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업무에 차이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정규직과 차이가 없었다. 그러다 자른 것이다. 프리랜서 계약이라는 이유로.” ‘무늬만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받은 정규직과의 차별’을 묻는 질문에 최태경 경남CBS 아나운서는 이렇게 말했다.

최 아나운서는 지난해 말일 총 4년4개월 일한 경남CBS에서 잘렸다. 회사가 자른 이유는 ‘프리랜서 계약 만료’였다. 그 전엔 울산CBS와 부산CBS 등에서 3년 일했다. 전국 CBS는 본사 통합법인이다. 그는 “회사가 (정규직과 프리랜서의) 명확한 선을 뒀다면 해고의 상실감이 이렇게 크진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제기했고, 경남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는 거듭 그의 손을 들어줬다. 

중노위는 지난달 판정문에서 “(최 아나운서는) CBS의 지휘·감독을 받으며 뉴스진행, 설교편집, 교계뉴스, ‘찬양과함께’ 프로 제작과 진행 등 정규직 아나운서와 동일한 업무를 수행”해왔다고 밝혔다. 나아가 “정규직 아나운서 고유 업무”인 △제작 공문 △운행표 △재난방송 실시결과 보고서 △자체심의현황 △방송재허가 서류 업무를 CBS 지시로 별도의 계약이나 대가 없이 해왔다고 했다. 그가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라고 못 박았다.

▲최태경 경남CBS 아나운서는 경남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노동자성과 부당해고를 인정 받았지만 CBS는 그를 ‘프리랜서’로 출근을 명령했다. 최 아나운서가 10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최태경 경남CBS 아나운서는 경남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노동자성과 부당해고를 인정 받았지만 CBS는 그를 ‘프리랜서’로 출근을 명령했다. 최 아나운서가 10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CBS는 같은 날인 9월30일 최 아나운서에게 ‘복직’을 명령했다. 그런데 서면 계약 없이 ‘프리랜서’로서다. 노동위 판정을 정면으로 거스른 조처다. 최 아나운서 측은 노동위에 사측의 ‘꼼수’를 알렸지만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규정상 같은 직무로 복귀했다면 복직 이행으로 봐야 한다. 이후 생기는 부당행위엔 추가 법적 대응을 하라.’ 노동위 판정을 노동위가 저버린 것이다.

최 아나운서는 지난 10일 “두렵고 떨리지만 피할 수 없다. 이제 정면으로 마주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노동·사회단체들과 함께 “CBS는 정규직 징표를 모두 지우려는 시도를 즉각 중단하고 하루 빨리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CBS는 지난달 4일부터 다시 출근한 그에게 전용 ‘서류함’을 마련했다. 직접 지시와 대면 접촉을 피하기 위해서다. 이날 서울 목동 CBS 인근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 기자회견을 결심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어떻게 얼굴과 이름을 걸고 문제 제기하게 됐나.
“(기자회견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 것 같다. 먼저 저 자신을 위해서 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로는, 저는 경남CBS 안에서 유일한 프리랜서로 이 일을 겪었지만 서울CBS엔 TV 제작국이 있고 비정규직 프리랜서들이 더 많다고 알고 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묻고 넘어갈 수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조심스러운 이야기이지만, ‘(비정규직으로) 2년 넘긴 분들도 계시겠지? 아무 말 없이 일하시겠지? 언젠가 계약만료라는 이름으로 이 회사를 떠나야 하겠지?’라는 생각이 든다. 이 부분을 저 스스로 힘을 낼 요소로 여기고 자기 암시를 걸고 있다. 같이 싸운다고 생각하고 있다.”

