ‘공산파 회담에 불과’, ‘소련의 연막’ 등등 부정적인 제목의 기사를 쏟아냈지만, 조선일보는 백범 김구가 ‘민족 원한의 38선’을 무사히 통과했다며 사진과 함께 크게 실었고, 회담의 경과를 특파원의 현지보고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했다. 1948년 11월 이승만 정권이 국가보안법 제정을 추진할 때는 1면에 「국가보안법을 배격함」이라는 사설을 싣기도했다. 국가보안법이 없었다면 대한민국도, 한강의 기적도 없었다고 극우 선동을 일삼는 오늘의 조선일보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독자에서 자본으로: 언론지형의 변화

이승만 정권시기에는 대구매일 테러 사건이나 경향신문 폐간 사건 등에서 보듯이 언론탄압도 그야말로 벌거벗은 폭력 그 자체였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뒤에는 문화방송이나 부산일보의 강탈, 경향신문 강제 매각 등의 사건도 있었지만 탄압의 양상이 훨씬 교묘해진 경우를 볼 수 있다.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기업으로서의 신문사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으며, 언론인들도 지사적인 풍모를 어느 정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이후 한국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언론의 지형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신문사의 수입에서 무게중심이 배달과 가판 등 구독료에서 광고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신문사, 특히 사주나 경영진은 독자들보다 광고주에게 더 신경을 쓰게 된 것이다. 1964년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을 겪으면서 권력은 언론의 이러한 변화를 날카롭게 포착했다. 이제 언론을 통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기자들을 잡아다 거꾸로 매다는 시끄러운 방식보다 조용히 광고와 자금의 맥을 짚어 ‘악’ 소리도 지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점을 권력이 깨달은 것이다. 언론윤리위원회 파동은 외형상 언론의 승리로 보였지만, 사실은 권력이 언론의 약점을 정확히 파악한 계기였다. 1963년 12월 군사정권이 민정으로 재출발할 당시 박정희는 제3공화국의 첫 국무총리로 15년간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최두선을 임명할 만큼 언론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권력과 언론의 관계는 완전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한국일보 사주 장기영을 내각의 부총리로 끌어들였고, 조선일보 사주 방일영과는 잦은 술자리 끝에 ‘밤의 대통령’이라는 희한한 별명을 선사했다. 

유신독재가 확립되기 훨씬 이전 한국 언론의 상층부는 이미 권력에 대한 투쟁은 고사하고 비판과 감시도 포기했다. 김중배 선생이 1991년 8월 동아일보 편집국장 직을 내던지면서 “가장 거대한 권력은 정치권력이 아니라 자본권력”이라고 갈파한 바 있지만, 사실 일찍이 1960년대 후반 최석채 같은 사람도 이와 유사한 지적을 한 적이 있다. 과거에는 언론이라는 성에 독재권력이 공격해올 때 성주와 장수와 병졸이 혼연일체가 되어 성을 지켰지만, 이제 장수와 병졸들 몰래 성주가 성문을 열어주는 상황이 도래했다는 것이다. 주요 신문사 편집국장 자리 옆에는 ‘신문사 출입기자’라는 별명을 가진 중앙정보부 직원이 상주하다시피 했다. 야당인 신민당에서 기관원이 ‘상주’하는 한국의 언론 현실을 비판하자 주요 언론사들이 일제히 기관원이 가끔 드나들 뿐 ‘상주’하는 것은 아니라고 발끈했다. 여관을 자주 가기는 하지만 동거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변하는 꼴이었다. 언론인들끼리의 동류의식이 있어 누가 중앙정보부에 붙잡혀 가면 우표딱지만하게라도 보도도 하는 것이 모든 언론의 관행이었건만, 1967년 신동아지 필화사건 당시 편집국장과 주간 등 다섯 명이 연행되었는데, 그것을 보도한 신문이 하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비겁한 스승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연탄가스에 중독’된 언론이라는 기막힌 비유는 이런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1974년 말부터 시작된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와 이에 뒤따른 대규모 강제해직은 한국언론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남았던 동아일보마저 무참히 무너졌다는 점에서 매우 대단히  비극적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정론언론을 독자들이 지키기 위해 동아일보에 쏟아진 엄청난 격려광고는 세계언론의 역사에 새로운 희망을 던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힘은 13년 뒤 한겨레신문의 창간으로 또 다시 분출되었다. 

