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는 중국 사람들도 가장 가고 싶어하는 곳이 있다. 바로 중국의 최북단 베이지춘(北極村)이다. 특히 광둥성(廣東省), 장쑤성(江蘇省) 등 창장(長江) 이남의 사람들이 동경하는 곳이다. 더위에 지친 남쪽 사람들은 여름에 피서삼아 이곳에 오고싶어 한다. 또한 헤이룽장 사람들도 평생에 한번 가볼까 말까할 정도로 접근이 쉽지 않다.

필자는 지난해 8월말 베이지춘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헤이룽장성의 하얼빈에서 기차를 타고 출발해 꼬박 21시간을 기차위에서 보낸 뒤에야 도착했다. 기차는 중간에 네이멍구(內蒙古)자치주 땅을 가로질러 지나가는데, 도중에 다싱안링(大興安嶺)에서 벌목한 목재 집산지인 자그다치(加格達奇)역을 통과한다. 밤 9시쯤에 기차에 몸을 싣고 하루 밤을 보낸 뒤 하루종일 기차를 달려 오후 6시가 넘어서야 헤이룽장성의 최북단 기차역인 모허(漠河)에 도착했다. 베이지춘은 또 이곳에서 차로 2시간동안 울창한 다싱안링의 숲길을 달려가야 도달할 정도로 북쪽 땅끝마을이다.

지도상 동경 122.20도, 북위 53.33도에 행정구역상 모허셴(漠河縣) 시린지전(西林吉鎭)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명당중 명당이다. 다싱안링(大興安嶺) 산맥 북쪽 산기슭의 칠성산(七星山) 아래이자 헤이룽장 상류의 남단에 위치한 배산임수의 지역이다. 16㎢에 인구가 3천명이 안되는 순박한 초미니 시골 마을이다. 도착 즉시 첫눈에 나무로 벽과 지붕을 만들고 나무 울타리를 친 나무집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이전에는 무커렁(木克楞)이라 불리는 통나무집이었지만 지금은 개조된 목조가옥이다. 베이지춘은 환상적인 풍경과 전설로 가득 차 있었다.

 

베이지춘은 하늘 구경이 최고…옅은 하늘빛은 천지가 처음 열리는 느낌

8월말인데도 저녁이 되자 서늘한 가을 공기의 기운이 돌았다. 긴 팔을 입지 않으면 한기를 느낄 정도였다. 마을 안에는 어느새 가을꽃인 코스모스가 만개해 있었다.

여름에 낮 시간은 하루 17시간 이상이며 겨울에는 24시간 내내 밤만 지속되는 극야(極夜)현상이 나타난다. 낮의 연평균 기온은 영하 30도 이하이며 최저 기온은 영하 50도까지 내려간다. 이곳은 겨울이 10개월이다. 10월이 되지 않아 눈꽃송이가 휘날리기 시작한다. 여름에는 밤 12시까지 해가 지지 않는다.

중국인들의 속담에 ‘자오베이’(找北) 란 표현이 있다. ‘북쪽을 찾는다’란 뜻속에는 “자신의 ‘목표를 찾는다’”란 또다른 의미가 있다. 즉 나침반이 북쪽을 가리키듯 자기 인생의 방향을 찾는다는 의미다. 그래서 인지 중국인들은 ‘자오베이’의 행운을 위해 베이지춘을 많이 찾는다. 국내외 관광객을 포함해 연간 수십만명이 이곳을 찾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사람들은 베이지춘을 춥고(冷), 신기하고(奇), 순수하고(純), 아름답고(美), 깨끗한(淨) 자연(自然) 그대로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마을에서 걸어서 헤이룽장 강변에 나서면 100m 정도의 하폭 건너편은 러시아땅이다. 저멀리 러시아 민가가 보이는데 이전에 러시아인들의 유배지였다고 한다.

헤이룽장 강변을 걷노라면 온갖 상념이 일어난다. 이곳은 물이 맑고 투명한데 정갈한 자갈이 깔린 바닥이 선명히 보인다. 물위를 건너 북쪽의 러시아 하늘에 시선을 주면 색다른 하늘 세계가 열린다. 하늘 색깔은 마치 이 땅에 천지가 처음 열릴 때와 같은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베이지춘의 하늘은 옅은 하늘색이다. 한국의 푸른 가을하늘에 농도가 엷은 흰 물감을 아주 살짝 덧칠한 느낌이랄까. 원시 태초의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하늘이 바로 베이지춘에 있다.
 
