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어느 언론학 교수님과 밥을 먹었다. 공부에 집중하라고 충고해주셨다. 연구 성과를 학계에 남기는 게 중요하다는 말씀이었다. 몇 순배 술이 돌자, 다른 말씀을 하셨다. 칼럼에 주저의 자취가 많다고 하셨다. 분명하게 적어도 좋겠다고 하셨다. 두 충고가 상반된 것은 아니라고 혼자 생각했다. 무도한 이들이 무참한 일을 곳곳에서 벌이는 시절일수록 중심 잡고 정진하되 세태를 논할 때는 제대로 임하라고 일러주신 것이다.

이제 큰일이 났다. 집중한들 좋은 연구 내놓을 능력이 없고, 깊이 공부하지 않고는 날카로운 문장을 적을 도리가 없는데, 마감날은 자꾸 돌아온다. 물론 처음엔 다 계획이 있었다. 오직 기자들, 특히 10년 차 이하 기자를 떠올리며 글 쓰겠다고 결심했었다. 기자만 해낼 수 있는 좋은 일이 너무도 많다는 걸 알려줄 생각이었다.

술자리 마치고 돌아가는 밤길에 다른 생각을 품었다. 별처럼 많은 기자 일을 알려준들 그걸 감당할 이유와 동력을 찾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많은 기자의 마음에 똬리를 튼 질문, 즉 요즘 같은 세상에서 ‘왜 기자로 사는가’에 답하지 않으면 원칙, 장르, 방법을 가려 적은 글 따위 허깨비와 벌이는 씨름과 같을 것이다.

▲ 기자, 취재. 사진=gettyimagesbank
▲ 기자, 취재. 사진=gettyimagesbank

헛씨름 같은 글이라도 앞으로 계속 적을 생각이지만, 오늘만큼은 구름에 달 가는 이야기를 젊은 기자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개똥철학이라도 동원하여 그들을 위로하거나 독려하고 싶다. 첫째, 당신이 무엇을 진정으로 좋아하는지 알아내는 것은 삶에서 가장 어렵지만 가장 중요한 일이다. 둘째, 당신이 정말 좋아하는 것은 위대하여 거창한 세계에 있지 않고, 작고 평범하여 구체적인 것 가운데 있다. 셋째, 오직 당신 마음이 움직여 닦고 쓰다듬으며 오랫동안 가꿔온 무엇이 있다면, 그게 바로 당신이 정말 좋아하는 것이다. 넷째, 그것이 기자의 일을 구성하는 어떤 조각이라면, 당신은 기자로 잘 살 수 있다. 기자 일의 전체를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다. 기자 일의 조각, 파편, 구성물의 하나라도 정말 좋아한다면, 좋은 기자가 될 수 있다. 그러니 반드시 그것을 찾아내라. 그것이 기자로 사는 일의 이유와 동력과 엔진이다.

이를 뒤집어 접근하면 기자로 살기 힘든 경우, 또는 기자로 살아선 안 되는 경우를 알아낼 수 있다. 휘하에 사람 부리는 일을 좋아하거나, 정의의 표상으로 기억되는 일을 꿈꾸거나,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을 즐기거나, 윤택한 생활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기자를 하면 안 되고, 기자가 됐어도 오래가지 못한다. 그런 사람이 좋아하는 것 가운데는 기자 일의 작은 파편조차 없다.

반면, 작고 사소한 기자의 일을 좋아하게 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우선 그 일의 대가들을 알아보게 된다. 문장을 벼리기 좋아하는 기자, 사람과 만나면 즐거운 기자,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어 항상 기쁜 기자를 알게 된다. 이윽고 그들과 교유하게 된다. 어느 언론사에 속했건 나이가 많건 적건 상관이 없다. 속으로 좋아하며 따를 수도 있고, 말과 글을 접하며 배울 수도 있다. 나아가 그들의 상실과 성취를 교감하게 된다. 정확한 문장을 쓰려는 기자의 좋은 문장을 보면 저절로 기뻐진다. 꼼꼼한 취재를 좋아하는 기자로부터 그럴 기회를 뺏는 사태가 생기면 덩달아 분노하게 된다. 교감이 깊어지면, 결국 연대하게 된다. 기자 일을 참으로 좋아하는 기자들의 연대가 마침내 생겨나는 것이다.

▲ 인터뷰, 취재, 기자. 사진=gettyimagesbank
▲ 인터뷰, 취재, 기자. 사진=gettyimagesbank

천 갈래로 균열하여 붕괴 중인 한국 언론의 지반에는 그런 연대가 없다. 기자 일을 좋아하지 않는 전·현직 기자들만 득시글댄다. 기자 일을 좋아했다면, 전직 기자들이 고작 몇 년짜리 권력을 쥐었다고 이토록 무참하게 현직 기자의 세계를 짓밟지 않는다. 기자 일을 참말 좋아한다면, 언론을 뒤지고 압수하고 금지하는 사태를 가만히 앉아 구경하지 않는다.

박완서는 소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에서 상실에 대해 적었다. 우연으로 가득 찬 삶에서 때로 상실은 피할 수 없다. 다만 무엇을 상실했는지, 상실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삶은 비극적이다. 작고 평범하여 남들은 몰라봐도, 내 마음이 동하여 닦고 매만져 왔던 구체적이고 작은 것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인데, 그것이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어지는 이 사태를 기자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까지 지녀야 하는 기자의 일을 지키려는 기자들이 실종되고 있다. 왜 기자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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