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봄이 관객 수 840만명을 넘기면서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노태우 신군부 세력이 어떻게 단죄를 받았는지 재조명되고 있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 구속됐다. 이들이 구속에 이르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민주자유당의 노태우 전 대통령과 김종필 공화당 총재와 3당 합당으로 정권을 잡았으나 취임하자마자 군을 장악하고 있었던 하나회 세력 척결에 나섰다. 김영삼 민주센터와 김영삼 대통령 기록관 연표를 보면, 김 전 대통령은 취임 12일만인 1993년 3월8일 하나회 핵심 인물인 김진영 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 국군기무사령관을 전격 경질했다. 4월2일엔 안병호 수방사령관과 김형선 특전사령관을 교체했다. SBS는 2015년 11월23일 <8뉴스>에서 “당시 석 달 만에 옷을 벗은 장성이 18명, 떨어진 별만 40개가 넘다 보니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고 보도했다. 김 전 대통령은 SBS와 2009년 <한국현대사 증언>에서 군부의 힘을 빼는 대대적인 개혁 조치 때문에 문민정부 이후 제3, 제4의 쿠데타를 막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MBC가 지난 1993년 7월19일 뉴스데스크에서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등이 12·12 쿠데타를 주도한 전두환, 노태우 등 34인을 고소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사진=MBC 뉴스데스크 영상 갈무리
▲MBC가 지난 1993년 7월19일 뉴스데스크에서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등이 12·12 쿠데타를 주도한 전두환, 노태우 등 34인을 고소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사진=MBC 뉴스데스크 영상 갈무리

김 전 대통령은 같은 해 5월13일 12·12 군사쿠데타와 5·18광주민주화운동 관련 특별담화를 발표하면서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이경재 당시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12·12 사태는 김영삼 대통령이 누차 언급한 바와 같이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적인 사건”이라며 “김영삼 대통령 자신이 바로 12·12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 발혔다. 이 대변인은 “이제 우리는 비로소 그 불행한 역사를 청산하고 있다”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현재 진행 중인 변화와 개혁이 바로 이 작업”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집권 여당인 강재섭 민주자유당 대변인은 “과거 문제에 대한 지나친 시비는 끝내고 국회 운영에 여야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겠다”고 밝혔다. 김영삼 정부가 적극적으로 법적 단죄에 나서지는 않았다.

이에 따라 12·12 군사쿠데타의 피해자였던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과 이건형 전 3군사령관 등 전직 군 장성 22명이 그해 7월19일 전두환, 노태우 등 군사반란 주도 34명을 검찰에 고소했다. 이들은 고소장에서 전두환 노태우 등이 정권장악을 목적으로 하나회 인맥을 동원해 일으킨 군사반란이며, 군 형법상 반란죄와 내란목적 살인죄를 저질렀다고 밝혔다. 또한 군부의 무력 찬탈을 기도하는 행위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도 했다.

그러나 이듬해(1994년) 10월29일 검찰은 피고소인을 전원 불기소처분했다. 전두환 노태우는 기소유예였다. 죄는 있으나 벌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당시 조준웅 서울지검 1차장은 “사회의 안정과 국가발전을 위하여 이 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소추처분을 유예하는 결정을 하였다”며 “이 사건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후세에 맡기고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이번 검찰의 결정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검찰이 사건의 법리와 역사성 마저 제멋대로 규정했다는 비판이 거셌다.

▲검찰이 1996년 7월18일 5·18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밝힌 논리 개념도. 사진=KBS 뉴스9 영상 갈무리
▲검찰이 1996년 7월18일 5·18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밝힌 논리 개념도. 사진=KBS 뉴스9 영상 갈무리

12·12 쿠데타 피해자와 함께 정동년 등 신군부의 5·18 광주학살 사건의 피해자 322명도 같은해 5월13일 전두환·노태우 등 책임자 35명을 내란 및 내란 목적 살인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이에 대한 수사결과는 1995년에 나왔다. 검찰은 무고한 양민 사살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이른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논리로 ‘공소권없음’ 결정을 했다. 사상 최악의 궤변이라는 비판을 낳은 결론이었다.