‘북극광’은 천연 불야성…하늘에 펼쳐지는 환상적인 ‘빛의 공연’

‘베이지춘’의 여름철 별명은 ‘부예청’(不夜城, 불야성)이다. 말 그대로 밤이 없는 곳이란 뜻이다. 여름이면 이곳은 도시의 휘황찬란한 전등 불빛이 아닌 자연 태양광이 밤을 밝힌다.

매년 양력 6월 22일 이곳은 하지절(夏至節) 축제가 열린다. 여름은 6~8월로 2개월 정도로 극히 짧으며 그만큼 가는 시간이 아쉽다. 그래서 사람들은 연중 가장 해가 긴 하지를 경축하는 것이다. 이 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헤이룽장 강변에 가서 횃불을 밝히고 춤을 추면서 베이지광(白極光, 오로라, aurora)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문명이 발을 딛기 전 이곳의 소수민족인 허룬춘족(卾倫春族)은 태양신을 믿었다 한다.

하지를 전후한 보름동안 이곳은 국내외 전역에서 관광객들이 몰린다. 오로라와 백야(極晝)를 구경하려는 사람들이다. 짧은 여름에 이곳은 높고 넓은 하늘을 배경으로 태양이 그려내는 환상적인 ‘빛의 공연’이 펼쳐진다.

행운이 겹친다면 눈부시게 아름다운 오로라를 볼 수 있다. 또 하지를 전후해 하루 20시간 가까이 태양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백야 현상이다. 밤에도 여명이나 석양과 비슷한 밝기가 계속되는데, 실외에서 바둑을 둘 수 있고 농구를 할 수도 있을 정도의 조명이라고 한다.

필자가 간 때는 가을로 넘어가는 8월 말로 뿌연 밤하늘에 오로라는 없었다. 대신 국자모양의 북두칠성이 머리위 하늘에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오로라와 관련해 이곳에는 아름다운 전설이 있다.

헤이룽장성 강변에 거주한 한 노부부는 중국의 여신인 시왕무(西王母)에게 7명의 딸을 물을 깃는 시녀로 보냈다. 매년 하지 저녁이면 하늘에서 이 딸들이 그리운 부모를 보러오기위해 하늘에서 7가지 색깔의 긴 리본을 드리우며 춤을 춘다는 것이다.

또한 이곳은 석양이 아름답다. 눈부시게 타오르는 석양을 보노라면 마음이 한없이 넓어진다. 해가 서쪽 하늘을 넘어가면서 노을이 질 때면 가수 안치완이 부른 ‘내가 만일’의 가사와 곡조가 저절로 떠오른다.

“내가 만일 하늘이라면 그대 얼굴에 물들고 싶어, 붉게 물든 저녁 저 노을처럼 그대 뺨에 물들고 싶어.”

겨울에는 온 천지가 ‘설국’(雪國) …헤이룽장의 맑은 물속 냉수어맛 담백

베이지춘의 또다른 매력은 겨울이다. 최저 영하 50도까지 내려가는 이곳은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겨울철 풍경이 펼쳐진다.

겨울이 되면 이곳은 온통 ‘설국’(雪國)이 된다. 눈이 50㎝로 쌓이면 크리스마스 카드에서나 볼 듯한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다싱안링의 삼림은 거대한 눈밭으로 변하고 주변은 온통 순백의 은세계가 펼쳐진다. 그 때가 되면 통행은 말이 끄는 썰매마차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모허(漠河)는 청나라때 ‘무허’(墨河)로 불렸다. 왜냐하면 물이 먹(墨)처럼 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나중에 발음이 유사한 모허로 바뀌었다. 실제 헤이룽장 지류가 베이지춘을 통과하는데 육안으로 볼 때 실제 먹물처럼 검다. 오랜 세월 떨어진 원시림의 낙옆이 썩어 바닥이 검게 채색이 되면서 눈이 천지를 뒤덮은 겨울철에는 긴 ‘흑룡’(黑龍)이 광활한 백색 대지를 기어가는 절경을 연출한다. 이곳에는 흑룡이 강을 다스려 물길이 막히지도, 역류하지도 않고 마을을 보호한다는 전설이 있다.