1980년 전두환의 등장과 언론 

1980년 광주학살을 거쳐 전두환이 집권하면서 한국의 언론은 또 한 번 큰 변화를 맞이했다. 1970년대에는 동아일보가 부동의 선두였고, 조선일보는 한참 뒤떨어져 중앙일보, 한국일보와 함께 2위권을 형성했었다. 그랬던 조선일보가 동아일보를 앞지르고 ‘1등 신문’을 표방하게 된 것이다. 조선일보 동경 특파원으로 일본의 극우세력을 흠모했던 허문도는 세치 혀로 전두환을 사로잡아 ‘쓰리 허’의 한 명으로 권력핵심에 진입하면서 조선일보와 신군부의 굳건한 동맹을 구축했다. 전두환이 최규하를 끌어내리고 대통령에 오르기 직전인 1980년 8월 23일자 조선일보 3면의 ‘인간 전두환’ 기사는 한국언론 최고의 아부 기사이자, 부끄러움을 모르는 조선일보 조차 창피해서 지면 다시보기 서비스에서 빼버린 문제작으로, 조선일보가 동아일보를 제치고 구역질나는 ‘1등 신문’에 오르는 변곡점을 상징하는 기사였다. 1975년 대량 해직으로 젊은 인재들을 모두 잘라버린 동아일보는 조·석간 체제의 변화 등과 같은 언론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조선일보에 이어 중앙일보에까지 추월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 1980년 8월23일자 3면
▲ 1980년 8월23일자 3면

허문도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오늘의 조선일보의 초석을 놓은 자는 단연 선우휘였다. 소설가로서 휴머니스트였고, 조선일보 편집국장 시절 리영희 기자와 함께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기까지 했던 선우휘는 동아일보의 백지광고 사태 당시에는 조선일보의 체면을 위해 후배 기자들에게 무어라도 하라고 부추긴 바 있다. 해직된 후배들의 재판에 불려나온 그는 “들어가야 할 기사가 빠지든 깎이든 기자는 기사만 써내라 이 말인가”라는 변호인의 질문에 “그렇다”라고 명쾌하게 답변했다. 선우휘는 1980년 봄 일본의 극우지인 산케이신문과 인터뷰에서 한국에서의 언론규제는 불가피하다고 권력의 편에 확실히 섰다. 

전두환이 집권한 1980년대에 들어 각 언론사 기자들의 월급은 가파르게 인상되었다.  

1970년대까지 기자들의 급여가 비현실적으로 낮았던 것을 정상화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학살정권은 언론인 학살을 감행한 뒤 살아남은 자들에게 승진과 고액연봉의 기회를 제공했고, 권력과 야합하여 재정을 튼튼히 한 신문재벌과 재벌신문은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상당수의 젊은 기자들까지 매수한 것이다. 이제 주요 언론에서 버스나 연탄과 같이 서민 생활과 밀착 된 주제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민주화 이후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많이 망가지긴 했어도 1987년 6월항쟁까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언론은 언론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화 이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그 자체가 권력으로 부상하면서 괴물이 되어 갔다. 민주화는 그동안 한국사회를 지배해 온 군부와 안기부 등 정보기관이 뒤로 물러나고, 그 빈자리를 민간이 메우는 과정이기도 했다. 민주화로 인해 가장 득을 본 것은 최루탄을 마시며 민주화를 외쳤던 민주시민들도, 체포와 고문과 투옥을 무릅쓰고 투쟁한 민주화운동가들도 아니었다. 군부와 정보기관 대신 이 나라의 알짜 권력을 장악한 것은 재벌과 검찰 등 관료집단과 보수언론이었다. 특히 1991년 5월의 ‘분신 정국’ 당시 수구세력이 ‘유서대필사건’을 조작하여 위기를 돌파할 때 검찰과 조선일보는 새로 얻은 힘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청와대는 여전히 힘을 갖고 있지만, 대통령은 5년짜리 계약직 공무원에 불과했다. ‘민주화’가 5년 단임과 문민화에 머물러 있는 한, 진짜 권력은 죽을 때까지 손에 쥐고 있다가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재벌총수와 언론사 사주들 것이었다. 5년 임기의 새 대통령을 뽑기 직전인 1992년 11월, 방일영의 고희연에서 사원대표인 스포츠조선 신동호가 “낮의 대통령은 그동안 여러분이 계셨지만 밤의 대통령은 오로지 회장님 한분”이라고 선포했다. 

