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 김 기자, 네가 그 자리 앉아있는 게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해?”  

영화 ‘내부자들’에서 이강희 조국일보 논설주간이 편집국장을 향해 날린 독설이다. 조국일보가 지지하던 유력한 대권 후보의 비리가 드러나기 시작하자 편집국장이 ‘차를 갈아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기 때문이다. 

제20대 총선 결과 여소야대 국회가 만들어졌고 이른바 ‘김재철 방지법’으로 불리는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법률 개정안도 발의된 상태다. 개정안이 국회 상임위와 본회의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공영방송 개혁이 이뤄진다면 현재 KBS·MBC 등 공영방송 이사회부터 임원진까지 물갈이가 불가피하다. 

지금의 공영방송 지배구조는 KBS 이사회가 여야 추천 이사가 7대 4,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이사회는 6대 3 구성이다. 정권을 잡은 정부·여당이 공영방송의 임원 선임을 비롯한 모든 의사결정 권한을 갖는 승자독식 구조다.

이 같은 공영방송 지배구조가 정권 편향적인 방송을 만들어 내면서 다수가 된 야당이 공영방송을 정상화하려는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지만, 여권 인사들은 위기감에 더 똘똘 뭉치는 모양새다. 청와대의 노골적인 보도개입에도 외려 내부고발자를 징계하는 KBS도 그렇고, 경영진에 대한 대법원 유죄 확정판결이 나와도 노골적으로 눈감아 주는 방문진은 무법천지에 가깝다.

▲ 영화 ‘내부자들’ 스틸컷
지난 1일 열린 방문진 정기이사회에선 예상대로 노조 사찰에 이용된 ‘트로이컷 사건’ 손해배상 판결을 받은 MBC 경영진에게 면죄부를 줬다. ‘노조를 사찰하려는 고의가 없었기 때문에 실무자 외 경영진의 관리 책임까지 묻는 건 과하다’며 다수 여권 이사들이 문책해야 한다는 야당 이사들의 주장을 묵살했기 때문이다. 

대법원이 분명히 “경영진도 노조 측의 사전 동의 없이 트로이컷을 설치해 개인정보를 일괄적으로 수집·보관·열람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묵인하거나 조장, 방조했으므로 공동불법행위자”라고 했는데도 방문진 여권 이사들만 법과 원칙에 눈과 귀를 막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9기에 이어 현재 10기 방문진 야당 추천 이사로 있는 최강욱 변호사는 9기 때 한 여권 추천 이사로부터 ‘솔직히 말하면 우리를 이 자리에 오게 해준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바라는 바가 있을 텐데 우리가 그걸 완전히 외면하면서 방문진 이사로서 일한다는 것도 이상한 일 아니냐’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내부자들’의 이강희 논설주간에게도 중요한 판단 기준은 ‘회사의 방침’이었다. 방문진 이사회를 방청하다 보면 누군가의 ‘방침’이 없다면 여권 이사들이 저렇게까지 MBC 경영진의 입장과 일치할 수 있을까 놀랄 때가 많다. 

당장 10기 이사회 때만 하더라도 MBC 사측이 노동조합과 소송에서 숱하게 패소하고, 부당노동행위가 인정되고, 극우매체 관계자와 만나 헌법을 부정하는 망언을 쏟아 냈는데도 방문진 여권 이사들은 ‘경영진 지키기’에 사활을 걸었다. 

▲ 지난 1월25일 뉴스타파 “MBC 고위간부의 밀담, ‘그 둘은 증거없이 잘랐다’” 갈무리
MBC를 중심으로 이해관계가 걸린 ‘내부자들’에는 사측의 입장을 대변하는 극우매체들도 포함된다. 지난 1월 내부자에 의해 폭로된 MBC ‘백종문 녹취록’에선 MBC 경영진이 극우매체의 생존까지 걱정하며 지원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나온다.

박한명 폴리뷰 편집국장이 “MBC도 폴리뷰한테 광고를 하나 해주고 싶어도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라고 하자, 백종문 미래전략본부장이 “우리 회사는 인터넷매체에 대해서는 전혀 지원이 안 되냐”고 MBC 관계자에게 물으면서 방문진에서 MBC 기사를 쓰는 극우매체에는 광고를 안 줬다고 지적했다. 

‘극우매체 살리기’라는 공감대가 통해서일까. 방문진은 고영주 이사장 취임 후 보수·극우매체들에 광고를 몰아주기까지 한 것으로 드러났다. ‘좌우 가리지 않고 다양한 매체에 공정하게 집행하자’는 이사들의 권고 사항도 지켜지지 않았다.

지난 1일부터 홍보를 시작한 ‘제19회 좋은 방송을 위한 시민의 비평상’ 공모의 경우 iMBC와 미디어워치·뉴데일리·조갑제닷컴·대학내일 5곳에 1000만 원 이상의 광고가 집행됐다. 박한명 폴리뷰 편집국장은 미디어워치 온라인편집장을 겸하고 있다.

방문진 일부 이사들이 ‘무슨 기준으로 매체를 선정했느냐’고 묻자, 고 이사장은 “MBC에 관심 있는 매체 중 방문진과 MBC를 악의적으로 비방하고 허위 보도를 한 매체에는 광고를 주지 말자고 했다”고 말했다. 고 이사장의 지극히 자의적인 판단을 고려해도 ‘백종문 녹취록’에 등장한 보수·극우매체에 대한 지원이 현실화된 것이다.  

결말을 알 수 없는 영화 같은 현실에서 위기에 몰렸을 때 가장 안전한 길은 대세를 따르는 것이다. 공영방송 여권 이사들은 가장 안전한 길이 자신을 그 자리에 있게 해준 이의 ‘방침’에 따르는 것이라 판단했을까. 법과 원칙을 부정하고 안위를 지키기 위해 ‘정도’를 넘어선 이들이 겪게 될 비극은 영화보다 더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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