겨울과 초봄에는 나무나 풀잎에 눈처럼 내린 서리인 ‘우쑹’(霧淞)을 구경할 수 있다. 미세한 이슬방울이 갑자기 찬 기운을 만나면 얼어 서리가 되면서 나뭇가지와 잎에 달라붙어 눈꽃을 피우는 것으로 동화세계에 들어선 착각을 일으킨다.

봄과 가을은 아주 짧다. 봄에는 온 산에 철쭉꽃, 야생 양귀비꽃과 야생장미꽃이 핀다. 가을에는 알록달록 단풍이 들고 한 폭의 산수화와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이곳에는 헤이룽장에서 잡히는 냉수어(冷水魚)를 맛볼 수 있다. 찬물에 사는 바가사리처럼 생긴 냉수어에 양념을 해서 쪄서 먹으면 맛이 아주 신선하다. 또 비린내가 없고 육질이 부드러우며 담백하다. 차가운 물에 사는 냉수어는 체온보호를 위해 지방이 많고 영양가가 높은 것이 특징이다. 고춧가루 없이 양념을 넣어 찌기만 했는데도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겨울에는 두꺼운 얼음을 뚫고 그물을 풀어 고기를 잡는다.

이곳에는 중국에서 유일한 야생 블루 베리인 ‘란메이’(藍苺)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건포도 형태나 주스로 팔리는 란메이는 고혈압 등 성인병 예방에 효과가 있어 고가로 팔려나간다.

마을 사람들은 이전에 사냥을 하고 고기를 잡아서 생활했으나 관광객들이 몰리면서 여행업을 주업으로 하고 있다. 필자가 묵은 곳은 아담한 여인숙 같은 곳이었는데 방안에는 최신형 데스크탑 컴퓨터가 설치돼 인터넷을 할 수 있고 위성 텔레비전으로 선명한 화질의 프로그램을 시청할 수 있었다.

베이지춘은 ‘北’이라는 글자로 가득…간판마다 ‘최고 북쪽’ 상호 강조

이곳은 모든 것이 ‘최고 북쪽’이다. 마을 안에서 가장 많은 글자를 찾으라면 ‘북’(北)자일 것이다. 중국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건물의 기록은 모두 베이지춘이 세우고 있다. 우체국부터 초등학교, 향정부, 변방초소, 심지어 화장실까지 모두 중국에서 최고 북쪽이란 기록을 가지고 있다.

마을에서 헤이룽장을 향해 걷다 보면 한 켠에 ‘최북점’(最北點)이라는 팻말이 있다. 이곳이 지도상으로 중국에서 가장 북쪽인 지점이다. 관광객들이 많이 몰리면서 풀밭과 나무 사이에 나무판자로 2m폭으로 만든 길을 설치해 두었고 에스(S)자로 굽은 판자길을 따라가면 큰 자연석 정면에 붉은색으로 ‘중국북극점’(中國北極點) 이라 새긴 최북점이 나온다.

최북점 앞의 풀밭에는 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데 풀밭위에 놓인 돌과 나무 팻말에도 무수한 ‘北’(북)자를 새겨 놓았다. 필체가 모두 다른 ‘北’(북)자들은 당태종을 포함해 당나라때의 서예가 안진경(顔眞卿)의 ‘옌체’(顔體) 등 유명한 명필가가 쓴 ‘北’(북)자를 총 망라해 놓았다.

자작나무와 낙엽송 등 ‘숲의 바다’ 다싱안링…하늘에서 날아온 소나무(飛來松)

추운 베이지춘이 위치한 다싱안링의 수종들은 냉대림으로 소나무의 일종인 장즈송(樟子松)과 낙엽송(落葉松)이 위주다. 실제 결이 고와 재목으로 쓰이는 홍송(紅松)은 이런 추운 땅에서는 생존할 수 없다. 그러나 30년전에 칠성산의 자락의 양겅위안(楊更遠)이라 불리는 임업노동자가 이곳에서 두 그루의 홍송을 발견해서 진귀한 이야기로 남아있다. 그중에 한 그루는 1987년에 죽었고 현재 한 그루가 남아 있는데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 내력에 관해서는 설이 엇갈린다. 한가지 설은 작은 새가 나무씨를 삼키고 난 다음 이곳에 눈 똥속의 씨가 땅에서 뿌리를 내려 싹을 틔웠다는 것이다. 또다른 설은 이 지역이 서시베리아의 홍송이 분포하고 있는 식생대여서 자라났다는 것이다.