1990년 3당합당 보수대연합을 이뤄 자신들의 영구집권을 꾀했던 수구진영의 바램과는 달리, 1997년 외환위기 속에 진행된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의 승리로 민주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졌고, 이어 5년 뒤인 2002년에는 수구세력이 경멸해마지 않던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었다. 한국사회는 분명 민주화를 심화시켜 나가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이른바 조·중·동 특히 조선일보는 사악한 힘을 더더욱 뿜어내었다. 김대중 정부의 정책기획위원장으로 선임된 최장집 교수에 대한 사상검증 끝에 결국 그를 낙마시킨 사건 등을 거치며 시민사회는 이 나라가 조선일보의 나라가 아니라 국민의 나라임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자각하기에 이르렀다. 수많은 언론개혁단체가 만들어지고, 시민들의 자발적인 안티조선운동이 벌어진 것은 이 무렵이었다.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도 세무조사 등 언론개혁에 나섰지만, 칼만 뽑고 제대로 수술은 하지 못하자 조선일보 등 수구언론의 행패는 갈수록 심해졌고, 적극적인 사실왜곡에 나서기 시작했다. 오죽했으면 노무현 대통령 시절, 대통령이 “짜장면이 맛있어”라고 말하면 다음날 조·중·동이 “노무현, 짬뽕 비하 발언”이라 보도한다는 슬픈 우스개가 퍼졌을까?

이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창간 100년을 맞아 자신들의 역사를 찬란한 것이었다고 자랑하고 있지만, 처음부터 자기네 역사를 찬양했던 것도 아니다. 일제 강점기를 견뎌낸 사람들이 다 살아있던 1970년대까지, 동아일보는 1928년까지의 신문만 영인본을 냈을 뿐 그 이후는 영인본을 간행하지 않았다. 친일의 지면을 대중들에게 공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더 심각했다. 친일논란이 심각하게 벌어진 이후, 조선일보는 1920년대를 찬란했던 시기로 내세우며 부끄러운 친일의 역사를 가리려 하지만, 사실 오랫동안 조선일보는 방씨네가 인수하기 이전 1920년대의 조선일보에 대해 무관심했다. 주인이 바뀌지 않았던 동아일보는 1920년대의 신문을 영인하여 간행했지만, 조선일보는 방씨네의 흔적이 묻지 않은 신문의 영인에 무관심했다. 더구나 1920년대의 조선일보 지면은 대단히 진보적이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최근 조선일보는 ‘조선일보 100년을 만든 33인’을 선정했는데, 100년 중 20년에 불과한 해방 이전에 활동한 인물이 26명이고, 80년을 점하는 해방 후의 시기에서는 방일영·방우영 형제를 포함하여 겨우 7명만을 선정했을 뿐이다. 조선일보의 권력이야 비할 바 없이 커졌지만, 그에 비해 자랑스럽게 내세울 것은 없다는 뜻이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원래 3·1운동 피의 산물로 민족 전체의 자산이었건만, 그 의미를 퇴색시킨 것은 김성수나 방응모 시절의 친일문제만은 아니다. 그 자손들인 사주 일가들이 군사독재 시절, 아니, 오히려 민주화 이후 권력 블럭의 한 축이 된 이후 보인 행각이 과거의 친일문제를 자꾸 소환하는 것이다.

▲ 조선일보 사옥(왼쪽)과 동아일보 사옥.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 조선일보 사옥(왼쪽)과 동아일보 사옥.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대한민국이 또 다른 100년을 맞이하는 이 순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사라져야할 존재로 지탄을 받기 시작한 것도 족히 20년은 넘었다. 어설픈 세무조사나 우리 안에서만 진행된 안티조선운동은 어쩌면 조선일보를 온갖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슈퍼박테리아로 만들어 버렸다. 그런데 지금은 언론지형이 그 어느 때보다도 급격히 변하고 있다. 조선일보의 영향력은 예전 같지 않다. 한때 노년층을 붙잡아 두던 TV조선도 트로트열풍을 선도하며 돈이나 벌 뿐, 정치적 영향력 면에서 유튜브에게 자리를 내준지 오래다. 가짜 뉴스 생산의 원조였던 조선일보는 훨씬 독하고 막강한 수구 유튜브를 따라 갈 수 없게 되었다.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가 지배하는 포스트-트루스 시대의 도래는 비단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등 수구언론 뿐 아니라, 그와 대척점에 선 진보적인 ‘레거시 미디어’들에게도 엄청난 과제를 던지고 있다. 

3·1운동의 피의 산물로, 민족의 자산으로 탄생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사라져야 할 흉물이 되어 100년을 맞았다. 우리 손으로 치우면 참 좋았으련만, 민주화운동이나 언론개혁운동을 벌여온 우리 세대의 손으로는 치우지 못했다. 오물 자루를 치우려다 터뜨려 악취만 더 퍼지게 한 꼴이다. 그런데 태풍이 온다.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라며 정파적 이익을 대변해 온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힘을 쓰던 시대는 오히려 이 광풍에 쓸려 가버릴 것이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다. 문제는 여전히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고 믿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아 진실을 알릴 것인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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