한부환 당시 서울지검 1차장 검사는 1995년 7월18일 “새 정권이 출범하고 새로운 헌법질서가 실효화 된 이 사건의 경우 피의자들이 정권창출 과정에서 취한 일련의 조치나 행위는 사법심사가 배제된다고 보는 것이 상당하다”고 밝혔다. 쿠데타가 실패하면 내란이지만, 새로운 정권과 헌법질서를 창출한 정치적 변혁은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없다는 논리였다.

이 같은 결론은 광주 시민과 5·18 피해자 뿐 아니라 전 시민사회의 반발을 불러왔다. 검찰이 신군부 면죄부를 주고 역사를 왜곡했다는 비판이 거셌다.

정부 차원의 법적 단죄가 좌절될 위기에 처하자 전두환 노태우 심판의 결정적 계기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바로 노태우 비자금 4000억원 조성설이었다. 그 과정도 비보도로 기자들에게 해준 얘기를 한 언론사가 이를 파기하고 보도하면서 드러났다. 조선일보는 1995년 8월3일자 1면 머리기사 <전직대통령중 한사람 수천억 가명계좌 소유설 “비리명과징금 시한 맞아 여건에 배려가능성 타진”>에서 “전직 대통령중 한 사람이 4000억원대의 가-차명 계좌를 갖고 있는 것으로 2일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서석재 총무처장관이 이날 “전직 대통령중 한사람이 4000억여원의 가-차명 계좌를 갖고 있으며 이를 처리하는 방안을 놓고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조선일보 1995년 8월3일1자 1면. 사진=네이버 라이브러리 갈무리
▲조선일보 1995년 8월3일1자 1면. 사진=네이버 라이브러리 갈무리

이 사건에 대해 검찰은 애초 관련자와 29개 금융기관의 예금거래 등 철저히 조사했으나 비자금 계좌는 단순한 풍문일 뿐 실제 존재하지 않았다면서 수사를 덮으려 했다.

그러나 이어 박계동 당시 민주당 의원이 국회에서 상세한 내역을 폭로했다. 박 전 의원은 그해 10월19일 국회 본회의 정치분야 대정부질문에서 “현 정권은 집권 이후 중단 없는 개혁과 성역 없는 사정을 부르짖어 왔으나, 최근 전직 대통령의 4000억 비자금 사건 등 범접할 수 없는 성역은 도처에 존재하고 있다”며 “지난 8월1일 서석재 총무처장관은 기자들에게 ‘현 정부는 과거와 다르다, 김영삼 대통령은 대단한 분이다, 얼마 전 평소 안면이 있는 기업하는 친구가 나를 찾아와 4000억대의 가명계좌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중 절반을 정부에 기증할 테니 자금출처를 조사하지 않게 해 줄 수 있는지 여부를 물어 왔다, 오늘 이 이야기는 정말 오프(off)다, 특히 가명계좌 부분은 절대로 말하면 안 된다’라고 밝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고 소개했다.

박 전 의원은 “본 의원이 확인한 결과 노태우 전 대통령의 퇴임 직전인 93년 1월 말까지 4000억 비자금은 상업은행 효자동지점에 예치되어 있었다”며 “93년 1월 말경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관리인으로 알려진 금융계의 황제 이원조씨가 몇몇 시중은행의 영업담당 상무들을 소집해서 차명계좌를 확보토록 지시했고 이 지시는 다시 일선 지점장들에게 극비에 하달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상업은행 효자동지점에 예치되었던 4000억원은 93년 2월1일 100억 원짜리 수표 40장으로 인출되어 당일 즉시 동화은행, 신한은행 등 각 시중은행에 40개의 계좌에 일제히 동시 분산 예치되었다”고 폭로했다. 이것이 서석재씨가 발설한 4000억원의 증거라고 했다. 박 전 의원은 “현 정권이 4000억 비자금의 실체를 낱낱이 밝히지 않는다면 국민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소위 문민정부임을 자임하는 현 정권은 6공화국 군사정권의 사생아였다고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촉구했다.

