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에 입사한 1997년 겨울, 많은 일이 일어났다. 가수 이현우가 ‘헤어진 다음날’을 발표했다. 가는 곳마다 그 노래만 흘러나왔다. 누구나 비발디 사계의 겨울을 흥얼거렸다. 첫 출근 3주 뒤에 구제금융(IMF)이 시작됐다. 나라가 망했다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노숙자’라는 단어도 처음 등장했다. 서울역 지하도에 종이를 깔고 자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선배의 지시를 받아, 2박3일을 그들과 함께 보냈다. 포장마차에서 국수를 사줬더니, 노숙자는 국수 대신 소주만 마셨다. 얼마 뒤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다. 선배의 지시를 받아, 한정식집에 불려 갔다. 김대중 정부의 부총리가 앉아 있었다. ‘재야의 대부’로 통하는 정치인이었다. 선배 기자와 부총리가 국수와 소주를 먹으며 시국을 논했다.

그 겨울, 어렴풋하게 알아차렸다. 기자는 사람 만나는 직업이구나. 밑바닥부터 꼭대기까지 다 만나는 게 기자 일이구나. 두렵고도 흥분됐다. 선배들은 자꾸 물었다. “가봤어?” “만나봤어?” 도리가 없었다. 가야 했다. 경찰서에서 병원으로, 철거 현장에서 시위 현장으로 옮겨 다니는 데 써버린 택시비가 월급보다 많았다. 이래서는 죽겠다 싶을 무렵, 수습기자 생활이 끝났다. 살만해졌지만, 직접 가보는 일이 줄었다. 처음엔 전화로 물었고, 나중엔 보도·발표 자료만 보았다. 기껏 ‘현장’에 간다고 해봐야 기자회견장이었다.

‘직접 가보라’고 종용하는 이를 다시 만난 것은 2000년대 초중반이었다. 코바치와 로젠스틸이 쓴 <저널리즘의 기본원칙> 1판에 ‘너 자신의 일을 하라’, ‘독자적으로 확인하라’는 짧은 문장이 등장한다. 이후 원저자들이 개정증보판을 내놓으면서 그 분량이 길어졌다. 이재경 이화여대 교수가 번역한 개정 4판을 보면, ‘자기 스스로 하는 취재에 의존하라’는 단락에 자세한 설명이 있다. 그걸 읽으며 흥분한 나는 나중에 박사논문과 연구논문에서 이를 다뤘다. 기사의 원천성(originality)에 관한 연구였다.

▲ 책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
▲ 책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

단순한 상식을 어렵고 복잡하게 쓴 논문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기자가 정보의 원천(original source)을 직접 취재한 경우에만 다른 기사와 구분되는 원천 보도(original report)가 나온다. 이때 원천 보도는 이중의 개념이다. 정보 원천인 현장, 사람, 문서를 직접 취재했으니 원천 보도이고, 다른 기사와 비교해 어떤 점에서건 독창적이니 원천 보도다. 또한 원천성은 점증 또는 점감하는 개념이다. 보도자료를 옮긴 기사보다 보도자료를 작성한 공무원을 직접 만난 기사의 원천성이 높다. 공무원의 말을 받아쓴 기사보다 그 공무원이 담당하는 정책의 현장을 직접 찾아 살펴본 기사의 원천성이 높다. 아울러 원천성은 취재보도의 기본 원칙이다. 기자가 직접 취재한 요소가 하나도 없다면, 그 기사는 표절이거나 선전·홍보물에 불과하다.

논문을 쓰면서, 한국 언론계에 ‘기사 품질의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도 발견했다. 심층탐사 기사를 쓸 때는 문서, 현장, 당사자를 직접 취재하지만, 일상적으로는 이를 모두 생략하는 관행이 만연해 있었다. 국내 기자상 수상작 가운데 퓰리처상 수상작에 못지않은 탁월한 기사가 있지만, 시민이 접하는 절대다수의 기사는 받아쓰고 베껴 쓴 재활용품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1997년 이후, 한국의 계층계급만 양극화된 것이 아니다. 기자의 일과 생산품도 극단적으로 갈라졌고, 특히 높은 품질의 기사는 천의 하나, 만의 하나의 비율로 쪼그라들었다.

▲ 취재, 기자. 사진=gettyimagesbank
▲ 취재, 기자. 사진=gettyimagesbank

이 지경이 되어버린 세상이 앞으로 어찌 변할지, 산업으로서 언론이 어찌 생존할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이런 세상에 휩쓸리기만 해서는 기자로서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인공지능의 시대가 오건 안 오건, 표절과 선전·홍보에 몰두한 기자가 장차 재밌게 살아갈 방법은 없다. 노숙자부터 정치인까지 누구건 직접 만나고 보고 들어야, 기자 일의 재미를 알아차릴 수 있다. 그것은 두렵고도 흥분되는 일이다. 진짜 해 볼 만한 일이다. 그리 하라고 다그치는 선배가 주변에 없다면, 자신의 순전한 이기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어떻든 한번 잘 살아 보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 그 마음을 품고 직접 가는 것, 그게 살길이다. 그 길을 가보면, 원천 보도를 쓰다가 기자상을 받게 되고, 단행본까지 낼 수 있으며, 무엇보다 기자의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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