- 최 아나운서가 방송통신위원회의 CBS 방송 재허가를 얻기 위한 업무를 한 점도 노동자성 인정 근거 중 하나다. 중앙노동위는 판정문에서 최 아나운서가 정규직 아나운서와 “동일한 업무”를 “수시로 교체”하며 수행한 데서 나아가 “정규직 고유 업무”를 대가 없이 해왔다며 CBS가 “일방 지시를 하는 관계”였다고 적시했다.
“라디오 방송국은 3년에 한 번 방송 재허가를 받아야 해 지난 3년 간 어떤 공익적 방송을 했는지 전부 취합해 작성, 제출한다. 인터뷰부터 캠페인까지 CBS가 해온 작업을 모두 훑는 지난한 작업이다. PD의 지휘 아래 정규직 아나운서와 제가 3명이서 일했다. 나눠서 서류작업을 하고 밤샘을 하기도 했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돌꽃노동법률사무소,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 부산민주언론시민연합 등 10개 노동·사회단체는 10일 오전 서울 목동 CBS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부당해고 판정에도 프리랜서로 쓰겠다고 우기는 CBS를 규탄한다”며 “꼼수 원직복직 대신 최 아나운서를 당작 정규직 아나운서로 복직시키라”고 요구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돌꽃노동법률사무소,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 부산민주언론시민연합 등 10개 노동·사회단체는 10일 오전 서울 목동 CBS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부당해고 판정에도 프리랜서로 쓰겠다고 우기는 CBS를 규탄한다”며 “꼼수 원직복직 대신 최 아나운서를 당작 정규직 아나운서로 복직시키라”고 요구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 해고당하기 전 근무하며 프리랜서란 이유로 받은 업무상 차별은.
“음… 차이가 차라리 있었으면 어땠을까. 차이가 없었다. 그러다 자른 것이다.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차라리 회사가 처음에 ‘프리랜서는 이렇고 저렇게 정규직과 달라, 정규직은 이런 업무를 해야 해’라고 밝히고 명확한 선을 뒀다면 해고당했을 때 상실감이 덜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정규직처럼 일했다. 심지어 인간적인 면에서도 정규직과 다를 바 없이 지냈다. 그래서 정규직 이상으로 (회사 지시에 따라) 일하기를 받아들인 것이다.”

- 다시 출근한 뒤 근무 조건은 어떻게 달라졌나.
“제 자리가 없어졌다. 고정이던 좌석을 회사가 ‘프리랜서 공용이니 누가 쓴다 하면 비켜야 한다’고 못 박았다. 쓰던 컴퓨터도 자리에서 뺐다. 다시 출근한 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하고 있었는데, 회사가 ‘9~18시 근무는 (최태경 아나운서가) 의도한 것이다’라고 쓴 ‘사실확인서’를 가져와 서명을 요구했다. 해고 전 근무때부터 참석한 직원예배를 두고는 ‘(최 아나운서가)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이라고 밝힌 사실확인서에도 서명을 시켰다. 서명하지는 않았다. 본사의 지시로, 경남CBS 동료들은 제게 말을 하지 않고 있다.”

- 노동위원회 초심과 재심에서 노동자성과 부당해고를 거듭 인정받고 다시 출근했다. 그러나 근무 조건은 더 열악해졌다. 이를 예상했나.
“회사가 노동위 초심과 재심 단계부터 사측 변호사가 (노동위에서 패하면) 행정소송에 가겠다고 직접 밝혔다. 회사가 내용증명을 보내 저를 프리랜서로 복직시키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런 걸 보면서 어느 정도 예측했다.”

▲경남CBS가 최태경 아나운서가 복귀한 뒤 그에게 직접 업무 지시를 하지 않고 관련 서류를 따로 모아두는 서류함을 마련한 모습.
▲경남CBS가 최태경 아나운서가 복귀한 뒤 그에게 직접 업무 지시를 하지 않고 관련 서류를 따로 모아두는 서류함을 마련한 모습.

- CBS가 ‘노동자성 징표 없애기’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기자회견에서 밝힌 내용 외에 또 무엇이 달라졌나.
“예전엔 (CBS 아나운서로) 자유롭게 음악프로그램 선곡표를 올렸는데 이제는 접근이 막혀 ‘글쓰기’를 못한다. 회사는 제가 다시 출근하기 전에 제가 과거에 올린 선곡표 게시글을 다 지웠다. 지금은 제 앞에 일한 여성 아나운서가 올린 선곡표까지 있다.
또 기존에 음원이 필요할 때 서울 음원을 경남CBS 네트워크에 내려받는 시스템을 사용했다. 제가 음악프로그램을 제작, 진행하고 있으니, 서울CBS 네트워크와 경남CBS의 네트워크를 연결해 내려받았다. 다시 출근해 이 부분을 사용하겠다고 밝히자 ‘서울CBS 허락을 받아야 한다, 확인해보겠다’고 했다. 2~3주 기다렸지만 연락이 없었다. 다시 문의하자 ‘서울CBS가 그건 괜찮다고 한다’고 허락해줬다.”

