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이변을 기대하며 거리를 붉게 물들였던 축구 팬들은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하며 대한민국 월드컵 축구국가대표팀의 완패를 받아들여야 했다.

17일 밤 8시30분(한국시간)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사커시티 경기장에서 열린 한국 대 아르헨티나의 B조 예선 2차전은 한국의 1대4 패배로 끝이 났다. 아르헨티나가 월등한 기량을 과시한 것도 분명하지만, 패인은 한국에 있었다.

차두리 대신 오범석을 오른쪽 수비수로 출전시킨 선택은 결과적으로 실패였다. 아르헨티나는 오범석 쪽을 줄기차게 공략했고, 성공을 거뒀다. 오범석은 꾸준히 대표팀 경기에 나섰던 경험이 있고, 차두리에 비해 세밀한 플레이는 더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에서 그의 본 실력은 나타나지 않았다.

수비축구를 통해 아르헨티나 공격을 봉쇄하겠다는 판단은 일부분 타당성이 있었지만, 전반 이른 시각에 박주영의 자책골이 나오면서 당초 구상은 깨질 수밖에 없었다. 북한이나 덴마크와 같은 탄탄한 수비 조직력을 지닌 팀들은 선수비, 후역습 전략이 통할 수 있으나 한국은 그런 팀이 아니었다.

   
  ▲ 12일 밤(한국시간) 포트엘리자베스 넬슨 만델라 베이 스타디움에서 열린 남아공월드컵 B조 첫경기 한국-그리스 경기에서 박지성이 추가골을 넣고 나서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강팀과의 경기에서 좋은 결과를 보여줬던 상황을 되짚어보면 한국 특유의 압박과 빠른 측면돌파 등이 어우러진 경기였다. 수비 위주의 경기에서는 좋은 결과가 많지 않았다. 전반전 너무 많은 공격을 허용하면서 자신감을 잃은 것도 패인 중 하나였고, 박주영의 자책골과 심판이 오프사이드를 보지 못했던 아르헨티나의 세 번째 골 등 운이 따르지 않았다는 점도 패인으로 작용했다.

1대4 패배는 남아공 월드컵을 통틀어서도 호주의 0대4 패배 다음으로 큰 격차를 보인 완패였다. 4점을 실점한 국가는 호주와 한국, 두 곳밖에 없다. 아르헨티나가 월드컵 우승후보다운 실력을 보였지만, 한국은 너무 많은 실점을 했다.

한국은 아르헨티나에 완패해 1승1패 골득실차 -1이라는 상황에서 마지막 나이지리아와의 결전을 앞두고 있다. 6월23일(수요일) 새벽 3시30분에 열리는 나이지리아전은 한국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이자 가장 중요한 경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완패에도 16강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그리스와 나이지리아의 드라마 같았던 2차전 때문이다. 그리스는 나이지리아에 2대1 역전승을 거뒀다. 나이지리아가 첫 번째 골을 성공시키면서 한국의 16강 가능성에도 짙은 먹구름이 드리웠다.

나이지리아가 승리를 거둔다면 한국은 마지막 경기에서 비겨 1승1무1패를 거둬도 16강에 탈락하는 상황을 맞이할 뻔했다. 나이지리아 수비수가 전반 33분 그리스 선수와 다투던 도중 발로 가격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심판은 가차 없이 레드카드(퇴장)를 꺼내 들었다.

기세를 올리던 나이지리아는 황당하고 충격적인 상황에 평정심을 잃었다. 월드컵 출전 역사상 한 골도 없었던 그리스는 나이지리아를 상대로 맹공을 쏟아 부었고 2대1 역전승을 일궈냈다.

결국 그리스는 1승1패 승점 3점, 골득실차 -1로 한국과 같았지만 다득점에서 밀려 조3위가 됐다. 나이지리아는 2패를 안고 한국과의 마지막 경기에 임해야 하는 상황이다. 한국이 조2위라는 점은 마지막경기에서 비기기만 해도 사실상 16강을 확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리스가 아르헨티나를 꺾을 경우 상황은 달라지지만 객관적 전력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그런 상황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리스가 아르헨티나와 비기는 것도 쉽지 않지만 비긴다고 해도 한국이 나이지리아에 패하지 않는다면 16강은 한국의 차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스와 한국이 모두 비긴다고 가정할 때 한국이 0대0으로 비기면 그리스는 2대2 이상으로 비겨야 한다. 그리스가 1대1로 비긴다면 골득실 -1, 다득점 3점까지 한국과 똑같지만 승자승 원칙에 따라 한국이 그리스를 누르고 16강에 오른다.

어차피 한국은 나이지리아에 패하면 100% 16강에 탈락한다. 한국은 최소 비겨야 한다. 비긴다면 그리스는 아르헨티나를 꺾는 대이변을 연출하지 못하면 16강에 오르기 어렵다. 확률적으로만 보면 한국이 나이지리아와 한 골이라도 넣고 비긴다면 그리스는 아르헨티나에 3골 이상을 넣고 비기거나 이겨야 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16강 진출 가능성이 커진다.

한국은 자력으로 16강에 진출할 가능성은 없지만, 객관적인 환경은 그리 나쁘다고 보기 어렵다. 나이지리아가 만만찮은 전력을 지녔지만 그리스와의 경기에서 출혈이 너무 컸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나이지리아 주전 선수가 퇴장과 부상에 따라 3차전 출전이 어렵게 됐다는 점은 한국에 청신호로 다가오는 대목이다. 또 10명이 그리스 11명을 맞서야 했던 2차전에서 체력소모가 극심했다는 점도 나이지리아의 고민을 가중 시킬 것으로 보인다.

한국이 아르헨티나에 1대2 정도로 패했다면 마지막 3차전에서 나이지리아에 1점 차이로 패한다고 해도 16강에 진출하는 상황도 맞이할 뻔 했다. 너무 큰 격차로 패했다는 것이 아쉬울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그러나 1승2패로 월드컵 16강에 나가는 상황은 실력이 아닌 운이 따라야 가능한 일이다. 한국은 마지막 나이지리아전에서 최소한 비기거나 기분 좋게 승리를 거두면서 16강에 오르겠다는 각오로 임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행히 한국은 특별한 부상 선수도 없다. 경고누적으로 출전이 좌절된 선수도 없다. 아르헨티나와 경기에서 완패했다는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게 선결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18일 새벽에 열린 A조 예선 멕시코와 프랑스 경기는 2대0으로 멕시코가 이겼다. 우루과이와 멕시코는 각각 1승1무 승점 4점으로 A조 1, 2위를 달렸고 프랑스는 승점 1점으로 마지막 경기에 임하게 됐다.

프랑스는 마지막 남아공과의 경기에서 3골차 이상의 대승을 거두고 멕시코가 우루과이와 2골차 이상의 패배를 해야만 16강에 오를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을 안게 됐다. 프랑스는 개최국 남아공과 함께 16강에 탈락할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A조 결과가 중요한 이유는 한국이 16강에 오를 경우 상대할 팀이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멕시코와 우루과이 중 한 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아르헨티나전에서 충격의 완패를 당했지만, 한국 경기를 제외한 다른 경기 결과는 한국에게 유리하게 나타났다.

6월23일 운명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한국이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16강은 물론 그 이상의 결과도 기대할 수 있는 ‘좋은 대진운’을 탔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