어쨌든 사람들은 이 나무를 ‘하늘에서 날아온 소나무’라는 뜻으로 “페이라이쑹”(飛來松)이라고 부른다. 베이지춘으로 가는 다싱안링의 도로옆에는 자작나무의 바다가 펼쳐진다. 그 숲속에 서면 한그루의 나무가 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순수한 자연과 한 몸이 되고 싶을 정도로 숲속 분위기가 고요하다.

다싱안링 대화재, 1987년 5월 6일 발생 28일간 ‘인민전쟁’으로 불길 잡아

원시삼림 다싱안링에 대화재가 1987년 5월 6일 밤에 발생해 사람들에게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 공포로 되고 있다. 당시 모허셴(漠河縣)에서 발생한 화재는 건조한 공기를 타고 28일동안 다싱안링을 불태운 끝에 사망자 193명과 피해면적 101만㏊, 채벌목재 80만㎥, 5만여명의 이재민을 내는 등 엄청난 재산피해를 입혔다.

인민해방군 등 5만여명이 출동하는 ‘인민전쟁’을 치른 끝에 불길을 잡은 가슴아픈 사건으로 지역 주민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그런 재난속에서도 불가사의하게 4군데는 불에 타지 않아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이를 그곳 주민들은 ‘불타지 않은 네가지’란 뜻의 ‘쯔부사오’(四不燒)라고 부른다.

이 4개곳은 수목공원인 쑹위안(松苑)과 사찰인 칭전쓰(淸眞寺), 화장실과 묘지 등 4곳이다. 이곳은 모두 화재의 중심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대화재뒤 사람들이 현장에 화재의 흔적으로 보러 갔을 때 이곳에서만 불길이 갑자기 멈춘 흔적이 발견됐다. 비록 4군데에는 불에 탈 인화물질들이 많이 있었지만 어느 누군가가 불길을 갑자기 끊은 것처럼 더 이상 불길이 번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덕분에 1971년 세워진 모허셴 시내 중심부의 소나무 수목공원인 쑹위안(松苑)은 엄청난 대화재속에서도 수십년부터 150년 된 수령의 나무들이 온전하게 잘 보존되어 있다.

 ‘골드 러시’로 ‘연지개천’(臙脂溝)에 떼로 몰려…청말 서태후가 연지와 바꾼데서 유래

베이지춘은 처음 ‘골드 러시’로 인해 개발이 시작됐다. 베이지춘에서 북쪽으로 43㎞되는 지점인 모허셴 모허샹(漠河鄕)에 어무얼허(額木爾河)의 지류로 금이 많이 난다고 해서 라오진거우(老金溝)라고 불리는 한 개천이 있다. 이 개천은 길이가 14㎞되는 길이에 금이 발견된 뒤 1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간 10차례에 걸쳐서 금을 채취했음에도 요즘에도 금이 나고 있다고 할 정도로 ‘노다지’땅이다.

금이 발견된 사연이 희한하다. 1877년 소수민족인 어룬춘족(卾倫春族)의 한 노인이 기르다 죽은 말을 묻으려고 땅을 팠는데 수많은 금맥의 싹이 고개를 내밀고 있어서 모래를 파보니 모래중에 금 가루가 절반이 나왔다. 이 소문이 러시아, 시베리아, 헤이룽장성 등지로 퍼져면서 금으로 한탕을 노린 사람들이 떼로 몰려들어 광산으로 개척되었다. 한때 사람이 많았을 때는 1만명이 운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감정결과 금 함량이 87.5%로 백은 7.9%, 기타 잡물질이 4.6%로 순도가 높다. 1889년에 황금 생산량이 2만냥(750㎏)에 이를 정도였다.

여성의 입술화장에 쓰이는 ‘연지’이름이 금개천에 붙여진 데는 일화가 있다. 청말 철권통치 여성인 서태후(慈禧皇太后)가 공물로 바쳐진 이곳의 금으로 본인이 치장할 연지를 샀다고 하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설은 이곳이 1880년대에 융성하다보니 상하이(上海), 항저우(杭州) 등지로부터 기생들이 몰려들어 장사를 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당시의 기생집이 30여집이 되었는데 일본과 러시아의 기생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 기생들이 화장을 지우기 위해 씻고 목욕한 물이 이 개울로 흘러들었는데 물위에 한층의 연지가 떠서 화장 냄새가 멀리까지 퍼지게 된데서 이곳을 ‘연지개천’이라고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계속>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