- 노동위는 서면 계약도 맺지 않은 CBS의 ‘프리랜서 복직’ 조치를 판정 이행이라고 판단했다.

“말이 되지 않는다. 회사가 근로자성을 부인하는 조치를 했는데도 이를 ‘원직 복직’으로 본다는 것은 노동위가 본인들 판단을 스스로 부정하고, 스스로 권위를 실추시키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되면 어느 방송사, 나아가 어느 기업도 노동자성 인정을 받은 노동자에게 이런 식으로 꼼수 부릴 수 있다. 법과 규칙이 사회 변화를 따라가지 않는다면,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데 나서지 않는다면 노동위에 존재 가치가 있을까.”

▲최태경 경남CBS 아나운서가 10일 한빛센터 등이 서울 목동 CBS 본사 앞에서 주최한 '경남CBS의 아나운서 꼼수 원직복직 규탄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최태경 경남CBS 아나운서가 10일 한빛센터 등이 서울 목동 CBS 본사 앞에서 주최한 '경남CBS의 아나운서 꼼수 원직복직 규탄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 국가인권위원회는 방송사들이 남성 아나운서만 정규직으로, 여성 아나운서는 ‘무늬만 프리랜서’나 기간제 비정규직으로 쓰는 채용 성차별이 만연하다고 지적했다. 경남CBS에서도 정규직 아나운서는 남성 한 명이고, 여성 아나운서는 프리랜서다.
“현재 경남CBS의 ‘프리랜서’는 유일한 여성 아나운서인 저뿐이다. 프리랜서 아나운서의 처지가 워낙 열악한 것을 경험칙으로 알고 있다. 다른 직군은 연차가 쌓일수록 전문성을 인정받고 노동환경이 나아진다. 아나운서 직군만큼은 정반대다. 일을 처음 시작한 어리고 예쁜 이들을 찾고, 시간이 지나고 지날수록 직업적 가치가 떨어진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여성 아나운서는 일을 하면서도 제2, 제3의 길을 함께 준비해야 한다. CBS만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방송계가 이런 환경을 만들어왔다. 본래 아나운서는 언론인이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정작 업계 안에서 아나운서는 소모품으로 취급 받는 데에서 생기는 격차가 너무 크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부산과 울산, 경남까지 간격은 있었지만 계속 CBS에 몸담았고, 스스로 CBS 사람이라 생각했기에 애사심이 크다. 그래서 사랑했던 조직과 싸운다는 것, 어떻게 보면 회사의 가려진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에 갈등이 컸다. 어떤 조직이든 자정할 힘이 있느냐 없느냐가 그 미래를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CBS가 자정능력이 있는 조직이라고 믿고 싶다. 제 문제도 해결되고, CBS 내 다른 프리랜서 비정규직들의 문제도 몰랐던 것이 있다면 잘 해결됐으면 좋겠다. CBS가 그런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부산CBS에 처음 입사했을 때, 입구에 쓰인 ‘정론직필’이라는 붓글씨를 찍어 휴대전화 바탕화면에 해놓았다.”

CBS 측은 최 아나운서와 서면계약을 하지 않은 이유를 묻는 질문에 “원직복직 구제명령 이행에 따른 조치”라며 “CBS는 중노위의 판정에 불복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할지 검토 중에 있다”고 밝혔다. 또 “직원예배에 참석하고 오후 6시에 참석하는 등 행동이 회사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닌, 본인의 자발적 행동임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요구한 것”이라고 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CBS지부는 최 아나운서가 놓인 상황과 조합원 수용 여부 등을 묻는 질문에 “해당 사안을 인지하고 있었고 당사자와 연락을 주고받은 바 있다. 노동위 판정문을 14일에서야 입수했기에 앞으로 어떤 입장을 취할지 지부 내 논의를 시작하겠다”며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하고 있고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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