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방송이 극단적 양당정치 체제에 휘둘리는 문제를 해소하자는 취지의 ‘방송3법’ 개정안이 지난 1일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에 가로막혔다. 정부는 방송3법이 공영방송 지배구조의 편향성을 강화시킨다고 주장하며 지금의 여권 편향 구조를 유지하기로 했다. 

방송3법은 법적 근거 없이 여야가 장악해온 KBS·EBS·MBC(방송문화진흥회) 이사 추천권을 방송·미디어 학회, 시청자위원회, 언론 현업인 단체 등에 부여하고, 사장 선출 시 성별·연령·지역 등을 고려한 100인의 사장후보국민추천위원회(사추위)를 구성하는 내용이다. 그간 공영방송 이사진은 여야가 KBS 7대4, 방문진이 6대3 비율로 추천해왔기에 집권 세력이 바뀌면 이사진 해임과 사장 교체가 강행되는 문제가 반복돼왔다. 현행법상 KBS 이사는 방통위 추천으로 대통령이 임명, 방문진·EBS 이사는 방통위원장이 임명한다고 규정할 뿐 어디에도 여야 개입 근거가 없다.

▲윤석열 대통령. 사진=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 사진=대통령실

정부는 방송 관련 단체들이 ‘편향적’이라며 방송3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방송통신위원회는 1일 방송3법 재의요구 사유로 △편향적 이사회 구성으로 방송의 공정성·공익성 훼손 △방송사 견제·감시하는 이사회 기능 형해화 △대통령의 이사 임명권 제약으로 민주적 정당성 흠결 초래 △이사회의 사추위 자의적·편파적 구성·운영 우려 △입법 과정에서 충분한 협의와 사회적 공감대 형성 부족 △미래지향적인 공영방송 전면 개편 필요 등을 밝혔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윤 대통령에게 방송3법 재의요구를 건의했던 1일 국무회의에서 “이번 개정안들이 과연 모든 근로자를 위한 것인지 그리고 공영방송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위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존 공영방송 지배구조의 문제는 현 정부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김의철 전 KBS 사장이 해임되기 전부터 박민 현 KBS 사장에 대한 ‘낙하산 내정설’이 확산됐다. 박 사장 취임과 동시에 KBS는 그간 여권이 ‘불공정 편파 방송(진행자)’라 주장한 시사·보도프로그램 진행자를 하차시키고 일부 프로그램은 폐지시켰다. 방통위가 방문진 권태선 이사장 등 일부 이사 해임 직후 후임 인사를 임명했다가, 해임 효력을 중단하라는 법원 판단(가처분 인용)에 따라 해임된 이들이 복귀하고 후임자 직무가 정지되는 사태에 이르기도 했다.

지금의 공영방송 지배구조를 유지해선 한덕수 총리가 말한 “공영방송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보장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대통령의 재의 요구에 따라 공이 다시 국회로 돌아간 만큼 이대로 총선 모드에 돌입할 게 아니라 방송3법 개정안이 지닌 우려나 한계 등에 대한 정교한 논의나 보완과 함께, 여야가 숙의를 통해 합의 가능한 법안을 내놓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2023년 12월1일 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임시 국무회의가 열리고 있는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노란봉투법' 및 방송 3법'에 대한 재의요구안 의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3년 12월1일 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임시 국무회의가 열리고 있는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노란봉투법' 및 방송 3법'에 대한 재의요구안 의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방송3법은 최대 70여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는 독일식 평의회 모델에서 변형된 형태다. 독일 공영방송 이사회격인 평의회는 사회·종교·직능단체, 정당 등 사회 각 분야를 대표하는 기관에서 평의원을 추천하며, 평의원들은 공영방송사 경영과 프로그램 제작·편성 등 전반에 대한 사후심의를 맡는다. 방송3법의 경우 국회 5명, 방통위가 선정한 방송·미디어 관련 학회 6명(지역 학회 2명 포함 및 특정 성 2명 이상), 시청자위원회 4명, 직능단체 6명(방송기자연합회·한국PD연합회·한국방송기술인연합회 각 2명) 등으로 추천권한을 나누고 있다.

