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데나 혐오 발언 딱지 붙인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해 11월 발간한 책자에서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인터뷰 발언을 혐오 표현으로 규정한 것에 대해 이 대표가 지난 2일 반발했다. 그는 이전에도 “이준석을 여성이나 장애인 혐오로 몰아도 무슨 혐오를 했는지 설명하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주장만 보면 언론에서 마치 근거없이 자신의 일부 발언을 혐오로 규정한 것처럼 보인다.

이 대표는 지난 3일 MBC 스트레이트 방송 화면 캡처본을 페이스북에 공유하며 “사람마다 혐오를 규정하는 기준은 다르다”며 “그런데 ‘경고’나 ‘독선을 버려라’,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 같은 발언을 문제 삼는 건 정말 열심히 문제 삼을 발언 찾아보다가 실패한 걸 자인하는 것 아니냐”고 썼다. 이어 “저 표현들이 문제인 거냐”며 “저 표현을 장애인 단체에게는 쓰면 안 된다는 거냐”고도 했다.

▲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페이스북 갈무리
▲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페이스북 갈무리

“사람마다 혐오를 규정하는 기준이 다르다”며 이 대표는 몇몇 표현, 일부 발언이 혐오표현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대다수 시민과 언론에서 사회적 합의에 이른 ‘혐오’를 자신만의 기준으로 다르게 규정한 셈이다. 그가 지난달 29일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시위를 비난하면서 ‘볼모’라는 표현이 논란이 되자 “언론에서 많이 쓰는 관용적 표현이 무슨 문제냐”고 말한 바 있다. 혐오가 이처럼 특정 단어에 국한될 리는 없다. 교묘하게 논점을 흐리며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는 모습이다.

혐오, 특정 차별단어 사용여부로 축소해선 안돼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의 저서 ‘말이 칼이 될 때’를 보면 홍 교수가 참여한 과거 인권위 연구용역에서 혐오표현 네 가지를 규정했다. 고용·서비스·교육 영역에서 차별적 속성을 이유로 소수자에게 수치심, 모욕감, 두려움 등 정신적 고통을 주는 행위를 가리키는 ‘차별적 괴롭힘’, 편견과 차별을 조장하는 ‘편견 조장’, 소수자를 멸시해 인간 존엄성을 침해하는 ‘모욕’, 소수자 집단에 대한 차별·적의 또는 폭력을 조장·선동하는 ‘증오 선동’ 등이다. 혐오는 특정 단어의 포함 여부 등 단순한 차원이 아니다.

최근 이 대표의 발언이 비판을 받는 이유는 편견을 조장하고 대중에게 장애인에 대한 증오를 선동했기 때문이다. 이는 반드시 차별적인 단어 표현을 이용해서 벌어지지 않는다. 홍 교수는 저서에서 “문제는 조언이나 정책 제언을 빙자한 혐오표현들이 일견 온건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심각한 해악을 낳을 수 있다”며 “부정적 인식을 지속적으로 조장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그들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효과가 더 클 수 있다”고 지적했다.

▲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탑승장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진행한 장애인권리예산 및 관련법 개정 요구에 대한 인수위 답변 촉구 삭발 투쟁 결의식에서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장이 삭발에 앞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노컷뉴스
▲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탑승장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진행한 장애인권리예산 및 관련법 개정 요구에 대한 인수위 답변 촉구 삭발 투쟁 결의식에서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장이 삭발에 앞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노컷뉴스

이 대표는 약자가 무조건 선(善)이 아니라면서 반대로 장애인 시위를 비난하면서 출근하는 시민들을 선으로 규정하고 이동권 시위를 하는 장애인들을 그 대척점에 뒀다. 그는 지난달 28일 당 최고위원회에서 “특정집단의 요구사항은 100% 꼭 관철되는 것이 어렵다”며 “그렇다고 해서 선량한 시민 최대다수의 불편을 야기해서 뜻을 관철하겠다는 방식은 문명사회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방식”이라고 말했다. ‘선량한 시민’은 이동권에 불편을 겪지 않는 비장애인의 다른 말이다.

논란이 됐던 ‘시민을 볼모로 한다’는 표현에 대해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은 전장연 시위 현장을 찾아 장애인들에게 사과했다. 이에 이 대표는 “김 의원은 내 대변인이나 비서실장이 아니라 사과할 권한이 없다”며 “볼모라는 표현은 전혀 사과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지적하기 위해 그 표현까지 문제 삼으면 대한민국에서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볼모’라는 단어를 어떠한 상황에서도 쓰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볼모’라는 단어가 장애인들의 요구를 외면하고 장애인 단체의 일부 행위를 과장해 부정적인 의미로 상징화한다는 게 문제다.

▲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사진=노컷뉴스
▲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사진=노컷뉴스

정치인 발언으로 대중의 장애인 비난 현실화

더 위험한 부분은 곧 여당 대표가 될 위치에 있는 정치인이 증오를 선동했다는 점이다. 홍성수 교수는 지난달 29일 페이스북에 “그동안 지하철이 지연돼도 (속으로는 불만이 있을지언정) 장애인을 직접 공격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며 “하지만 모든 혐오와 마찬가지로 정치인이 혐오에 불을 지르는 순간 상황은 급속도로 변한다”고 지적했다. 출근길 시위가 불편하더라도 장애인을 비난하는 행위를 공개적으로 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 대표의 발언으로 비난이 현실화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실제 박경석 전장연 대표는 지난 2일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시위를 위해) 지하철 탈때면 정말 어마어마하게 (항의) 전화가 온다”며 이 대표 발언 이후 전장연 겨냥 욕설 등이 심해졌다며 상담치료 중이라고 했다. 박 대표는 “정치권력 대표 자리에 있는 사람이 누군가를 어떤 행위 하나 가지고 ‘죽여야 할 사람’으로 낙인찍었다”고 했다. 이 대표의 페이스북뿐 아니라 최근 쏟아지는 전장연 시위 관련 기사에도 장애인들을 비난하는 댓글을 적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몇몇 단어를 반박하면서 혐오를 하지 않았다는 이 대표의 주장이 타당하지 않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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