박 전 의원은 이날 정부를 상대로 12·12를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한 김영삼 전 대통령을 두고 “수많은 사람들의 살상을 수반했던 군 형법상의 반란죄, 형법상의 내란죄에 해당하는 군 사범들의 처리를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며 회피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냐”며 “대통령의 소신이 바뀌었다면 바뀐 이유를 밝히라”고 촉구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얼버무린 검찰이 반역사적, 반국민적인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느냐고도 했다. 박 의원은 특별검사제 도입을 내용으로 하는 특별법 제정만이 12·12와 5·18 사건에 대한 진상을 밝히고 국헌을 바로 세우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박 전 의원의 노태우 비자금 내역 폭로가 파장을 일으키면서, 잇달아 의혹 보도가 쏟아지자 결국 김영삼 전 대통령도 철저한 수사를 주문했다. 김 전 대통령은 그해 10월30일 국무회의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 부정축재 사건을 두고 “성역 없는 수사 공명정대한 수사를 통해서 법 앞에 만민이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러한 기회로 우리가 삼기를 바란다”고 밝혀 사실상 전면 수사 지시를 시사했다. 그는 관행이라고 해서 용서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도 했다.

또한 민자당 총재였던 김 전 대통령은 11월24일 강삼재 사무총장으로부터 당무현안을 보고 받는 자리에서 5·18특별법을 연내에 제정하라고 전격 지시했다. 김 전 대통령은 “쿠데타를 일으켜 국민에게 수많은 고통과 슬픔을 안겨준 당사자들을 처리하기 위해 나는 반드시 5·18 특별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고 강 총장은 전했다. 강 총장은 “그 당사자들은 전두환 노태두 전 대통령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법 제정논의가 급물살을 타면서 12월19일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에 통과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지난 1995년 11월16일 수뢰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국민들에 사과하고 있다. 사진=KBS 영상 갈무리
▲노태우 전 대통령이 지난 1995년 11월16일 수뢰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국민들에 사과하고 있다. 사진=KBS 영상 갈무리

결국 검찰은 11월30일 ‘12·12 및 5·18 특별수사부’를 설치하고 전면 재수사에 착수하기에 이르렀다. 최환 서울지검장은 이날 “오늘 부터 12·12사건과 5·18사건에 대한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그 두 사건에 대한 수사를 다시 재개하기로 결정을 했다”며 “당시 12·12사건과 5·18사건을 결정할 때의 사정과 많은 변화가 있었다. 재범을 했거나 또는 개전의 정이 없거나 하는 등으로 해서 다시 조사해서 처벌할” 이유가 생겼다고 해명했다.

가장 먼저 구속된 것은 노태우였다. 대검 중앙수사부가 그해 11월16일 구속영장을 청구해 법원은 이날 영장을 발부했다. 전직 대통령가운데 첫 구속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수감되기 전 “국민들에 송구하다”며 “정치인들에게도 한말씀 드리겠다. 여러분들 가슴에 담고 있는 불신 그리고 갈등 이 모두 내가 안고 가겠다. 어떤 처벌도 내가 받겠다”고 말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지난 1995년 12월3일 자신의 합천 생가에서 내란혐의 등으로 구속영장이 집행되고 있다. 사진=KBS 뉴스9 영상 갈무리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지난 1995년 12월3일 자신의 합천 생가에서 내란혐의 등으로 구속영장이 집행되고 있다. 사진=KBS 뉴스9 영상 갈무리

이어 전두환은 12월3일 구속영장이 발부돼 자신의 합천 생가에서 강제 이송됐다. 그는 전날 영장발부 전 연희동 골목 성명을 통해 “초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현 정부까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타도와 청산의 대상으로 규정한 것은 좌파운동권의 일관된 주장이자 운동방향이었다”며 좌파 탓을 하는 등 구속될 때까지도 사죄는커녕 수많은 피해자와 국민들에 상처를 남겼다.

1심 법원인 서울중앙지법은 전두환 전 대통령에 사형에 추징금 2295억5000만원을 선고했으나 서울고법이 무기징역에 추징금 2205억원으로 감형했고, 대법원은 이를 확정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도 1심에서 징역 22년6월에 추징금 2388억9600만원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징역 17년으로 감형된 채 형이 확정됐다. 전두환은 죽는 순간까지 군사반란과 광주학살에 대한 사과 한마디하지 않은 채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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