이와 관련해 여야가 3대2로 추천하는 방통위가 이사 추천권이 있는 학회를 선정하는 한계, 특정 직능단체 참여의 적절성 등이 쟁점화한 바 있다. 심영섭 경희사이버대 미디어영상홍보학과 교수는 “직능단체는 현재 방송업계를 대표할 수 있는 단체로 정한 것인데 문제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면서도 “단체를 임의로 지정하면 편법적으로 악용될 수 있다. 구체적인 기준을 명기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심 교수는 “방통위가 추천할 수 있는 직능단체의 조건과 자격을 최소 기준으로 법령에 넣고 이를 기초로 시행령을 만들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이를 위반할 경우 가처분 신청이나 위헌 소송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사회 효율성을 위해 수적 확대는 지양하고, 시청자위원회를 확대하는 방향이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있다. 강형철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는 “이사회는 최고결정기구로서 경영적 측면을 돌봐야 할 부분이 많다. 이사가 21명이 되면 의사 결정이 아닌 감시·감독 기능이 세진다. 효율성이 없어진다”라며 “사장 등 집행 임원 일부가 이사회에 참여하는 방법도 고려해볼만 하다”고 했다. 정부가 추천한 지역 대표자, 사장 등이 이사회에 참여하는 영국(BBC) 모델과 유사한 형태다. 강 교수는 또 “시청자위원회를 확대해 시민 대표성을 늘리되 더 독립적으로 추천 받는 방식으로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나아가 공영방송 독립성 보장을 위해 이사·사장의 임기 등을 보장할 단서가 추가돼야 한다는 요구가 나온다. 강형철 교수는 “핵심은 공영방송 독립성”이라며 “공영방송 독립성을 유지하려면 공영방송 경영진, 방통위 같은 규제기관 인사들의 임기를 정권교체와 무관하게 보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권이 바뀌면 자리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나서서 문제를 만들고, 양대 진영으로 나뉘어 싸움이 벌어지고 권력이 무도하게 사람을 잘라낸다. 임기 보장이 되면 (공영방송) 전리품화가 줄어들 것”이라는 것이다.

심영섭 교수는 “사장이 선출된 뒤 충분한 권한을 갖고 경영을 할 수 있는 것도 보장을 해줘야 한다. 선출이 되어도 언제 쫓겨날지 모르면 일을 못한다. 임명 뿐만 아니라 면직도 함부로 못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심 교수는 그간 어떤 집권 세력이든 공영방송 이사·경영진 ‘면직’의 길을 열어뒀다고 지적하면서 “집권 여당이 국회에서 다수일 때에는 단 한 번도 방송법을 개정한 적이 없다. 개정 논의 자체를 계속 공전시키고 ‘임면권’을 행사해왔다. 지금이 이런 관행을 끊기 좋은 때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김동찬 언론개혁시민연대 정책위원장의 경우 “방송3법은 사장 선출에 모든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공영방송 거버넌스(공영방송의 공적 책무 구조, 이해관계자와의 소통, 설명책임 등)를 개선하는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공영방송이 극단화된 양당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며 “이젠 더 늦출 시간이 없다. 그대로 두는 건 공영방송을 되돌릴 수 없는 지경으로 망가뜨리는 무책임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3일 경향신문 기고에서 여야가 협의해 새로운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교수는 “세계의 공영방송이 정당성 위기를 겪는다지만 우리처럼 전면적으로 정치꾼들이 지배구조를 장악한 곳이 어디 있을까 싶다”고 개탄한 뒤 “이 길만 피하면 좋겠다. 대통령은 더도 덜도 아닌 제2의 이동관을 찾아서 방송통신위원장 후보로 지명하고, 야권은 정부·여당이 수용하지 않을 게 자명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안을 공들여 제시하고, 여야 모두 내년 총선을 계기로 새롭게 기회를 보자고 다짐하며 다시 힘겨루기에 들어가는 길 말이다. 이 길은 그냥 망하는 쪽보다 더 나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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